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품들과 슬픔에 대한 고찰
나는 책과 매우 가까운 사람은 아니어서, 한강 작가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영화 때문이었다. 2010년에 영화 <채식주의자>가 나왔고,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마음이 불쾌해졌었다. 예술적인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던 걸까라는 의문으로 가득 차 원작 소설을 찾아 읽었고, 한강 작가의 소설과 영화화된 작품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히려 한강 작가가 소설에 담고자 했던 그 비뚤어진 모습이 메타적으로 영화에 드러나는 느낌이랄까. 때로 한국인들이 너무나도 무디게 평범하다고 느끼는 폭력성이 더욱 선명히 떠올랐다.
2014-5년경 독서토론모임에서 <소년이 온다>를 읽게 되었다. 슬픔이 너무 커서 고통스러웠고 두렵기까지 한 참담한 기분이었지만, 그 마음이 차갑게 식은 것은 어떤 한 모임원이 소설 속의 감정과 사건이 너무 과장되게 표현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는 그러했다. 소설에 묘사된 것보다 그 사건은 실로 더 끔찍했을 테니, 그로 인한 서러움과 고통을 어찌할지 몰라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있고, 우리가 그 사건에 대해 “너무 매달리고 집착”해서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봉합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 사건을 겪고 난 직후라, 나에게는 더욱 확고해졌다. 타인의 슬픔이 타인의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 후로도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꾸준히 읽었다. 나는 한강 작가가 맨부커상을 수상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할 때 “소설계의 이소라”라고 표현했는데, 슬픔에 잠식되는 감정의 유약함과 표현의 결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고 나는 전혀 예술가가 아니지만서도 그 잠식되는 슬픔의 감정을 중시했기 때문에 한강 작가의 작품들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한강 작가에 대한 나의 추측 같은 이해는 확신의 형태로 명확해졌다. 타인의 슬픔은 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에 모두가 한강 작가의 대표작들을 읽는 동안 나는 <흰>을 다시 골라 집었다. 읽은 지 10년이 지난 작품들조차 또렷이 기억에 남았을 만큼 모든 작품이 강렬했는데 유독 <흰>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몇 장을 읽지 않고도 금세 눈시울을 붉히게 되었는데 나는 왜 처음 <흰>을 읽었을 때는 그러지 않았을까. 나는 예전보다 더 잘 우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더 연약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세계 안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단단해졌다. 그래서 안도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