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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선생 Oct 25. 2023

꿈과 책과 힘과 벽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이들을 위한 詩]

해가 뜨고 다시 지는 것에
연연하였던 나의 작은방
텅 빈 마음 노랠 불러봤자
누군가에겐 소음일 테니
꼭 다문 입 그 새로 삐져나온
보잘것없는 나의 한숨에
나 들으라고 내쉰 숨이 더냐
아버지 내게 물으시고
제 발 저려 난 답할 수 없었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갈 거야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날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무책임한 격언 따위에
저 바다를 호령하는 거야
어처구니없던 나의 어린 꿈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던 날
두드러기처럼 돋은 심술이
끝내 그 이름 더럽히고 말았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간대두

멈춰 선 남겨진
날 보면
어떤 맘이 들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잘도 버티는 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루는 더 어른이 될 테니
무덤덤한 그 눈빛을 기억해
어릴 적 본 그들의 눈을
우린 조금씩 닮아야 할 거야


-작사:  최정훈


잔나비 [전설] 2019


100세는 너무 많고 또한 길다. 10년을 깍아서 딱 90세까지 그것도 내 발로 걷고 내 손으로 밥을 지어먹다가 내 소중한 아이들과 안녕하고 싶다. 바람대로 90세까지 큰 병없이 산다치면 딱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 인생 1부를 끝내고 인생 2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던 중 문득 듣게 된 노래들이 잊고 있던 '시를 좋아하던 나'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때부터 동시를 썼고 중등 고등 내내 문예반을 하면서 시를 지었다. 시를 쓰면서 살고 싶었으나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되자 시따윈 다시 쓰지 않겠다며 스무살 이후는 시를 쓰지 않았다. 핑계다. 시인만 시를 쓰는 게 아닐텐데....제 재능을 탓하기 민망하여 그랬을터다. 젊다 못해 어렸던 나도 알았을 것이다. 고등학창 시절만해도 서점에 시 코너에 시집들이 가득했고 시인도 어렵게나마 직업으로서 먹고 살만하다는 증거들이 있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졸업할 즈음부터는 시 코너에 새로운 시집들이 보이지 않게 되더니 이후에 서점에는 시 코너가 따로 없게 되었다.


'요즘 누가 시를 읽을까. 시가 밥먹여 주나.'


계산은 잘 할 줄 몰라도 그래도 먹고 살 걱정은 해야했으니 시를 써서 먹고 살수는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직업이 뭘까 고민했다. 졸업 즈음 친구들은 임용고사를 준비한다고 서울 노량진으로 학원을 다니던 때였다. IMF이후라 나이든 교사들은 일찍이 퇴직을 시키고 젊은 교사들 임용을 한시적으로 많이 하던 때라 그 시절 예외로 취업이 잘 되었다.  


하지만 난 애초에 학교 교사가 될 생각이 없었던 채로 온 대학이었다. 오로지 집과 가깝고 국립대라 등록금이 싸고 취직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온 곳에 난 정을 붙이지 못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곳에 와 있다고 생각하여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삐딱하고 까칠한 철부지'였다.  임용고사도 보지 않을거면 대체 뭘 하거냐는 따가운 눈총을 받던 나는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화면 아래 자막으로 흐르던 광고를 보게 되었다.


'한국 방송 작가 교육원 수강생 모집'


바로 저거야!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직업이 바로 드라마 작가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이 그 자막의 흐름이 채 끝나기 전에 생겼다. 그리고 재차 광고 자막이 흐르자 난 이미 드라마 작가가 되어 있었다. 1분 전에 생긴 급조된 꿈에 지나친 확신을 가지 나머지 다음 날 나는 상경을 위한 자금 마련에 뛰어 들었다.


학원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중고등 아이들 대상으로 국어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사범대라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4학년때는 대학 수업이 별로 없어서 저녁에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12시까지 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겐 '그럴듯한 꿈'이 있었으니 괜찮았다. 1년을 꾸준히 일을 하자 몇개월 서울에서의 자금과 수강료가 마련되었다. 서울에 가서도 학원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거라 걱정되지 않았다. 가족들의 걱정어린 눈빛을 뒤로 하고 난 '그럴듯한 꿈'을 안고 상경을 했고 외로운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주1회 작가 교육원 수업을 하고 과제를 했다. 나머지 시간은 생계를 위해 학원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시험을 잘 볼까를 가르쳤다. 


먹고 사는 일을 우습게 본 젊다 못해 어렸던 나는 그때는 몰랐다. 나의 대부분의 시간은 글을 쓰는 시간이 아닌 학원에서 아이들 문제를 풀어주고 풀리는 일을 하는 것에 쓰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사실상 나의 꿈은 점점 멀어지고 먹고 사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쓰는 그저 그런 어른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젊다 못해 어렸던 내가 꿈을 위해 했던 그일이 이제는 젊다고만은 할 수 없는 지금 나의 천직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날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무책임한 격언 따위에 저 바다를 호령하는 거야. 어처구니없던 나의 어린 꿈.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던 날. 두드러기처럼 돋은 심술이 끝내 그 이름 더럽히고 말았네.


'그럴듯한 꿈'은 그렇게 뻔하게 끝나버리고 나는 대신 선생이 되었다. 이왕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할 거면 문제푸는 방법따위를 가르치는 건 하지 말자 결심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선생은 '자신이 깨달을 걸 가르치는 사람'이기에. 나 스스로를 선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가르치기로 했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고 글을 쓰는 일. 그로 인해 아이들이 성장하도록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걸 가르쳐도 아이들은 충분히 문제도  잘 풀고, 좋은 시험성적을 받는다는 경험적 데이터도 가지고 있으므로 적절히 한국 교육 현실과도 맞는 듯 해서 안심한다.


이상을 가르치지만 그 이상은 현실의 나침반이 되어야한다는 걸 그 사이에 깨달았다. 보기에만 멋있고 듣기만 달콤한 이상은 망상일 뿐이란 걸 아는 어른이 되었다. 어차피 우리는 하루 하루 1분 1초 현실을 사는 존재다.


참 무서운 밤인 걸.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루는 더 어른이 될 테니. 무덤덤한 그 눈빛을 기억해.  어릴 적 본 그들의 눈을 우린 조금씩 닮아야 할 거야.


그렇게 나는 어릴적 보았던 

밥벌이의 괴로움을 아는

마냥 젊지만은 않은 

그때의 어른들의 눈빛을 닮은 

그런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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