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코스 - 50코스 : 오륙도 - 통일전망대, 770km
해파랑길을 시작하는 오륙도 전망대에는 늘 햇빛이 가득하다. 우연인지 이곳을 갈 때마다 늘 날이 좋았다. 멍이 든 바다와 하늘, 곰솔의 잎마저도 부드러워지는 태양 아래서 깎아지른 절벽의 좁은 길을 걸으며 개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꽤 감성 있는 개미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감탄하며 가다 쉬다 했다. 가끔씩 해파랑을 걷는 이들을 만나면 긴 여정의 끝에 들떠 있는 무용담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 대단한 이들이었다.
울산의 대왕암공원을 걸어 나올 때 해가 졌다. 어둠 내리는 거리에서 다들 집으로 돌아가거나 친근한 이들과 저녁을 먹었다. 혼자 길을 걷는 나는 저녁이면 어디에 잠자리를 잡을까, 무엇을 먹을까로 마음이 분주했다. 2인분을 먹어야 하는 식단이 눈에 띌 때면 국밥집을 찾아 어슬렁 거려야 했다. 대왕암에 가득한 털머위나 태화강의 대나무 숲에 감탄하다 밤이면 꼬질거려야 하는 것 같아 처량했다. 그래도 따스한 국물이 있는 집을 만나면 순간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침을 일찍 먹을 수 있는 날은 행운을 만난 듯했다. 고상함을 부릴 이유도 상황도 되지 않는 곳에서 나는 먹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지 깨달았다. 비싼 음식보다 손길이 느껴지는 음식이 더 고급스러운 한 끼이다.
구룡포까지도 맑았던 날이 호미곶에서부터 궂은 날씨로 변했다. 내내 비를 맞아야 했고, 형산강을 건너 송정해변에 이르렀을 때에는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우산을 쓰고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칠포리를 걸을 때 우지끈 부러진 장우산을 포함해 여러 개의 우산을 새로 사야 했다. 한겨울에 그렇게 비에 흠뻑 젖어 걷는 모습은 궁상스러웠을 것이다. 차를 멈추고 태워주겠다고 한 분들께 다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누가 뭐라 해도 그렇게 걸어본 사람은 그 느낌을 안다.
떠오르는 길 - 소나무 가지 끝 솔잎은 바다를 향하고
울진에서 삼척으로 넘어갈 때 진눈깨비가 발목을 잡더니, 호산에서 맞이한 아침은 은빛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햇볕에 녹아 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툭툭이 아닌 차르르 쏟아지는 눈들은 검은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며 삼단 같은 머리칼을 떠올리게 한다. 해신당공원을 찾기 전 마을에서 모시는 서낭당을 올라 신남항을 내려다본다. 바다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수많은 여성들의 한이, 바다에 씻겨가다 남은 한들이 신남항 북쪽 바다의 바위들이 되었다.
동해 냉천공원에서 복수초 노란 꽃잎을 보며 부처님과 가섭의 염화시중(이심전심이라고 할까?) 미소가 떠올랐다. 때가 되니 꽃이 피고, 꽃이 피니 봄이 온다. 올여름 촛대바위 옆 산자락에서 날개를 다친 기러기 한 마리가 절뚝거리는 것을 보았다. 쟤도 좀 몸이 나아서 다시 북쪽으로 날아갈 수 있기를 촛대바위와 옆 서낭당에 빌었는데 어찌 잘 갔을까? 사람이건 동물이건 아프면 보는 마음이 심란하다. 길 위에서 이런 일들이야 흔한 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마주하는 생명들은 건강하길 다시 빌어본다.
바다 부채 길을 지나 모래시계 공원에서 플랫폼에 있는 소나무를 멀찍이 바라본다. 나무는 늙을수록 고고해지는데 사람은 늙으면서 주책만 느는 것 같다. 나무처럼 늙어서도 자랄 수 있다면 좋겠다. 이 길을 얼마나 더 걸으면 내 키에 손가락 한마디만큼이라도 자랄까. 강릉은 송정해변, 경포해변, 순포해변, 사천해변으로 이어지는 곰솔숲과 바다가 마주하는 곳이다. 경포호 옆의 가시연 습지가 생태관광지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경포호를 돌아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조금씩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곳들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아직 생태관광보다는 개발 관광이 더 많은 현실이지만 조금씩 세상은 나아질 것이다. 그걸 다 보려면 오래 살아야 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문진해변에서 고성의 통일전망대 출입국 신고소까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반대의 방향을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해파랑길을 처음 걸을 때부터 선택한 이 방법이 나에겐 맞는다. 코스의 기록도 49코스-41코스까지 역순으로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50코스를 정리하였다. 혼자 길을 걷는 장점이라고 할까.
강릉과 속초 사이에 위치한 양양은 한동안 두 도시의 발전에 눌리는 듯한 인상을 주더니 서울에서 양양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된 이후에는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해양스포츠의 성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양양의 변화는 남대천의 변화를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아바이마을을 걷다 '홍게간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다고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먹고 싶을 땐 가능한 먹어야 한다. 약간 짭짤하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홍게간장은 과식을 불러온다. 늘 하는 이야기긴 하지만 '맛있게 먹으면 살로 안 간다.' 그런데 자꾸 배가 딴딴해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걸을 땐 제때 식당을 만나기 어렵기에 다른 때보다 더 먹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나는 아직 덜 성숙한 걷기 여행자인가보다.
화진포 솔밭에서 이 시스터즈의 노래를 듣는다. 지나간 것은 색이 바래면서 흑백사진 같은 추억이 되고 가끔 소환하는 기억은 삶의 충전재가 된다. 고성의 바다들도 꽤나 거칠다. 걷기의 최대 즐거움은 자연의 생생한 모습을 만나는 것이다. 고성의 바닷가를 걸으며 풀썩거리며 넘어오는 날것들을 두 눈으로 주워 먹는다.
해파랑길은 동해를 보며 걷는 길이다. 특히 겨울의 동해는 거친 파도와 적막한 해변이 길을 지배한다. 자연이 우점하는 길을 걷고 싶어 겨울이 오면 해파랑길을 찾는다. 날이 좋은 봄. 가을의 해파랑길도 참 걷기 좋다. 땀에 젖어 길을 걷다 푸른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여름도 그 재미가 남다르다. 어느 때고 누구에게고 해파랑은 제 모습을 가림없이 보여준다. 그곳에서 내가 좋은 계절을 선택해 나만의 방식으로 해파랑길을 걸어 보시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느끼는 것은 다르다. 걸어본 자만이 길 본연의 모습을 느낄 수 있고 그 다음에야 길에 대한 앎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