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시간이 쌓여 역사를 만들고

47코스: 삼포해변 - 가진항. 9.7km

by 물냉이

해파랑길 47코스는 삼포해변에서 가진항까지의 9.7km 구간이다. 다른 코스에 비해 짧은 구간이지만 송지호, 서낭바위, 수뭇개바위 등 수려한 자연경관과 왕곡마을 같은 우수한 문화자원을 만날 수 있다. 가진항에서 삼포해변으로 역방향으로 걸었다.


걷기는 놀이다(가진항-수뭇개바위-왕곡마을-송지호)

가진항에는 높은 파도를 피해 들어온 배들이 넉넉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그는 바다 쪽에서 걸어왔고 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강릉 횟집에 앉아 매운탕을 주문하고 밑반찬에 소주부터 한잔한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못하지만 즐기는 것은 좋다. 바닷바람을 많이 맞은 날에는 살짝 덥혀진 속이 몸의 긴장을 덜어준다.

20200216_134453.jpg 가진항에 정박해 있는 배들, 항의 안쪽은 파도가 없다.
20200216_135600.jpg 밑반찬에 반가움을 한 잔 한다. 가끔 걸을 때의 반주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준다.


가진항을 떠나 천천히 해변을 걷는다. 모래밭 위에 다른 바위들이 쓰러져 뒹구는데 촛대바위는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옆의 바위 보다도 작은데도 눈에 띄는 것은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때문일까. 어디서고 홀로 서있는 바위는 촛대라는 이름을 얻는다. 이곳의 바위도 예외는 아니다. 나도 한때 항렬을 따른 이름이 아닌 나만의 별칭을 갖고 싶었던 적이 있다. 인터넷을 사용하며 '머릿돌'의 한자어인 '두석(頭石)'이라는 이름을 글 끝에 쓰곤 했었는데 사람들은 '석두'라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려 쓰기를 접어버렸다. 내가 만드는 이미지가 이름을 따라가지 못했던것 같다.

밀려오는 파도 아래 발도장을 부지런히 찍는다. 세상에 와서 신나게 놀다 돌아가면 해변의 발자국처럼 다 지워지길 바랬는데, 살아보니 지울 만큼 세상에 남긴 것이 별로 없다. 어쨌든 우리는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휴대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에게는 놀이가 된다. 길을 걸으며 즐거울 수 있다는 것, 무엇이 더 필요할까.

20200216_145711_가진항.jpg 가진의 해변을 걷는다. 가진항의 등대가 마치 바다로 달려가는 듯 흰 포말이 거세게 일고 있다.
20200216_150121.jpg 어디서고 홀로 서 있는 바위는 촛대라는 이름을 얻는다.


20200216_150734.jpg 파도가 깨끗이 지운 모래를 찾아 발자국을 찍어 본다.

공현진은 바다의 수심이 낮은 해변이다. 수심이 낮은 바다는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줘서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해수욕과 함께 바다를 즐긴다. 공현진바다의 수뭇개바위는 바위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하지만 겨울엔 거친 파도가 바위를 넘나 들어 사람들은 멀찍히 떨어져 파도를 감상한다. 공현진해변은 여름이나 겨울 두계절 다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나는 파도가 거친 겨울의 공현진을 더 좋아한다. 거친 파도 속에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서있는 바위와 바위 위의 푸른 곰솔을 보면 힘을 얻기 때문이다. 파도에 맞서고,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도전하는 삶을 보여주는 공현진바다의 풍경이다.

20200216_152309.jpg 겨울의 수뭇개바위. 강한 파도와 맞서느라 잔뜩 긴장하고 있다.
20210711_152009_47코스.jpg 여름의 수뭇개바위. 잔잔한 파도와 함께 사람들의 접근을 넉넉히 바라봐주고 있다.


공현진항에서 왕곡마을 가는 길가에 송지호재첩칼국수집이 있다. 지역의 주민들이 즐겨 찾는 이 집은 송지호에서 나는 재첩을 이용해 칼국수를 만드는데 섬진강의 재첩과는 또 다른 국물 맛을 가지고 있다. 고개를 넘기 전 초가 여러 채가 모여 있는데 향토음식을 파는 저잣거리를 조성해 놓은 이곳은 수리 중인지 아쉽게도 영업을 하고 있지 않다. 이곳은 여러 번을 찾았는데 아직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조선에 의해 고려가 망하자 고려의 유신들은 조선의 정계에 나가지 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은거한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듯 '두문불출'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다. 조선 영조 때에 와서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하고 비를 세워주고 그들의 의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두문동의 이야기는 강원도 정선의 두문동 7현으로도 이어지기도 하며, 왕곡마을을 처음 개척한 함부열도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함부열이 왕곡마을의 윗마을에 터를 잡고, 그 뒤로 강릉 최씨들이 아랫마을에 자리 잡으면서 지금의 왕곡마을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마을의 입구에 동학기념비가 있는 것은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이 이곳에 몇 달 동안 숨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곡마을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강원도 이북지역에서 볼 수 있는 밭전(田)자 형태를 띤 전통한옥들이다. 춥고 눈이 많은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집들은 조선시대 고성의 환경과 사람의 살았던 모습을 짐작하게 해 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살펴보는 것은 잠깐이고 마을의 입구에 조성 중인 연못이나 영화 '동주'의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더 눈에 들어오니, 걸으며 지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인문적인 소양이 부족해서인지 모를 일이다. 나는 왕곡마을의 11월을 좋아한다. 관광지로만 느껴지던 왕곡마을에 가을이 찾아오면 산들은 단풍으로 옷을 입고, 마을 사람들은 벼를 추수하고, 밭에서 나는 것들을 갈무리하며, 익은 감을 딴다. 사람 냄새가 난다.


