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과정
최근 몇달간 나를 분노하게 만든 남자들에 대한 회고록을 쓰고 나니, 이제 이 연재를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그들이 그렇게 나쁜 남자들이 아니었다느니, 진정으로 나를 사랑했다드니 하는 미화는 없다. 다만 시간이 흘러 분노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내가 연재 중에 Y를 가장 많이 언급한 이유는, 그가 실제로 내가 만난 가장 최악의 남자이기도 하지만, 그가 비교적 최근에 만났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Y를 향한 분노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프롤로그에 적었던 대로 나는 나의 과거 경험들에 대한 때늦은 분노와 깨달음을 정리하고,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더욱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이 연재를 시작했다. 뒷북이지만, 그래도 맘껏 세게 울린 뒤에야 비로소 올바른 박자로 삶을 연주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연재의 과정에서 나는 점차 과거보다 현재가 더 중요해졌고, 올바른 박자로 돌아왔다. 애초에 나는 Y와의 이별 후, 후폭풍을 견디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Y가 아닌 모든 이들과의 이별후에도 글을 연재하지 않았을 뿐, 다른 방식으로 나를 돌보고 견디는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Y가 아닌 다른 이들을 굳이 꺼내 글로 쓸 필요가 없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내가 만난 남자들에 대한 기억과 그 기억에 따른 감정의 강도는 분명히 시간의 역순으로 짙었다. 연재를 할수록 장기 기억의 한 구석으로 밀어넣었던 세부적인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일을 반복해야했고, 그로 인해 분노와 같은 직관적이고 단순한 감정보다는, 나에 대한 서글픔과 나를 좀 더 아껴주지 못했던 후회, 자괴감 같은 겹겹이 쌓인 감정들이 나를 더 괴롭혔다. 어쩌면 회피일 수도 있지만, 열심히 꿰매고 소독해줬던 상처들을 다시 파헤쳐 난도질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랜 시간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나름의 치유를 하며 회복하고 있었는데도 그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는 나르시시스트라고 명명한 J처럼, 이미 여러번 Y에 대해 썼음에도, 회피형 애착 유형의 전형이라며 Y에 대해 낱낱히 분석한 글을 쓸 예정이었다. 또나에게 너무나도 큰 실연의 아픔을 준 첫 남자 T에 대해서도 연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잠시 임시 소독한 상처를 헤집지 않고 두고 싶어졌다. 어쩌면 미화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된 낭만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든 것 같다.
나는 이번주에 길을 걷다, 헤어진지 6개월만에 우연히 Y를 마주쳤고, 이틀 뒤에 영화 <중경삼림>을 다시 봤기때문이다.
[이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