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근처 버스 정류장, 애써 불안한 마음을 흐트러뜨리려고 아이들은 적당한 허세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똑같은 모습의 선물상자엔 아마 시험 잘 보라고 학교에서 후배들이 나누어준 초콜릿이나 찹쌀떡이 들어있을 것이었다.
이틀 후 수능을 앞둔 고 3.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선에 서 있는, 빛나지만 불안해 보이는 그들의 젊음에 나는 감탄하면서도 살짝 마음이 아렸다. 마음 아림은 그들이 견뎌온 10대의 시간, 그리고 이후에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이 땅에서의 그들의 미래가 문득 예견되어서였다.
“그래도 지금 저렇게 건강하게 성장한 건 축복이야.”
“그래도 미래엔 좋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아린 마음을 애써 집어넣으며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그들을 보다 보니 이제는 성인이 된 딸아이의 청소년기 모습이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된 아이의 방황과 일탈, 부모와의 갈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아이가 타고난 성향도 있고 다분히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훈육 일변도의 가정교육 등으로 인하여 아이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걷잡을 수 없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의 생활은 성적을 비롯하여 모든 게 엉망이었고 소위 학교 밖 친구들과의 교류가 일상인 나날이 지속되었다.
사춘기라서 그러려니 하면서 나는 애써 외면하려 했고 가끔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도했지만, 끝은 언제나 나의 지루한 잔소리와 아이의 침묵 또는 분노 폭발 등으로 이어졌다. 직장 일로 몸이 피곤하고 집에서는 아이의 문제로 피곤하고 나의 생활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학생부에서 상담 호출이 왔다. 학부모 입장에서 학교를 방문하는 일에는 늘 어떤 이유로든지 상당한 긴장감이 동반된다. 그것도 학생들의, 소위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의 사안을 다루는 곳이 학생부라는 선입견이 우리 세대에게 없지 않았으니 나의 불안과 긴장감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마주한 자리에서 학생부장이란 사람은 A4 크기의 두툼한 서류뭉치를 내놓았다.
“이게 무엇인가요?”
“아, 네. 그동안 OO가 쓴 반성문입니다.”
수십 장의 반성문 더미가 내 앞에 놓여졌다.
“그동안 여러 번 상담하고 반성문을 쓰게 하면서 지도했는데 정말 어렵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이 좀 더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이번 건은….”
하면서 새로 발생한 사건의 한복판에 우리 아이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눈앞이 캄캄해졌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의 일탈을 하나하나 마주하는 일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학교 정문을 나서는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이 왜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하는지, 아이가 정말 원망스러웠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 못 키웠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이에 대한 원망이 나에 대한 자책감으로 번지면서 고통은 두 배로 커지기 시작했다. 학교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그날도 아이는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밤늦게 들어왔다. 나에겐 더 이상 잔소리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며칠을 보낸 후 아이네 학교가 한 학기를 마치고 1학기 종업식을 하는 날 나는 작심하고 아이에게 1학기 기말 성적표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엉망일 성적을 들춰내며 아이를 다그치려고 마음을 다잡아 먹고 아이를 마주했다.
“아이, 짜증 나.”
하면서 아이는 마지못해 가방에서 1학기 기말 성적표를 던져주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다. 성적은 예상했던 대로 엉망이었고 무단 지각과 조퇴 횟수는 아이의 불성실한 학교생활을 증거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과 손이 마구 떨리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낯선 문장 서너 줄이 눈에 들어왔다. 담임교사가 학부모에게 보내는 가정통신란에 쓴 글이었다.
“OO 어머님, OO가 지금 사춘기라는 터널을 힘겹게 지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터널이 어두워 힘이 많이 드나 봅니다. OO가 분명히 그 터널을 잘 지나서 빠져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어머님도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망치로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눈물.
한동안 나는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정말 하염없이 울었다.
아아, 선생님은 우리 아이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구나.
아이가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한참 울음을 쏟아내고 나니 숨을 쉴 수 없을 듯이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세상을 훨씬 더 많이 산 내가 못 하는 생각을 나보다 어린 우리 아이 담임선생님은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저녁때 들어온 아이의 모습이 그렇게 초췌해 보일 수가 없었다.
짜증을 내면서 나갔지만, 엄마 눈치를 그래도 보며 들어오는 아이가 갑자기 측은해 보였다.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 외로워서, 엄마가 따뜻하게 바라봐주지 않아서, 안아주지 않아서
아이는 언제부턴가 밖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이에게 밥을 차려주고 가만히 바라보았다.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밥 먹는 아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그냥. 배고프지? 많이 먹어”
그 후 아이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말투가, 건네는 손길이 달라졌다.
자연스레 아이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힘든 사춘기 터널을 지난 아이는 고등학교 진학 후 정말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헛되이 보낸 시간을 메꾸기라도 하려는 듯 아이는 자신의 인생을 다듬어가는 데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부었다. 매일 달라지고 성장하는 모습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뒤에서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부모의 시선만큼 커다란 힘이 또 어디 있을까?
다그치지 말고 조급해하지도 말고, 말이다.
아이를 키우며 부모도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 기쁨은 정말 크다.
나는 지금도 그때 아이 담임선생님의 가정통신란 메시지를 기억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사춘기 터널, 학업의 터널, 관계의 터널, 그 수많은 터널을 힘들게 건너왔을, 건너고 있을 많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고생했다고, 고생한다고 말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