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동해의 속살에선 단맛이 우러난다

1코스 - 50코스 : 오륙도 - 통일전망대, 770km

by 물냉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이 불변의 진리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부산에서 시작한 첫 걸음은 통일전망대에서 천천히 되새겨보는 걸음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떤 일이건 끝에 다다르면 안도와 아쉬움을 함께 느낀다. 하나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무언가 크게 변했을 것 같은 일상도 금방 익숙해질 뿐이다. 갑자기 무언가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안쪽 어딘가에서부터 조금씩 배어 나오는 해파랑의 기억들이 세상을 견딜만한 것으로 바꾸어 준다. 철이 들면서 아주 나쁘거나 아주 좋다는 건 한쪽으로 편향된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절대가 없는 세상에서 지칠 때 해파랑의 기억들은 위로와 힘을 주었다.


이기대 해안을 걸으며 언제 마치나 싶었던 길이 20여 일 만에 마무리되고, 한 코스씩 짧게 정리해 가던 일도 봄을 지나 여름, 가을을 맞으며 끝을 보았다. 정리하는 속도가 늦다 보니 겨울에 걸은 길을 한여름에 쓰느라 가능한 겨울색을 빼야 했다. 연재하듯 올린 글이다 보니 누군가 읽는다는 생각에 눈치를 보게 되었다. 서낭당 이야기는 답사기 같다는 말에 그 수를 줄이게 되고, 혼자 걷는 감회도 지역 소개에 묻혀 버린 곳들이 있다. 누더기 같은 글들이 성에 안차 다시 쓸까 생각하다 누더기도 잘 보면 누비가 된다는 논리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넘어갔다. 어디서 배운 건지 퇴고하지 않은 거친 글이 읽기는 불편해도 감정이 살아 있는 글이라는 돼먹지 않은 생각으로 잠시 글을 격자 안에 넣는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글로 띄엄띄엄 읽힌다면 좋겠다.

20200101_101335_1코스.jpg 해파랑길 1코스 안내판 사람들은 이곳에서 해파랑길의 첫 구간을 가늠해 본다.
20200218_130304.jpg 솔숲길 입구에 해파랑 길을 알려주는 안내표식

20200214_110714.jpg 담에 붙여 놓은 해파랑길 안내표식, 누군가 차로 긁은 흔적이 남아 있다
20190428_121630_50코스.jpg 통일전망대 안의 해파랑길 50코스 안내판과 스탬프함


떠오르는 길- 추억은 절리처럼 차곡히 쌓인다


해파랑길을 시작하는 오륙도 전망대에는 늘 햇빛이 가득하다. 우연인지 이곳을 갈 때마다 늘 날이 좋았다. 멍이 든 바다와 하늘, 곰솔의 잎마저도 부드러워지는 태양 아래서 깎아지른 절벽의 좁은 길을 걸으며 개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꽤 감성 있는 개미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감탄하며 가다 쉬다 했다. 가끔씩 해파랑을 걷는 이들을 만나면 긴 여정의 끝에 들떠 있는 무용담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 대단한 이들이었다.


울산의 대왕암공원을 걸어 나올 때 해가 졌다. 어둠 내리는 거리에서 다들 집으로 돌아가거나 친근한 이들과 저녁을 먹었다. 혼자 길을 걷는 나는 저녁이면 어디에 잠자리를 잡을까, 무엇을 먹을까로 마음이 분주했다. 2인분을 먹어야 하는 식단이 눈에 띌 때면 국밥집을 찾아 어슬렁 거려야 했다. 대왕암에 가득한 털머위나 태화강의 대나무 숲에 감탄하다 밤이면 꼬질거려야 하는 것 같아 처량했다. 그래도 따스한 국물이 있는 집을 만나면 순간 마음이 푸근해졌다. 아침을 일찍 먹을 수 있는 날은 행운을 만난 듯했다. 고상함을 부릴 이유도 상황도 되지 않는 곳에서 나는 먹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사람을 기쁘게 하는지 깨달았다. 비싼 음식보다 손길이 느껴지는 음식이 더 고급스러운 한 끼이다.


20200101_100555_1코스.jpg 내가 기억하는 오륙도에는 언제나 햇빛이 가득했다.
20200112_173115_8코스.jpg 일산해수욕장 근처의 식당에서 먹은 제주식 국밥


경주 양남면의 하서천은 일 년이면 두 번 이상은 꼭 지나치는 곳인데 이곳에 있는 양남시장을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크지 않은 장이지만 오일장을 찾아 나온 동네 할머니들의 짐 속에서 삶의 한 면을 만난다. 이런 작은 삶들이 모이고 모여 주상절리보다 더 단단한 사람의 문화를 만들어 낸다. 경주 가곡리에서 만난 100살 되시는 할머니의 수줍어하는 얼굴에서 삶이 만들어 놓은 역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때문이리라.


