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작가를 처음으로 꿈꾸었던 그날 이후로 서점을 자주 들락날락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던 자기만의 그림책 스타일을 찾기 위해서도 있지만 주로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이 어떤 것인지, 어떤 그림책이 매대에 올려져 있는지, 그림책 출판사는 어디가 있는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자주 방문한 곳은 교보문고와 알라딘 중고서점. 한 때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독서왕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책과는 거리 두기를 한 나에게 서점은 낯설기만 한 공간이었다.
'그림책의 바다에 빠진 기분'
'그림책의 바다에 에 빠진 기분'. 서점 속 그림책코너에 가자마자 머릿속에 팍 하고 떠오른 생각이다. 직업특성상 아이들을 만나기 때문에 유명한 그림책(알사탕, 100층짜리 집 등..)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그림책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그림책 또한 각자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백희나 작가, 이수지 작가, 이지은 작가 등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의 작가분들의 작품들은 베스트셀러 코너에 당당히 진열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이들과 견주어도 될 정도의 그림책을 만들어야겠다'라고 다짐한 것도 잠시, 그림책을 펼쳐보자 정말 상상 이상의 퀄리티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주눅 들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림책에 대해 알게 되고 제대로 작업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이미 기가 눌린 것이다. 그림책 맨 앞이나 뒷장을 보면 작가 소개가 나온다. 그들의 이력을 찾아보니 대다수가 회화, 디자인, 서양화 등 미술과 창의성이 요구되는 공부를 하였다.
매대뿐만 아니라 책장에도 다양한 그림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발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난관에 봉착했다. 내가 이 작가들과 비교하여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 온전한 그림책을 만들 수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평소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건 객관적으로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애꿎은 그림책코너를 계속 배회하다가 내 가치관을 믿기로 했다. "그래, 실천이라도 해보자"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당장 피자를 봐도 어떤 사람은 얇은 씬피자를 선호하고, 어떤 사람은 두꺼운 팬피자를 선호한다. 이를 모두 수용하려 하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겠으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 것이다. 나도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내 감성과 가치관, 이야기를 좋아해 주는 독자를 조금이라도 만들자. 한 명의 독자라도 내 책을 좋아해 준다면 그 수가 점점 늘어날 것이다. 내가 가진 생각과 감성을 잘 전달하는 것에만 집중하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림책코너를 돌며 여러 출판사의 작품을 구경하고, 유명한 작가의 그림은 왜 유명한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다. 서점 속 그림책의 장점은 비닐포장의 비율이 타 책에 비해 적다는 점이었다. 서점 측에는 미안하지만 책장이나 매대에 올려진 그림책을 번갈아 찾아보며 내 그림체와 방향성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구도 노리코 작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사진을 찍고 휴대폰에 간단한 메모를 하며 작가의 작품, 특히 눈에 띄는 출판사 등을 적어나갔다.
서점 속 그림책코너 탐방은 나에게 좌절감을 주기도 하였던 반면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었다. 적어도 그림책이 세상 밖에 나오게 하려면 최소한의 상품가치는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성격상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거나 남을 따라 하는 것은 맞지 않았다. 나만의 그림체를 만들고 스스로의 퀄리티를 높여나가자. 그림책들을 보며 다짐을 한 순간이었다.
어느 날 무한도전 클립영상에서 노홍철의 자기 암시를 본 적이 있다. 어릴 때는 그저 웃겼던 장면이지만 나이가 들고 다시 본 이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 기회가 꿈만 같지 않니?" "네, 꿈만 같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겠지?" "그 기회를 잡을 거예요."
"티켓은 몇 장?" "한 장."
"그래, 그럼 그 티켓을 네가 잡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장면. 출처: 무한도전, 미디어스)
대사를 기억나는 대로 얼추 적어보았다. 혼잣말로 대화하는 노홍철의 모습을 보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발걸음을 떼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는다.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게 된다면, 그동안 내가 꿈꾸었던 모든 것들이 그저 꿈으로만 남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긍정적인 사고, 긍정의 힘이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의 많은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했다. 그림책이라는 단어가 내 삶에 스며든 순간, 내가 혼신을 다하여 작업에 몰입할 수 있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렇게 소소한 일상에 감사함을 느끼며 그림책 스토리를 구상하고 태블릿으로 클립스튜디오 프로그램을 독학으로 익혔다. 이 시기는 2021년 하반기가 끝나가는 시점이었기에, 미리 내년에 대한 준비를 해야 했다(참고로 난 지독할 정도로 계획형인 인간이다.) 공모전에 대해서도 알아보던 중 뜻밖에, 그러면서 절호의 기회가 갑작스레 찾아왔다.
바로 대기업인 LG유플러스에서 처음으로 신인작가를 대상으로 그림책 공모전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