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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늘 Sep 21. 2023

우렁각시와 행운


“아! 나에게 우렁각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맨날 이렇게 힘들게 안 살아도 되게 뭐든지 척척 해주는 우렁각시 말이야.

하느님, 저에게 우렁각시 한 명만 보내주세요.”

저녁 늦게 귀가한 대학생 아들이 침대에 드러누우며 내뱉는 한 마디다. 공부도 취업도 연애도 모든 게 힘든 이 땅의 20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니? 헛소리 그만하고 씻고 밥이나 먹어.”

하나 마나 한 말을 던지며 밥상을 차렸지만 ‘우렁각시’란 단어가 한참이나 나의 뇌리에 남았다.      

내가 없는 사이에 몰래 나타나 한 상 거하게 차려놓고 사라지는 우렁각시. 그 우렁각시가 밥도 집도 옷도 차도 뭐든 뚝딱 내 앞에 가져다 놓는다면? 심지어 차려놓았다고 생색도 내지 않고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면? 이야기 속 우렁각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어릴 적 나는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었는지.      

우리에게 익숙한 ‘우렁각시’라는 옛이야기의 서사와는 상관없이 우렁각시는 그냥 ‘뜻하지 않은 행운’이라 부를 수 있을까? 행운, 그 뜻하지 않은 행운을 우리 모두는 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행운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행운’이란 무엇일까? 행운은 좋은 운수, 행복한 운수다. 그렇다면 나쁜 운수, 행복하지 않은 운수도 당연히 존재할 터이다.



행운 이전에 ‘운’, ‘운명’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영유아 살해사건 뉴스를 보며 한동안 많이 불편했다. 죽임을 당한 저 아기들의 운명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있다면 저들의 운명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잘생긴 외모에 큰 키에 재능까지 가지고 태어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경우는 또 어떤가? 반대로 누군가는 형편없는 외모에 나쁜 머리에 심지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니면 가난한 집에 폭력적인 아버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기도 한다. 내전이 일상인, 먹을 물도 없는 척박하고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사람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 두 삶 앞에서 나는 가끔, 아니 자주 무척 혼란스럽다. 나의 의지나 선택과는 전혀 상관없이 주어진 삶들이다. 그런 것을 운,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주팔자, 태어난 일과 시에 따라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운명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여 철학관으로 몰려간다.

아, 다행이다 내가 괜찮게 돈도 잘 벌고 잘 살 운이란다. 나는 운이 좋게 태어났단다. 안심이다. 나는 힘든 일을 많이 겪게 될 팔자란다. 휴, 불안하고 기운이 빠진다.

심지어는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일에서도 제왕이 될 운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을 무심히 하고 듣는 게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정해진 운명 앞에서 우리는 늘 을이다. 한없이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뭔가 좀, 편치 않다. 그래서 나는 가끔 헤아려 본다. 사람이 인간 부모로부터 태어날 확률을. 여자가 평생 만들어내는 난자의 수는 360-400개 고 남자는 일생 1조 4천억 개의 정자를 생성한다고 한다. 그 둘 난자와 정자의 수를 곱한 수 분의 1로 선택되어 태어난 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이라니 정말 어마어마한 확률이다. 그걸 뚫은 것이니 이건 단순한 출생이 아니라 위대한 탄생이다. 그 자체로 눈물 나게 소중한 존재인 게 분명하다. 이 사실은 모두에게 동일하고 평등하다. 다만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어떤 운명, 각자가 다른 운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 또한 온전히 부정하기 힘들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신이 준 운명이란 게 있다면 이제 어찌할 것인가? 왜 나는… 하고 아무리 울부짖어봐야 소용없다. 운명의 본질이란 게 이런 거라면 너무도 차갑고 냉정하다. 무를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그게 가벼운 괴나리봇짐일 수도 있고 무거운 쇳덩어리일 수도 있다. 어찌해야 할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보면 그에게만 허락된 것 같은 행운이 솔직히 부럽다. 그렇다고 나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면서 위안을 얻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는 그 경우도 불편하다.      

어깨 수술, 유방암, 장기 두어 개를 제거하는 여러 번의 수술과 치료를 받으며 나는 심한 우울감에 시달렸다. 사고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조카를 보며 하늘을 원망했다.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는, 평등하지 않은 이 세상 모든 삶들의 출발점이 불편하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삶 안의 많은 것들에 난 여전히 무력감을 느낀다.

어쩌란 말인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힘겹게 답을 찾아 헤매던 나는 ‘인정’이라는 단어 앞에서 멈추었다. 그렇다. 첫 시작은, 첫출발은 ‘인정’이다. 사회, 구조적 문제, 연대 등의 깃발을 내걸기 이전에 나 자신과의 불화를 해결해야 하기에... 굳이 깨달음이라고 포장하여 부르고 싶지 않다. 그냥 방법이 없을 뿐이다. 도리가 없지 않은가? 인정할 수밖에. 그렇게 시작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띌 수가 없다.      


누더기를 두르고 태어나도 이건 내 선택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책임이 아니야라고 외칠 수밖에. 똑같은 이유로 비단을 두르고 태어나도 우쭐댈 일이 아니다. 자신의 노고로, 수고로, 선택으로 얻은 것이 아니기에.      


시작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내게 주어진 운명이 이거라면 그냥 여기서 출발하면 돼. 기죽지 말고 씩씩하게 걸어가자. 그것만이 내가 온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운명을 향해 소리치며.

그래서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라’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며 바라보는 세상은 그 전과 좀 달랐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유복자로 태어나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왔지만 4남매를 대학 보내고, 시집 장가보내고, 건강하게 독립시키신 나의 엄마는 요즘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 비단옷이 허락되지 않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녀는 온전히 그녀의 힘으로 비단옷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여 시력을 잃은 조카는 하늘을 원망하는 대신 너무도 열심히 살아간다.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국어 교사가 되었다. 심지어 스타 강사라고 인정받기까지 한다. ‘무거워 보이지만 어차피 내가 지고 가야 할 짐이라면 지고 가보는 거지 뭐,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는 거야’라는 조카의 초긍정은 분명 그의 선택이고 그의 의지인 것이다.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봐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입양을 선택한 친구는 아이를 키우면서 말로 다  못할 어려움을 겪었다. 부적응과 학교 자퇴, 비행으로 점철된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를 보며 친구는 힘들어했지만 그 많은 순간들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와 함께했다. 그 아들이 며칠 전 “엄마 너무 감사해요. 저를 세상에 새로 태어나게 해 주셔서.” 하며 자신을 안아주더란다. 듣다가 내가 눈물을 쏟았다. 친구는 너무도 행복하다고 했다. 저 아이가 아니었다면 내가 무엇으로 이렇게 가슴 터질 듯이 행복하겠느냐고, 이런 아이를 나에게 허락해 준 신에게 감사한다고, 그녀는 그녀의 운명을 사랑한다고 했다.


행운, 우렁각시는 어디에선가 한 상 잘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설령 나에게 우렁각시가 와주지 않는다 하여 그리 우울해할 일도 아니다. 씩씩하게 걸어가다 보면 또 누가 알랴? 내 걸음걸이가 멋있어서 우렁각시가 저 멀리서 나타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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