구룡포까지도 맑았던 날이 호미곶에서부터 궂은 날씨로 변했다. 내내 비를 맞아야 했고, 형산강을 건너 송정해변에 이르렀을 때에는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우산을 쓰고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칠포리를 걸을 때 우지끈 부러진 장우산을 포함해 여러 개의 우산을 새로 사야 했다. 한겨울에 그렇게 비에 흠뻑 젖어 걷는 모습은 궁상스러웠을 것이다. 차를 멈추고 태워주겠다고 한 분들께 다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누가 뭐라 해도 그렇게 걸어본 사람은 그 느낌을 안다.

20200114_075525_양남시장.jpg 양남시장에 장이 서면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겨울의 동해 길 위에선 사람 보기가 쉽지 않다
20200127_090232_17코스.jpg 비 내리는 길을 걷는다. 겨울 해파랑은 우산을 좋아하지 않는지 우산살을 꺾거나 뒤집어 버린다.


영덕 오보리에서 만난 파도는 수양제의 대군처럼 밀려왔다. 파도가 높은 제방을 치고 넘실거렸지만 마을 사람들은 큰 변화가 없었다. 뭐 걱정한다고 파도가 가라앉는 것도 아니니까. 마을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서낭당은 용왕의 대노를 가라 앉혀주는 곳이었다. 한때는 뱃놈이라 한마을에서도 내려봤던 이들이 이제는 삶의 여유를 찾고, 윗마을에서도 부러워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매일 드나드는 파도가 똑같은 것 같아도, 다 다르다. 매일의 삶도 조금씩 변하다 나중에는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울진으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밤길이다. 어둠 속에서 미와 위로를 찾는 건 쉽지 않지만 이왕 가는 길이라면 여유를 갖고 천천히 주변을 주유해 볼 일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은 빛난다. 어두운 도로가에 앉아 쉬면 간혹 있는 가로등에 하얀 포말을 비추며 파도들이 일어선다.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애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쉬임 없이 일어서는 파도 위로 비가 떨어진다. 내 파도가 깊으면 내리는 비는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세상을 관조해 본다. 길을 걸으면서 넓은 여유가 생길 때도 있다.

20200128_094411_20코스.jpg 강구항을 떠나니 파도가 더 거칠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격정적으로 변하는 겨울바다다


20200130_182606_25코스.jpg 어둠은 또 다른 눈을 뜨게 해 준다. 눈을 뜨고 바다를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게 들린다.


떠오르는 길 - 소나무 가지 끝 솔잎은 바다를 향하고


울진에서 삼척으로 넘어갈 때 진눈깨비가 발목을 잡더니, 호산에서 맞이한 아침은 은빛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햇볕에 녹아 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툭툭이 아닌 차르르 쏟아지는 눈들은 검은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며 삼단 같은 머리칼을 떠올리게 한다. 해신당공원을 찾기 전 마을에서 모시는 서낭당을 올라 신남항을 내려다본다. 바다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수많은 여성들의 한이, 바다에 씻겨가다 남은 한들이 신남항 북쪽 바다의 바위들이 되었다.


동해 냉천공원에서 복수초 노란 꽃잎을 보며 부처님과 가섭의 염화시중(이심전심이라고 할까?) 미소가 떠올랐다. 때가 되니 꽃이 피고, 꽃이 피니 봄이 온다. 올여름 촛대바위 옆 산자락에서 날개를 다친 기러기 한 마리가 절뚝거리는 것을 보았다. 쟤도 좀 몸이 나아서 다시 북쪽으로 날아갈 수 있기를 촛대바위와 옆 서낭당에 빌었는데 어찌 잘 갔을까? 사람이건 동물이건 아프면 보는 마음이 심란하다. 길 위에서 이런 일들이야 흔한 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마주하는 생명들은 건강하길 다시 빌어본다.

20200209_080912_29코스.jpg 눈 쌓인 거리에 햇볕이 들기 시작한다. 자연의 급변하는 모습은 길을 걷는 내내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20200210_141946_33코스.jpg 눈 속의 복수초에게 묻는다. "춥니, 나도 춥다." 참 이서진이 울고 갈 일이다.


바다 부채 길을 지나 모래시계 공원에서 플랫폼에 있는 소나무를 멀찍이 바라본다. 나무는 늙을수록 고고해지는데 사람은 늙으면서 주책만 느는 것 같다. 나무처럼 늙어서도 자랄 수 있다면 좋겠다. 이 길을 얼마나 더 걸으면 내 키에 손가락 한마디만큼이라도 자랄까. 강릉은 송정해변, 경포해변, 순포해변, 사천해변으로 이어지는 곰솔숲과 바다가 마주하는 곳이다. 경포호 옆의 가시연 습지가 생태관광지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경포호를 돌아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조금씩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곳들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아직 생태관광보다는 개발 관광이 더 많은 현실이지만 조금씩 세상은 나아질 것이다. 그걸 다 보려면 오래 살아야 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문진해변에서 고성의 통일전망대 출입국 신고소까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반대의 방향을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해파랑길을 처음 걸을 때부터 선택한 이 방법이 나에겐 맞는다. 코스의 기록도 49코스-41코스까지 역순으로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50코스를 정리하였다. 혼자 길을 걷는 장점이라고 할까.

