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보다도 비겁하고 유약한 사람에게
[시작하는 말]
나의 글에서 나의 불완전함을 느껴주길,
나의 문장들에서 나의 자기 검열과 불안함을 포착해 주길,
결국 너에게 쓰는 편지조차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헤아려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마음에 담아주길,
그런 내 편지의 수신인이 네가 되는 것에 대해 우쭐해 주길 바라며.
[하고 싶은 말]
너무나 납작해서 부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우리가 미성숙한 관계라고 여기고 있어.
모든 사람은 미성숙한 면모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인지하면서도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고 머무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 더군다나 모호함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라, 답에 가까워질 때까지 고민하고 생각해야만 해. 그럴 때까지는 자유롭지 않아.
우리는 비슷한 어휘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단어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 또, 거의 동일한 주량의 술로 취해서 늘 긴장하며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같은 타이밍에 함께 일탈하기도 수월해.
우리는 반대의 가정적 환경에서 자라 반대의 정서를 지녔어.
나는 무한한 지지 속에서 불안과 냉소를 키웠고, 너는 내가 다 알지 못할 고독함 속에서 자신감과 낙천성을 키웠다는 게 흥미로워.
무엇보다도 너와 내가 다른 점 중에 문제가 될 만한 것은, 나는 어떤 사람이든 내 경계 안으로 받아들이면 최선을 다해 신경 써서 대하는 사람이고, 너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거야.
I care too much, and you don't seem to care enough.
이번에는 너무 과해서 부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면에서 착취되기도 쉬운 사람이고 어떨 땐 기꺼이 착취되기도 해.
내가 너를 다 헤아리는 데는 한참이 걸리겠지만, 너를 이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친구든 연인이든 학생이든 그 누가 됐든, 누군가를 이해하면 애착이 형성되고 신경 써. 이 과정은 자동완성 기능 같기도 하고 불수의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너는 너무나 황당히 여기며 헛웃음을 터뜨릴 것 같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너는 나에게 학생 같다고 해야 하나.
대부분의 관계가 상호적이라면, 학생에게는 좀 더 일방적인 돌봄이 있고 절대적으로 수평적이지는 않다고 표현해야 할까.
내가 이해하는 너에게서 나는 묘한 외로움을 느껴. 남들에게는 결코 드러내지 않지만 너는 방황하고 있어.
그리고 그걸 이해할수록 나는 불편해. 내가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라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조언해야 할 것 같아. 네가 나와 대화하며 위안을 얻는다는 게 보통의 관계에서는 감사한 일이지만, 나는 너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너에게 솔직할 수 있지만 점점 더 솔직하지 못하게 됐어.
나는 사실 엄청 유약하고 어두운 면이 많은데, 너에게는 그런 모습을 온전히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야 하나.
나는 많이 사랑 받으며 살아왔고 누구에게나 애정이 흘러넘쳐서 듬뿍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면서도, 그런 면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안타깝게도 너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부분이야.
너를 어떤 것으로 규정하든 나의 인간관계에 밀어 넣기에 나는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너에게서 일관성과 신뢰를 기대할 수 없어.
내가 너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거나 닦달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투덜대지 않았고.
기대만으로도 상처받고 싶지 않다. I can't afford to get hurt.
[마무리하는 말]
나는 언젠가부터 이 관계가 흐지부지 끝나길 바랐어. 이제부터 그만하자고 선을 긋기에는 우스운 것 같아서.
우리의 모든 가능성은 닫혔어.
너는 나의 생각을 다 알고 있으면서 회피하고 있어. 그래서 넌 내가 마무리 인사를 하는 모든 형태의 메시지는 절대 읽지 않아.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은 네가 무엇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야.
내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은 네가 얼마큼 두려워하고 있고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 지야.
공교롭게도 내가 너의 위태로움을 알아차려 버려서, 나는 겁이 나. 그래서 더 들춰보지 않기를 결심했어.
애석하게도 너는 나의 아슬아슬함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 해. 내가 잘 숨긴 것일 수 있겠지. 그래서 나는 너와 아무것도 아닌 사이조차 유지하고 싶지 않아.
대책도 없이 가지 말라고 말하는 너에게 나는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건투를 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