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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더이상 분노하지 않는 법) 마지막

더 나은 사람이길 바랐던 마지막 꿈

by LUDENS

헤어진지 6개월이 지나 우연히 마주친 Y는 다른 여자와 걷고 있었다.

늘 그렇듯 회피하려는 태도로 어떻게든 빠르게 그 순간을 모면하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물론 동시에 나도 거북한 감정이 들어 잰걸음으로 지나쳤지만)


곧 그와 나의 상호간 지인들을 통해 그가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귄 지 이틀째 되는 사실을 여기저기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매번 지인들에게 나에게 잘해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이 역시 나는 진심으로 비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와 만나는 7개월동안 줄곧 실망하기만 했다.

처음엔 내가 멋대로 만들어낸 이미지와 그의 실체가 너무 달라서 실망했고, 이후에는 그가 스스로 내뱉은 약속의 말조차 그 스스로 지켜낸 것이 단 하나도 없어서 실망했다.

그의 행동 속에 의도된 유치하고 저급한 속 뜻은 투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결코 진정으로 나에게 미안해 하지 않는다. 미안했다면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을 기회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는 '자기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잘난 여자친구에게조차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 나쁜 남자'인 자신, '그럼에도 자신에게 헌신하는 여자친구', '그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척하는 치명적인' 자신을 전시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가 지인들에게 강조한 새로운 여자친구에 대한 정보는 그녀가 4살 "연하"라는 것이었다.

마치 그것을 건너 들을 내가 신경이나 쓸 정보인것처럼.


나는 지금 내가 그를 역겨워하는 것보다도, 실제로는 그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늘 그랬듯,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망스러운 사람이다.


Y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사귀어온 남자들에 대해서는, "이래서 좋다"하는 이유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냥 좋았다. 귀여웠고 난 그들에게 설렜다.

하지만 Y를 만나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유들을 준비했다.

책을 읽는 남자였으면, 어른스럽고 단단했으면, 외모도 그저 아이돌처럼 귀여운 게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듬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Y는 분명 그런 이미지였고, 나는 그를 좋아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공공연히 그를 좋아한다고 선포했다. 그런 마음이어야 나도 "진정으로" 성숙한 연애를 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런 그와 최악의 연애를 했다.

최악을 이미 겪었다고 생각해서 신중히 고르고 엄선한 남자가 최악의 남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의 진짜 모습을 모르고 그를 만났듯이, 나도 나의 진짜 감정을 억압하고 가짜 감정을 만들어냈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행동들은 낭만과 혼란이 가득하지만, 어쨌든 치유로 이어진다.

나는 "철 없는" 낭만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Y를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낭만 타령을 해야하는 사람이고, 해소하고 위로받아야 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Y는 많은 면에서 나에게 가장 부적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실제로 좋은 사람도 아니었고,

내가 추구해야겠다고 다짐해서 선별해낸 이미지의 실체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추구해야겠다고 다짐해서 선별해낸 이미지 자체가, 나에게는 부적합했다.


이제 나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더 이상 분노하지 않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확신할 수는 없다.

산산히 부서진 유리조각이 여기저기 박힌듯한 트라우마가 언제 어디서 불쑥 나를 아프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지난 연인들에 대한 회고록을 마무리하며, 나를 가엾이 보살필 나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이미 잘지내고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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