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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트로피가 되어주길 바랐던 J 3 (마무리)

항상 남이 부러운 나르시시스트

by LUDENS


나는 J의 학대에 가까운 이상행동들을 나르시시즘으로 진단하고 난뒤,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의 역할을 자처했다. 그의 치료는 심리적인 지지와 깊은 신뢰를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고, 나를 통해 그는 왜곡되고 괴로운 내면에서 벗어나 좀 더 건강한 가치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찬 포부를 세웠다. 나는 그의 구원자가 되리라 생각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2016)>에서의 숙희가 그러했듯, 그의 인생을 망치러 온 그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오만함이라는 거울에 비친 그의 인생은 망쳐져야만 했다.


모래성처럼 위태롭게 쌓인 그의 인생은 나를 만나 처음으로 단단함과 밀도를 갖추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의 인생이 조금 더 단단해보였던 것은, 그가 중시하는 조건들을 그가 실제로 갖춰나갔기때문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는 동안에 나름 명망 있는 공기업의 정규직 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일을 너무 잘하는 사람"이었기때문에 그에게 팀장이라는 감투도 씌어졌다. 옥탑방과 반지하를 전전하던 그는 수많은 어려움 끝에 시작한 전세아파트 살이에 감격했다. 이후에 데이트를 할 때마다 자신의 월급 명세서를 세세히 분석해주며 자신의 미래를 설명했다. 코인을 비롯한 투자 및 재테크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고, 주변 아파트 시세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중산층 "정상"가정을 이루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차근 차근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오직 목표는 말그대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일이었다. 사실상, 그는 매일 매일을 남부럽게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보다 네 살 어렸다. 그래서 더 빨리 결혼을 해야한다고 했다. 내가 출산을 하려면 나이를 고려해야한다는 말도 했다.그는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라는 가족 형태를 원하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했다. 연애가 막바지에 다다를 쯤에 그는 나를 궁지로 내몰았다. 그는 자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항상 남들앞에서 고백했고, 공공연히 나에게 키스하거나 민감한 신체 부위를 주무르기도했다. 남들의 눈에 내가 그에게 예속된 존재처럼 보이길 바라는 심리에서였다. 둘이 있을 때는 울거나 욕설을 하며 위협하기도 했다. 내가 초조하고 불안하길 바라면서 연락을 차단했다가, 겨우 연락이 닿으면 횡설수설하며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고 변명했다. 언젠가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을 믿고 깊은 물속에 그물을 던지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출산을 은유했다. 나는 그가 사이비 교주가 되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나를 사랑할수록 더욱 괴로워했다. 그동안 다른 연애에서 써왔던 모든 전략들을 동원했지만,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도 내가 바보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가치관 속에서, 여자로서 훌륭한 직업을 가진 아내라도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마침내 나에게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는 "희생적인" 결심을 통보하였다. 나는 참고 참아온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그와 진정으로 이별을 결심했다. 그와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하는 말들의 대부분은 내가 싫어하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기도 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그에게 가지는 묘한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거의 대부분 뻔뻔했고, 때로는 치가 떨리도록 나를 화나게 만들었지만 유독 마음이 쓰이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애교살 아래 점이 찍힌 큰 눈으로 서럽게 너무 자주 울었다. 나는 그런 그를 꼭 안아주며 그를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의 슬픔은 눈망울과는 상반되는 피상적이고 얕은 내용이었기에 그 괴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그는 남들의 아픔에는 태연하고 의아하리만큼 냉담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괴로운 사람은 늘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을 가장 연민했고 나는 그런 그를 연민했다.


J가 딩크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뒤에 나는 그를 떠났다. 정말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까봐 두려웠기때문이다. 그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나는 외로웠고, 나 자신을 덜 사랑하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와 이별하고 난 뒤 나는 많이 힘들었다. 그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저온화상을 입은 것처럼 회복되지 않는 마음과 자존감이 몇 달간 나를 울게 만들었다. 몇 년을 J와 지내며 나는 그의 트로피가 되었고, 결국 나는 사라졌다. 나를 되찾는 시늉을 하기까지도 몇 달이 걸렸다. 경고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그렇게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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