42코스 : 하조대해변 - 죽도정 입구. 9.9km
해파랑길 42코스는 하조대해변에서 죽도정에 이르는 9.9km의 비교적 짧은 구간이다. 양양을 대표하는 정자중 하나인 하조대가 있으며, 기사문항과 동산항이 있다. 죽도해변, 북분리해변, 잔교해변, 38해변은 규모는 작지만 조용하고 쾌적한 해변 환경을 즐길 수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코스의 역방향으로 걸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하조대해변-하조대-기사문항)
하조대해변을 출발해 광정천 위에 놓인 하륜교를 건너 하조대를 향한다. 양양군 현북면 명지리에서 출발해 8.2km를 흐르는 광정천은 길이가 짧은 하천이지만 많은 모래를 운반한다. 하천의 중류 이상은 하도에 달뿌리풀이 우점하고 있다. 하조대까지는 입구에서부터 700여 미터를 걸어 들어가야 한다. 중간에 작고 조용한 해변에 꾸며진 군부대의 하조대 휴양소를 지나친다. 바닷가에서의 휴식은 해변의 크기보다 해변의 조용함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운대나 광안리처럼 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해변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비교적 짧은 거리인데도 여러 대의 자동차가 지나가는 걸 보면 확실히 명소이다. 하조대는 조선 초기의 하륜과 조준이 이곳에 와서 놀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주 하조대를 찾아 즐기던 두 사람은 이곳의 바위에 하조대라는 글자를 새겼다(『여지도서』 양양도호부 고적조). 하지만 그들이 새겼다는 각석은 지금 찾을 수 없고, 숙종 때 사람인 이세근이 바위에 새긴 각자가 하조대 정자의 입구에 있다. 쭉쭉 뻗은 소나무 사이에 서있는 정자 건물은 1968년 재건된 것을 1998년 해체 복원한 것이다. 정자에서 바라보면 바위와 바다가 이루는 절경이 펼쳐지는데 아찔한 바위 위에 소나무 보호수가 서있다. 수령이 200살이 넘는 이 나무는 애국가에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2019년 새로 나온 애국가 영상에서는 지리산 뱀사골의 천년송이 그 자리를 잇고 있다. 하조대 바로 옆에는 기사문 등대가 있다. 작고 아담한 등대를 들렀다가 길을 돌아 나온다.
하조대 막국수 집에서 만두와 비빔막국수를 주문했다. 비빔막국수를 시킨 것은 비빔면으로 먹다가 시원한 육수 국물을 부으면 물막국수가 되어 비빔과 물을 같이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워낙 메밀국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자주 다니다 보니 이 집의 양념장을 적당히 덜어 내 입에 간을 맞추는 요령이 생겼다. 만두는 한 접시에 주먹만 한 것이 다섯 개가 나와 만두와 막국수를 다 먹기에는 양이 많지만 걸을 때는 식사시간을 제때 맞추기 어려워 기회 있을 때 꾸역꾸역 다 먹는다. 잔뜩 부른 배를 하고 현북면이 있는 하광정리의 뒷골목을 천천히 걷는다. 깔끔하게 정리된 마을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마을의 외곽에 있는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정문에 서있는 양버즘나무 두 그루가 몰골이 말이 아니다. 전지를 했는데 거의 통나무를 만들어 놓았다. 주변에 전깃줄도 없는데 이렇게 자른 것을 보면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 것 같은데, 이 나무를 보면서 등교를 하는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아이들에겐 깔끔한 교정도 필요하지만 하늘로 마음껏 가지를 펼친 나무 그늘 아래서 놀아본 추억도 필요하다.
기억과 추억(기사문항- 38휴게소-잔교해변- 죽도정입구)
3.1 만세운동 유적비가 길 건너로 보이는 만세고개를 넘어 기사문항으로 간다. 1919년 만세운동을 하다 하조대 주재소로 이동하던 이들은 이 고개에서 왜경에 의해 9명이 피살된다. 이 때 돌아가신 분들을 포함해 만세운동을 하다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세워진 비이다. 기사문리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의 담장에는 만세운동을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멀리 조도를 바라볼 수 있는 38해변은 모래를 밟을 때마다 모래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해 명사(鳴沙)라고 부른다. 해변에 38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이 북위 38도선으로 해방 이후 한마을의 분단과 6.25의 전쟁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곳이지만 이곳은 과거 영동고속도로를 통해 양양과 속초로 가던 고속버스가 잠깐 정차하던 곳이다. 지루한 고속도로를 타고 오다 버스에서 내려 파도치는 동해바다를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이제는 도로가 많아져 동해로 오는데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지도 않고, 자가용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이 휴게소를 이용하는 사람은 예전 같지 않다.
휴게소를 떠나 잔교해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육교에는 "파도를 탄다. 행복을 탄다."라는 글과 함께 한가족이 보드를 들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기억해야 할 것과 알거나 즐겨야 할 것이 다른 세상이다. 소나무숲길을 걸어가며 숲 사이로 듬성듬성 보이는 바닷가에는 경찰전적비와, 어린이 교통공원, 해난어업인 위령탑이 보인다. 전적비와 위령탑을 볼 때마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가슴 아픈 사연들이 있을까 싶어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된다면 잠시 노선을 벗어나 잔교해변을 들르는 것도 좋다. 비수기면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잔교해변은 가끔 청소를 위해 이곳을 찾는 마을 어른들뿐이어서 바다를 넉넉히 쓸 수 있다. 겨울철 이곳을 걷다 다른 물고기에 쫓겨 모래사장으로 멸치 떼가 올라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모래 위에서 은빛이 반짝이는 멸치들을 마침 이곳에 있던 동네 어르신들이 주워 담기 바빴다. 예전엔 무슨 이유인지 새우들이 떼를 지어 해변으로 오르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가끔 바닷가에서는 평소에 볼 수 없는 진기한 경관을 마주하기도 한다.
북분삼거리에서 토끼굴을 지나 복분리해변으로 나간다. 토끼굴을 지나갈 때면, 특히 조명이 없는 토끼굴을 지나갈 때면 이곳을 지나가면 선계(仙界)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든다. 토끼굴을 벗어나니 신선이 사는 세계는 아니지만, 파도 넘실대는 바다와 해변, 그리고 곰솔숲이 있다. 나에게 바다는 이상향이다.
둥굴둥굴한 바위들이 항 한가운데 박혀있는 동산항이다. 바위들을 들어내지 않고도 항을 이용하는 것이 돋보인다. 동산리는 마을과 해변에도 둥근 바위들이 있다. 해변의 바위에 성혈 자국이 보인다. 마을 안의 둥근 바위도 누군가 치성을 드린 자국이 있는 것을 보면 바위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은 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보인다. 이곳에는 또 바위에 암각문이 있는 곳도 있는데 마모된 부분도 있고 해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섬 봉우리에 전망대가 보이는 죽도해변의 그네에 앉아 쉬어 간다. 오후의 햇살에 그림자들이 성큼 길어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