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DARE IS TO DO.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축구클럽 토트넘 홋스퍼의 슬로건이다. 직역하면 '용감한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라는 뜻.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문구다. 이는 그림책 작가라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인생을 살며 찾아오는 몇 안 되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기회를 쟁취하는 건 결국 치열하게 고민하고 스스로 성장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신인 작가를 위한 그림책 공모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대략 2월 말~3월 초쯤이었다. 그 후 내 모든 초점은 자연스레 공모전 마감일인 5월 31일에 맞춰졌다. 작년부터 미리 그림책에 대해 연구하고, 스토리를 구상하고, 그림 프로그램과 태블릿 조작을 익혀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하나 직접 조작해 보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나 스스로 어느 정도 작품에 대한 감을 잡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공모전 제출일을 두세 달 앞두고 백지상태로 준비하였다면, 이래저래 방황하다가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동안은 여유롭게 그림책 창작을 준비하던 나에게 공모전이라는 타이머가 요란하게 내 마음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우선 퇴사하기 전까지는 본격적으로 그림책 스토리를 만들고 클립스튜디오 프로그램 속 소재 찾기, 그림책 사이즈, 페이지 수 등 다양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로 활용한 것은 유튜브와 네이버 블로그. 그림책 제작, 클립스튜디오 그림책 등을 키워드로 검색을 하니 많지는 않지만 나보다 먼저 그림책을 제작한 선배들의 자료를 볼 수 있었다.
마침 이 시기에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내 맘 쏙 모두의 그림책 전>이라는 큰 규모의 그림책 전시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또한 동기부여를 얻기 위해, 그리고 좋은 그림책의 공통점을 찾아내겠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시간을 내어 예술의 전당을 방문하였다. 내로라하는 우리나라 작가 10명의 작품은 과연 얼마나 대단할까?
(언젠가는 나도 그림책 전시회에 출품할 수 있겠지?)
다시 찾아온 무력감
그림책 전시회는 포스터부터 화려한 색감과 함께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홀릴 수 있을 법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 또한 동심으로 돌아간 것처럼 티켓과 팸플릿 인증사진을 찍는가 하면, 전시회 내내 감탄사를 연발하며 휴대폰의 카메라 버튼을 마구 눌렀다. 많은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서 건장한 남성 한 명이 평온한 오후 시간에 그림책에 몰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분명 그림책 전시회에 방문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과거 처음으로 느꼈던 무력감 혹은 무기력함이 다시 나에게 노크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좋은 스토리의 그림책을 나도 만들 수 있을까?
아니, 그림이라는 것을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
내가 그림책을 만든다 한들, 내 책이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을까?
전시회장을 돌아다니다가 혼자서 온갖 걱정고민이 들기 시작하며 무기력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기존의 구상하던 스토리는 눈과 관련된 소재였는데, 안녕달 작가의 <눈아이>에 비하면 처참할 수준이었다. 나름대로 몇 달 동안 혼자서 준비하던 과정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열 작품이 넘는 그림책의 원화와 스토리를 살펴보며 느낀 점은 개성이 뚜렷하고 다 읽은 후 여운이 남는다는 것이었다. 내 취향인 그림책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그림책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그림책은 각자의 색을 뽐내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이 정도는 되어야 그림책 전시회에 전시를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운명적인 만남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기존에 준비하던 그림책 스토리 외에 새로운 스토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스토리라는 것은 한순간 갑작스럽게 뿅! 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흥미진진한 스토리, 재미를 줄 수 있는 요소까지. 열심히 고민한 끝에 만족할만한 캐릭터나 스토리가 떠오르면 천만다행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떠오를 때까지 계속 구상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확히 후자에 속하였다.
난 평소에 귀여운 캐릭터나 대상을 좋아하는 편이다(남자치고는 꽤 많이 좋아한다). 내 성향을 고려하였을 때 그림책 속에 좀 더 쉽게 그리면서 귀여움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는 동물이라 생각했다. 사람을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가 큰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더욱이 사람은 동물에 비해 신체구조의 각도, 움직임에 따라 그림 초보가 그리기는 쉽지 않았다. 동물을 의인화하면 사람과 비슷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귀여움을 녹여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떤 동물을 소재로 그림책을 만들면 좋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소재를 찾아나기 시작했다. 그리려고 하는 동물을 찾고, 그 동물의 습성과 움직임을 보고, 동물을 활용할 수 있는 스토리를 고민한다면 내가 선호하는 그림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찾은 것은 넷플릭스. 동물과 관련된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큐멘터리라 하면 지루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동물의 움직임을 파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매체였다.
