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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Dec 06. 2023

8편. 순례 신고식, 잊지 못할 응원단

[8편]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순례 첫날 드레스 코드


오전 10시. 급할 것 없다며 푹 쉬다 천천히 길을 나서라는 느긋한 숙소 주인장의 조언에 따라 느지막이 숙소를 떠났다. 현관을 나서며, 순례 첫날의 설렘을 눈에 담아 바라본 하늘의 화답은 잔뜩 낀 구름과 비였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래도 순례 첫날인데.

    잠시 하늘을 향해 찡긋 투정을 부려본다.    

  

하지만 나는 순례자. 비가 온다고 가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갑자기 비장한 마음이 밀려오자 서둘러 마음을 고쳐 먹어 본다. 힘겹게 맨 배낭을 다시 내려놓고 판초 우의와 스패츠(방수 커버)를 꺼냈다.

비 오는 날을 대비한 용품들을 준비해 왔지만,

이렇게 빨리 꺼내게 될 줄은 몰랐다.  

양말에 비가 스며들 못하 스패츠를

신발 위에 장착하고 배낭에도 방수커버를 씌웠다. 판초우의가 머리와 배낭을 잘 덮을 수 있게

친구와 서로의 매무새를 만져 줬다.  


마지막으로 스틱을 손에 끼우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서로를 바라보는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산이 아닌 우의를 걸치있는 모습이

낯선 탓도 있었지만,

머리까지 판초우의를 눌러쓴 모습이

개그콘서트의 ‘우비삼남매’ 같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비장함은 덜어지고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걸음 사이사이 순례 첫날을 기념할 사진을 남기며

 지트 주인장이 알려준 순례 시작 지점인

뚝방길 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분명히 책이나 블로그에 적혀 있던

친절한 조개모양과 길안내 화살표는 보이질 않는다. 숨바꼭질을 하기로 한 걸까? 여기가 맞나?

어째 시작이 불안불안하다.

비는 오고 시간은 가고. 안 되겠다.

구글맵에 St.Gilles를 치고 따라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참을 가도 어째

배낭 매고 걷는 사람이 우리 말고는 없다.

순례루트가 아니라 구글맵루트를

따라 걸어서 그런 걸까?

‘잘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구글맵의

화살표 움직임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한 발짝도 못 뗐을 거다.

문명에게 감사했다.


 조금은 특별한 첫 순례 친구 


도로 옆 인도를 따라 한 시간 넘게 걷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왼쪽은 논밭, 오른쪽은 가축장으로 에워싸인 길이다.

그런데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지고 천둥과 번개까지 가세했다. 이대로 전진은 무리였다.

 친구와 나는 잠시 나무 아래 몸을 피했다.

쪼그려 기다리는 동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러다 꼼짝없이 여기 갇혀버리는 건 아니겠지?

목표한 마을까지 갈 수 있긴 한 걸까?

맞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걸까?

하지만 되돌아가기에도 너무 늦었다.

심란한 마음이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만들어낼 즈음 다행히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또다시 폭우가 찾아오기 전에 서둘러 가야겠단 일념으로 질퍽해진 길 웅덩이를 피해 걸음을 재촉하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순례 첫 친구를 만났다.     


근데 많이 좀 특별하다.

말도 못 하고, 손은 없고 발만 있다.

 그래도 나보다 힘도 세고 달리기도 빠를 것 같다.

그 친구는 바로바로...‘황소와 말’

사람구경 하기가 힘든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 녀석들도 우리가 반가웠는지 갑자기 우릴 향해

스무 마리가 넘는 황소와 말들이 일제히 달려온다.

순간 움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애니메이션 속 장면도 아니고,

나보다 키 큰 동물들이 한꺼번에 날 향해 달려왔다. 사람이 아닌 동물의 질주를 두 팔 벌려 맞이하기에

나는 아직 초보 순례자였다.

그들도 내 맘을 알아챘는지

딱 울타리 앞에서 멈춰 선을 지켜준다.

그리고는 우람한 체구와는 딴판인

꿈뻑꿈뻑 순하디 순한 눈빛으로 마음을 전해왔다.

“시작을 축하해! 그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온 걸 환영해!”

그제야 나도 녀석들에게 긴장을 풀어 보인다.

“나도 만나서 반가워! 귀엽다, 너네.

