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을 다녀왔다. 구체적으로는 시댁 식구들과의 여행이었다.
시어머니 여든아홉 번째 생신을 축하하는 여행. 시누 부부 세 쌍, 시어머니, 시어머니의 여동생들인 시이모 두 분이 동행했다. 여행은 여행인데 80이 넘은 시댁 어른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며느리인 나로서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은 여행이었다.
목적지는 거제도와 통영. 부산 옆의 가덕도와 거제도를 잇는 거가대교를 지나 거제도에 숙소를 정하고 2박을 했다. 거제도와 통영에서 가볼 만한 곳을 두루두루 가보고 맛집도 가고 사진도 찍고 대부분의 여행객이 하는 것들을 했다.
마지막 날 들린 곳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였다.
포로수용소, 사실 거제도의 포로수용소는 중고교 시절 교과서에서 한두 번 들었던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이름이요 장소였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그냥 글로 책으로 보고 알고 있는 전후 세대인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수용소 전시관 내부는 그 당시 목숨 걸고 참가했던 종군 기자들의 생생한 사진과 영상, 그 사진과 영상을 기초로 수용소 내에서의 전쟁 포로들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모형들로 꾸며져 있었다. 차례대로 둘러보다가 인명피해 현황판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6.25 전쟁 당시의 인명피해 통계는 자주 봤지만 새삼 숫자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국군, 유엔군, 북한군의 사망자 수와 그 외 부상과 실종자 수를 더하면 가히 천문학적인 수였다. 민간인 사망자와 부상자, 실종자 수를 더하면 한국전쟁은 한반도 인구의 20%를 죽였다는 통계를 보았던 게 기억났다.
인해전술을 쓰면서 전쟁에 개입한 중국군으로 인하여 북진하고 있었던 미 해병대와 중공군 사이의 장진호 전투는 유명하다. 혹한 속 110km를 걸어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미 해병대 1사단과 중공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그 전투로 인하여, 그들이 죽음으로 막아줌으로써 피란민 20만여 명을 흥남항에서 무사히 철수시킨 일을 표현한 모형 구조물 앞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실제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저런 일이 벌어졌었단 말인가?
유엔군 사망자 수에 눈길이 머물렀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역만리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 와서 영영 스러진 수많은 젊음들.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을 그들. 아직 제대로 삶을 살아보지도 못했던 먼 나라의 청춘들은 어찌할 것인가? 무엇으로도 되돌려 놓을 수 없는 그 수많은 죽음. 그들은 그렇게 죽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마디 인사도 못 나누고 영원한 이별을 한 것이다. 어떠한 것으로도 보상 안 되는 죽음이다.
거대한 뜻을 품고 대의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우리는 영웅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명령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상황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앞으로 전진하다 그냥 총에 맞아 죽고 추위에 얼어 죽고 배고파서 죽은 죽음은 무엇이라 이름 붙일 것인가?
장진호 전투에서만 사상자 수가 유예군 1만 7천 명, 중공군은 4만 8천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사격을 피하기 위해 눈 위에 엎드린 중공군 1개 중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 죽었다고 한다. 그들 중엔 나이 어린 소년병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들은 적군이니 괜찮은 것인가?
역사는 오직 숫자로 전쟁에서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다. 각 죽음의 개별성은 어디에도 없다. 떨어져 바닥에 쓸리는 수많은 낙엽 중의 한 조각처럼 스러진 죽음들. 억울하다고, 외롭다고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다. 고귀한 죽음이다. 자유를 지켜낸 위대한 희생이다. 한없이 고맙다. 살아있는 우리 모두는 빚을 졌다. 그들의 희생을 오래도록 기억하자. 잊지 말자….
아, 이 모든 말은 살아있는 우리의 부채감을, 빚진 마음을 가벼이 하기 위한 말이지 않을까? 의미 부여는 우리가 했다.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만이 살아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중학교 때 한국전쟁의 역사를 배우며 처음 들었던 인해전술이라는 말이 그렇게 소름 끼치는 말일 줄은 나중에 알았다. 압도적인 인원을 한 곳에 쏟아부어 상대를 압도하는 전술. 이 전술에서 사람은 없다. 사람의 몸은 그냥 총알받이면 그 쓸모를 다하는 것이기에.
전쟁의 역사 속의 수많은 병법과 전술은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들이다. 역사는 전쟁에서 승자와 패자를 기억하고 사건이라 기록한다. 스러져간 수많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들은 기억하지도 기록하지도 않는다.
하나하나 별처럼 빛나는 생명일진대 그냥 몇천 명, 몇만 명, 몇십만이 죽었다. 몰살시켰다. 대승을 거두었다고만 기록한다. 그 몇십만 명 속에서 한 생명의 무게는 너무도 가볍다. 가볍게 스러지고 잊힌다.
15. 16살의 어린 소년병들 사진 앞에서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서 발걸음을 띨 수가 없었다.
적이든 아군이든 하나뿐인 생명을 사지로 내모는 전쟁이라는 괴물. 그 전쟁을 만들어낸 소수의 욕망과 광기. 그 욕망을 정당화시키는 이념이라는 발명품.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폭력의 역사는 인류의 정체성에 대해 늘 고민하게 한다.
지구촌 곳곳에 가득한 증오의 아우성.
유보된 전쟁이 뿜어대는 불안과 긴장이라는 폭력이 가득한 한반도.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여기인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별생각 없이 출발했던 거제도 여행은 나에게 가슴 답답함을 한가득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