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면서 '작가'라는 단어가 나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는 어렸을 때 포켓몬이나 디지몬 카드 혹은 좋아하는 만화의 한 장면을 보고 그린 것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트레이싱(원본을 아래에 깔고, 그 위 새 종이에 따라 그리는 기법)을 알지도 못하였을뿐더러 왼쪽에 그림을 두고 오른쪽에 A4용지를 둔 채 그저 재미있게 따라 그렸다. 지금 그 당시에 그렸던 다시 보면, 중학생 치고는 꽤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린 기억은 안 나지만 16년 전에 그린 그림.)
대학생 이후로 네이버 웹툰, 카카오 이모티콘 등이 점차적으로 사회에 스며들게 되면서 한 때는 그림을 그리는 취미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생각만 할 뿐 '그림은 전공자만 그릴 수 있는 거니까'라는 생각에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티콘을 직접 구매하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점만 찍혀있는 귀여운 이모티콘은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단순할수록 실력이 요구된다는 점을 이 당시에 알지는 못하였으나, 새로운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판단에 당근마켓에서 와콤 펜 태블릿을 구매하였다.
나는 완벽하려고 노력하나, 가끔 실수를 하는 편이다. 그림은 한 번 실수를 하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 나에게 '디지털드로잉'이라는 새로운 세계는 너무나도 완벽한 공간이었다. 잘못 그려도, 실패해도 지우거나 되돌려서 잘 될 때까지 그리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펜 태블릿을 구매한 당시에는 크게 생각하지 못하였으나 제대로 그림작업을 시작하면서 깨닫게 된 점이다. 아무튼 손으로는 펜을 잡고 시선은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는 신기한 자세로 그림을 끄적였다. '이모티콘 제작'이라는 목표를 가진 채 간단하게 그린 그림이지만 이때 뭔가 몸속에서 알 수 없는 설렘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과정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변명이지만 나는 한 가지 꽂힌 것에 대해 끈질기게 노력하는 편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찾아 탐구하는 것에 더 흥미를 가지는 편이다. 펜 태블릿으로 이것저것 그림을 끄적여봤으나, 그림판에 마우스로 그린 그림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연필로 직접 데생을 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던 점은 흥미 저하의 큰 요소였다. 디지털 일러스트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태블릿은 다시 중고 행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그림이라는 것은 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 도전의 연속
내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한 편으로는 안정을 추구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다. 언어치료사로 계속 활동하면서도 나만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전공특성상 대외활동을 할 기회가 없었고, 영어를 굳이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대로 지내다간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것 같았다. 본업 외에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할 수 있을까? 20대가 끝나기 전에 각종 알바, 미니어처 동호회 활동, 원데이클래스 수강 등 나름대로 내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 나섰다. '언어치료사로 평생 일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열심히 찾아보다 KT&G상상마당에서 진행하는 슈링클스 만들기, 여행드로잉 클래스를 수강하였다. 대학원생의 신분이었지만 처음으로 이런 소규모 클래스, 활동을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마냥 즐거웠다. 막상 강의에 참석해 보니 대다수가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딱 봐도 나이가 많아 보여서인지(?) 선생님께서 나를 클래스의 대표로 선정하였고, 클래스가 종료될 때까지 출석체크 등 잡무를 맡게 되었다. 귀찮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이마저도 웃으며 재밌게 활동할 수 있었다.
슈링클스와 여행드로잉에서 엄청난 두각을 나타내거나 '난 그림에 재능이 있구나!'라는 것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다른 클래스보다 좀 더 친숙하고 신선한 것이었으며, 마음 한 구석에 아직 그림에 대한 관심이 남아있었기에 이런 경험을 해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께서 수강생들에게 첨삭해 주시며 "잘하고 있어."라고 말해주시는 것 하나가 위로와 행복이 되었다.
(거의 대부분은 선생님의 터치로 완성되었다.)
그 외 다른 도전들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으나, 그림과 관련된 이 경험이 알게 모르게 '그림책'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 것 아닌가 싶다.
3) 인생의 전환점
내가 그림책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의도적인 계획이 아니었다.
고생 끝에 완성시킨 논문과 함께 대학원을 졸업한 2021년 2월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여전히 유행 중일 때였다. 대부분의 남자 언어치료사라면 대학병원 언어치료사로 근무하던가, 센터를 오픈하던가라는 목표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난 이런 목표가 딱히 없었다. 다만 적당하게, 안정적인 환경에서 언어치료로 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수입에도 타격을 받았던 내가 선택한 것은 복지관이었다. 복지관에서 근무를 한다면 준공무원처럼 호봉을 쌓아가며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역시나 세상은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명언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근무했던 복지관은 장점도 있었으나 상하관계가 지나치게 철저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나름 스스로 강철멘털이라고 여겼던 나였지만 이 시기만큼은 비관적인 생각과 힘듦을 느꼈다. 대다수의 직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려움을 겪겠으나, 그동안 기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프리랜서처럼 일했던 나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이대로 살다가는 삶을 톱니바퀴처럼 무미건조하게 살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퇴사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퇴사를 해도 결국 또 언어치료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들었던 내 가치관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였다. 사람마다 여기는 가치관은 다양하나, 나는 하나뿐인 인생에서 내가 능동적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해야 후회가 없다고 느꼈다.
그럼 어떤 것을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던 중, 불현듯 떠오르는 단어가 그림책작가였다. 그림책이라면 아이들이 주로 보는 책이기도 하고, 내가 가진 생각과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언어치료가 아니라 다른 어떤 무언가를 떠올린 직후 내 가슴은 빠르기 뛰기 시작했다. 마침 블로그 포스팅을 하면서도 글에서 동화작가의 느낌이 난다는 피드백도 들었던 터라, 이때부터 스스로 그림책작가가 되어야겠다 다짐했다.
'이 세상에서 안 좋은 경험은 없다.' 내가 전 기관에서 근무를 하지 않았다면 그림책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힘들었던 경험이 나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