운명적인 만남이랄까? 여러 다큐멘터리 중에서 내 눈에 띄었던 동물은 다름 아닌 치타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엄마 치타 1마리와 아기 치타 4마리가 살아가는 나날들을 보여준 다큐멘터리는 나름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아기 치타가 점차 자라면서 엄마에게 사냥을 배우고, 치타로서 초원에서 어떻게 살아나가는지에 대한 성장스토리. 한 시간가량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치타는 저렇게 빠른데, 만약 빠르지 않은 치타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시작이 반이다
그림책 공모전을 위한 모든 준비는 다 끝났다. 치타라는 소재와 재미있는 상상을 떠올리게 되자 캐릭터 콘셉트와 스토리가 1~2주 만에 완성되었다. 막혔던 부분이 이제야 뚫리기 시작하자 이후의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주 간단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봤더니 내가 느끼기에 꽤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제대로 준비하면 좋았겠지만, 신인작가를 위한 그림책 공모전을 알게 된 후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작품 제출일까지 남은 시간은 약 50일.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필요한 모든 준비는 마쳤다.)
나름 계획을 세워 약 한 달 동안은 스케치를 하고 남은 3주 정도는 채색을 하는 계획을 구상했다. 철저한 계획형 인간의 모습은 이 순간 빛을 발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만큼은 정말 넘쳐났다. 그렇지만 더 이상 시간이 지체된다면 마감기한을 지킬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스토리를 수정하거나 미룰 수는 없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모든 장비를 무장한 채, 맨 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태블릿을 켜고 각 장면에 대한 스케치를 시작하였다.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먹어봐야 안다는 표현처럼 일단 그려보면서 그림책 창작 계획을 수정하기 시작했다.처음으로 작품을 그린다고 생각하니 첫 페이지를 구상하는 과정부터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와 배경을 그린다는 것은 여간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앞서 만들었던 스토리보드는 정말 스토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참고용이었을 뿐, 매 장면을 빠르게 떠올리고 의식의 흐름대로 그려나갔다. 이 정도면 래퍼가 프리스타일로 랩을 하는 것처럼 나도 그림책을 프리스타일로 그리는 수준이었다.
내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작업 과정을 그토록 고대했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전부터 꿈꿔왔던 순간들이었으며 내 꿈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이었다. 첫 페이지를 완성시킨 후 텍스트를 입력한 순간, 정말 그림책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내가 이걸 내 손으로 그렸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 페이지를 완성시킬 때마다 그림책 속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는 듯한 기분이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또 나의 주변에는 훌륭하고 포용적이며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림책 작업물을 만들 때마다 보여주고 피드백을 부탁하였을 때, 그들은 정말 많은 응원을 해주며 격려해 주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달까. 지금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누군가 내 작품에 대해 좋은 피드백과 함께 가능성을 알아봐 주기시작하자 작업의 속도가 더 붙기 시작하였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LG유플러스 아이들나라 그림책 공모전의 마지막 접수 날이 되었다. 접수 직전까지 스케치와 채색을 반복하고 pdf파일 변환, cmyk 설정 등 세부적인 과정을 거친 끝에 드디어 <빨리빨리 레스토랑의 비밀>이 완성되었다. 접수 마지막 날은 사람들이 몰린다고 하여 이른 오후에 드디어 작품을 제출하였다.
(접수가 잘 되었나 계속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지난 두 달 동안 미친듯이 작업을 하였다. 그림책 공모전에 제출한 후 남은 것은 내 작품의 pdf파일과 뿌듯함, 그리고 공허함. 처음으로 내가 그림책 작가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던 시간이기도 했다.
공모전을 준비하며 무조건 당선된다는 생각과 함께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간절함을 담았다. 말 그대로 혼신을 다하였다는 느낌이었다. 결과 발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우선 소진되었던 체력을 회복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