20200214_175220_36코스.jpg 북한의 잠수함을 전시해 놓은 강릉통일공원에는 간간히 사람들이 찾아 온다.
20200215_161839.jpg 사천해변의 솔숲을 걷는다. 물기 있는 숲은 발자국 소리마저 삼킨다
20200215_162013_40코스.jpg 바닷가의 솔숲은 검은 수피를 띠고 있다. 검푸른 바다, 검은 소나무 깜깜해진다.


강릉과 속초 사이에 위치한 양양은 한동안 두 도시의 발전에 눌리는 듯한 인상을 주더니 서울에서 양양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된 이후에는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해양스포츠의 성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양양의 변화는 남대천의 변화를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아바이마을을 걷다 '홍게간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다고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먹고 싶을 땐 가능한 먹어야 한다. 약간 짭짤하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홍게간장은 과식을 불러온다. 늘 하는 이야기긴 하지만 '맛있게 먹으면 살로 안 간다.' 그런데 자꾸 배가 딴딴해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걸을 땐 제때 식당을 만나기 어렵기에 다른 때보다 더 먹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나는 아직 덜 성숙한 걷기 여행자인가보다.

화진포 솔밭에서 이 시스터즈의 노래를 듣는다. 지나간 것은 색이 바래면서 흑백사진 같은 추억이 되고 가끔 소환하는 기억은 삶의 충전재가 된다. 고성의 바다들도 꽤나 거칠다. 걷기의 최대 즐거움은 자연의 생생한 모습을 만나는 것이다. 고성의 바닷가를 걸으며 풀썩거리며 넘어오는 날것들을 두 눈으로 주워 먹는다.


20210518_132122.jpg 속초 아바이 마을의 홍게간장
20200218_101537.jpg 양양 남대천 하구에서 설악을 바라본다. 언제나, 늘이라는 수식어가 떠오른다.


20200217_171928_44코스.jpg 바다에서 몽돌의 노래를 듣는다. 신기하게 이때는 배도 안고프다
20200217_144324_45코스.jpg 속초해변의 보트들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쉬고 있다
20200216_091634_49코스.jpg 화진포에 겨울비가 내린다. 언제 봄이 올까.


일상에서 꿈을 꾼다


해파랑길은 동해를 보며 걷는 길이다. 특히 겨울의 동해는 거친 파도와 적막한 해변이 길을 지배한다. 자연이 우점하는 길을 걷고 싶어 겨울이 오면 해파랑길을 찾는다. 날이 좋은 봄. 가을의 해파랑길도 참 걷기 좋다. 땀에 젖어 길을 걷다 푸른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여름도 그 재미가 남다르다. 어느 때고 누구에게고 해파랑은 제 모습을 가림없이 보여준다. 그곳에서 내가 좋은 계절을 선택해 나만의 방식으로 해파랑길을 걸어 보시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느끼는 것은 다르다. 걸어본 자만이 길 본연의 모습을 느낄 수 있고 그 다음에야 길에 대한 앎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해파랑을 걸은지도 벌써 한 해가 더 지났다. 물론 걷기가 끝난 후에도 여러 번 해파랑길을 걸었지만 내리 한꺼번에 걷는 것이 아니니 듬성듬성이 되고 만다. 한때 몽골의 초원을 돌아다녔었다. 그러다 초원으로 향하는 발길을 끊었을 때 잠의 한 귀퉁이에서 말똥 냄새가 나곤 했다. 그럴 때면 다시 초원이 그리웠지만 여러 이유로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해파랑길은 초원처럼 결심을 필요로 하지 않아 좋았다. 일상에서 생각이 나면 짐꾸림 없이도 떠날 수 있는 쉬운 접근성을 가지고 있다. 쉽게 간다고 해 자연이, 바다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벼운 건 절대 아니다.

주말이면 동해로 향하는 차량들이 줄을 선다. 동해를 찾는 이들은 낭만을 그리고 바다를 보며 쉬고 싶어한다. 낚시, 파도타기, 맛있는 음식먹기, 일출보기, 바다보며 멍때리기, 할 수 있는 것도 하고싶은것도 많은 동해이다. 그들 중에는 해파랑을 걷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동해를 만나 느릿느릿 걸으며 발바닥으로 해파랑을 즐겨 보시라고 권한다.

DSC00578.JPG 동해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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