집 구경 잘하고 가~”     


 부족함을 통해 보여주신 기적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날은 어두워지고,

빗줄기가 다시 점차 거세질 즈음 마을에 다다랐다. 순례자 숙소를 찾아가야 하는데

갈림길에서 직진을 해야 할지 좌회전을 해야 할지 몰라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애타는 한 남자의 외침이 들려온다.     

 

스따아아아압! 스따아아아아압!!
(Stop! Stop!!)

    

돌아보니 지나가던 한 차량 운전자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내가 혹시 듣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간절함이 깊이 배어 있던 절규에 가까운 외침.


‘지금 거기서 더 가면 위험해요. 그러니 직진하지 말고 좌회전을 해서 마을로 들어와 숙소를 찾으세요!’라는 메시지를 stop이란 한 단어응축해  듯했다.

고개를 들어 그 차량으로 몸을 돌리니

남자는 손가락으로 좌회전 방향을 가리키고는

유유히 사라진다. 고마웠다.


일면식도 없는 고마운 운전자 덕분에 방향을 잡고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선다.      


이번엔 중년을 훌쩍 넘은 한 아주머니셨다.

비가 들이치는 차창을 내리고 어디 가냐고 물으시기에 순례자 숙소를 찾고 있다고 하니 일단 빨리 타라 신다. 우리의 두리번거리는 움직임에서

빗 속에 헤매고 있는 어린양들의 모습을 보셨던 걸까? 비로 흠뻑 젖은 옷가지 때문에 차 시트가 다 젖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따위는 안중에 없으신 듯하다.

순례 숙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그곳에서 묵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럼 숙소 앞에 우릴 내려주시겠단다.

거기다 덧붙이신다.


혹시라도 순례객이 꽉 차서 거기서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집에서 재워줄 테니

전화를 하라고 번호까지 남기고 가신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 수 있단 말인가!

남프랑스 사람들은 다 이렇게 친절한가?

휴대폰에 아주머니의 번호를

 ‘생질(St. Gilles)에서 만난 천사’라는

이름으로 저장했다.

   (아직도 내 연락처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들어간 숙소는 다행히 우리를 받아줄 여유가 있었다. 짐을 풀고 종일 빗속을 걷느라 땀과 비로 젖은 몸을 씻고, 옷도 말리느라 아주머니께 연락드리는 걸 깜빡하고 있었는데 천사 아주머니는 걱정이 되셨는지 먼저 전화까지 주셨다. 나는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연신 드렸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오늘 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철저한 이방인에게 보답 없는 친절을 먼저 베풀어 주신 두 분을 만난 건 내게 기적과도 같았다.

그리고 기적을 불러일으킨 건

분명 나의 부족함과 약함이었다.

완벽하고 철저한 준비 속에 어려움 없이

숙소를 찾아갔더라면 오늘 같은

기적을 체험할 순 없었을 테니까.


보이지 않는 천사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꼭 잘하지 않아도, 인정받고 칭찬받지 않아도,

너무 최고가 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좀 어리숙하면 어때.

빈틈을 누군가에게 내어줘도 .

부족한 모습도 사랑스러워.

오히려 그런 모습들 속에서

따뜻한 사랑과 작은 기적이 시작되는 거야.



 무심해서가 아니란다  


천사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St.Gilles의 숙소까지

도착한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나니

아침에 무심한 하늘을 원망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정말 하늘은 무심했던 걸까?


오는 날 결혼을 하면 더 잘 산다는 말이 있다.

 옛부터 사람들은 '비'를 좋은 징조로 받아들였다.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작물을 잘 자라게 하는 비가

두 사람의 앞날에도 풍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담 순례 첫날 내게 비를 허락하심도

남은 길을 더 행복한 여정으로

이끌어주시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첫날 비의 무게를 잘 이겨냈기에 앞으로 닥쳐올 어려움도 지혜롭게 헤쳐나갈 힘이 길러졌을 것이다.

또한 비 오는 날 애쓰고 있는 순례객을

안쓰럽고 대견스런 마음으로 바라보 분들의

 무언의 응원과 에너지가 오롯이 순례객에게

전달되어 그 힘으로 더 힘차게 길을

걸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순례 첫날의 비는 더 이상 내게

 하늘의 무심함이 아닌 감사함이 되었다. 

비록 나는 부족함 투성이지만 그분께서

순례 내내 날 꼭 지켜주실 거라는 믿음과 함께.


Day 1. 4월 11일, 2018.

Arles - St. Gilles 22km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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