20170321_075453.jpg 왕곡마을 가는 길에 있는 향토음식 저잣거리
20170321_080106.jpg 동학사적 기념비
20170321_080305.jpg 마을 입구를 지키는 장승들
20201203_170043.jpg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8호인 반시재(盤枾齋). 21대째 내려오는 함씨가문의 집이다.



자연 속에 깃든 사람 이야기(송지호-송지호해변-서낭바위-삼포해변)

왕곡마을의 연꽃 연못을 지나 송지호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이 길을 따라 송지호 오토캠핑장 앞에서 송지호 쉼터까지 소나무 숲길을 걸어가는데 겨울철에는 농사가 끝난 밭을 가로질러 솔숲길로 직접 건너가기도 한다. 석호인 송지호는 먼 옛날 정거재라는 구두쇠의 옥토였으나 시주 온 스님을 박대하여 그 스님이 문 옆의 쇠절구를 논 한가운데 던졌는데 절구에서 물이 솟아 논밭을 물에 잠기게 하고 그것이 송지호가 되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송지호의 맑고 깊은 물을 바라다봐도 쇠절구는 보이지 않지만 그 덕분에 생긴 송지호엔 겨울이면 고니를 비롯한 철새들이 찾아오고, 사계절 많은 관광객들이 이 호수를 찾고 있다. 솔밭을 걸어 송지호가 보이는 데크를 따라 걸으니 여러 마리의 고니들이 근처에 앉아 있다. 그런데 이들은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를 않는다.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고니들을 떠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은 좋은데 실물을 만난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20210711_154534.jpg 송지호 전경. 소나무숲 사이로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어 걷기 좋다.
20210711_155910.jpg 송지호의 탐방로, 해파랑길의 안내 리본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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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호의 탐방로와 전망대
20210711_154454.jpg 송지호 주변의 고니들, 이들이 조형물이라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송지호 앞의 밀리터리체험장은 사구습지가 있던 곳이다. 총을 쏘며 가족이나 친구들이 신나게 놀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자연의 속살을 볼 기회가 적은 이들에게 사구습지를 좀더 가까이서 살펴보고, 다양한 생물을 만날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마련했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우수한 생태계를 체험하고 즐길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한 상황이다. 데크길을 조성해 놓은 남아 있는 사구습지에 곰솔을 심어 놓았다. 하지만 이곳은 곰솔이 들어서면 육지화가 가속되어 사구습지의 기능과 경관을 훼손하게 된다. 자연이 지니고 있는 모습을 잘 읽고 그에 맞는 조처를 취한다면 비용도 많이 들지 않고, 생태적인 가치가 큰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다.


20200216_155414.jpg 송지호 앞의 사구습지. 지금은 물이 말랐지만 이곳은 사구가 만들어 놓은 습지이다.


오호항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아랫부분이 오목하게 파인 서낭바위가 있는데 지질적인 가치 뿐만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가치도 큰 곳으로 잠시 들러 감상을 하고 가는 것이 좋다. 서낭바위로 가기 위해서는 설치된 데크를 따라 올라 등대로 가야한다. 소나무숲 가운데 우뚝 서있는 등대는 기대어 잠시 쉬어 가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드는 곳이다. 여름에 이 등대를 찾으면 소나무 숲에 부는 시원한 바람의 가치를 금새 깨달을 수 있다. 등대에서 바다 쪽으로 향한 절벽 아래에 서낭당과 서낭바위가 있다. 절벽의 계곡에는 해국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해국이 피는 늦여름이면 보라색 화원이 된다.

고성엔 네 곳의 지질 명소가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화진포, 고성 제3기 현무암, 송지호 해안, 능파대 등이다. 고성 제3기 현무암은 죽왕면 오봉리의 오음산과 운봉산 일대에 있는 주상절리로 된 암괴류를 말하며, 송지호 해안을 대표하는 것이 서낭바위 일대이다. 해설을 하시는 분들이 이 네 곳을 돌아가며 해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 이분들을 만나 해설을 들을 수 있다. '물론 난 운이 좋은 편이다.' 운수바위라 이름 붙인 규장암이 관입한 화강암 바위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돌을 붙여 놓았다. 미신이라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납작한 돌 하나를 붙이며 가족의 건강을 빈다. 누가 뭐라건 내 기도의 시간으로 활용하면 된다. 서낭바위 위에는 작은 곰솔이 한그루 자라고 있다. 나무를 키우는 바위에 가치를 두어야 할까 아니면 흙이 거의 없는 바위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에 감탄해야 할까.

20210711_110133.jpg 서낭바위 일대의 모습
20210711_111139.jpg 서낭바위의 목에 해당되는 규장암은 곧 바위가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시멘트를 덧칠해 화를 피하고 있다.
20210711_111340.jpg 복어바위, 벌린 입이며, 뒤쪽의 꼬리가 복어를 닮았다.
20210711_110022.jpg 운수바위 위에 올려놓은 소원들


캠핑장소가 줄을 지어 서있는 봉수대해변을 지나 삼포해변에서 일정을 마무리한다. 오늘은 이곳의 리조트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했다. 리조트 옆의 식당에서 아바이순대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지인과 이야기꽃을 피운다. 오늘 하루 바다를 보며 걸은 시간들은 우리의 기억에 퇴적되고 과거의 수많은 기억들과 함께 추억이라는 화석이 될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이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되었다.



20200216_171727.jpg 아바이순대와 밑반찬 만으로도 만찬이 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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