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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Jan 31. 2024

15편. 아침으로 그걸 다 먹는다고요?

[15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조안나와 마리엘라가 길을 나서는 시간은 보통 8시. 내겐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좋은 시간이었다. 우린 하루 평균 20km-30km 정도를 걸었다. 8시에 출발하면 목적지에 늦어도 오후 2~3시면 도착했다. 지나치는 길이 도심이나 마을이라면 점심을 식당에서 해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산길이라면 미리 점심을 준비해야 다.


하루는 묵었던 마을에 주말 장이 열린다기에

구경하고 가자고 마음이 모아졌다.

시장 구경 / 많이 발효된 프랑스 치즈 & 신선한 산지 농산물들

어디서나 시장구경은 참 재미나다.

볼거리도 많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정겨운 곳.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시장의 백미는 먹거리가 아닐까.

어린 시절 엄마가 시장을 가신다고 하면 따라나서는 이유도 거기 있었다. 시장 떡볶이나 찹쌀 꽈배기, 핫도그가 손에 쥐어지던 찰나의 행복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도 장터에서 점심에 먹을 치즈, 과일과 빵을 사기로 했다. 어떤 빵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조안나가 메뉴를 추천해 줬다.       

"이거 한 번 먹어봐요. 맛있어요. 키쉬(quiche)라는 먹을만해요. "


키슈는 달걀을 주재료로 한 페이스트리 크러스트에 달걀과 크림, 베이컨과 기호에 따른 야채들을 넣어 만든 프랑스의 타르트였다.


오전 걷기를 끝내고 인적 없는 산길에 식탁을 차렸다.

점심 먹는 동안 만이라도 발가락에 맺힌 땀을 식혀주기 위해 양말도 벗었다. 그래야 물집이 잡히지 않기도 하지만 인내하고 잘 걸어준 고마운 발에게 내어 주는 쉼의 시간이기도 했다.


아침에 장에서 산 키쉬를 한 입 베어 물어본다. 

음~ 기대 이상이었다.

부드럽게 씹히는 촉촉한 속재료와 고소한 크러스트의 조합이 일품이었다. 조안나가 추천할 만했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순례객에게 영양 면에서도 든든한 포만감을 안겨 주는 안성맞춤 메뉴였다. 한동안 키쉬가 있는 곳이라면 나의 원픽은 고민 없이 키쉬였다.     

장에서 산 키쉬(토마토와 아보카도 옆 맨 위)

점심을 먹으며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각 나라의 식문화로 이어졌다. 아까 장에서 산 프랑스 치즈의 맛이 그들 입맛엔 그냥 그런 모양이다. 사실 난 크래커에 브리 치즈를 얹어 먹는 걸 한국에서도 너무 좋아했기에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탈리아 친구들 입맛에 프랑스 치즈는 너무 발효를 많이 해서 흐물거린다나? 치즈는 이탈리아라며 대단한 치즈 부심을 드러냈다.

많이 발효된 프랑스 치즈 vs. 이탈리아 친구들 입맛. 단단한 치즈

난 프랑스와는 달리 한국에서 빵은 그냥 간식이라고 말해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친구들도 격하게 공감했다. 프랑스인들은 너무 소식좌라며. 이탈리아와 한국, 두 나라 모두 바다를 많이 끼고 있어서인지 음식에 있어서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았다.


한 번은 30대 한 프랑스 남자 순례객으로부터 한국에서는 주로 아침에 뭘 먹냐는 질문을 받았다. 지금은 간단한 샐러드와 통밀식빵에 달걀, 아보카도 등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있지만, 그땐 그냥 한식을 먹을 때였다. 생선, 김치, 두부, 나물 등등 다양한 반찬에 국과 밥을 아침으로 먹는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또 다른 프랑스 분에게 나의 식단을 전하며 말했다.


 친구 아침부터 그 많은 걸 먹는대. 


와! 순식 간에 난 먹보 대식가가 되어 있었다.

하긴 빵과 커피로 간단하게 때우는 소식가인

그들 입장에선 나의 아침이 참 거하다 싶었을 거다.

순례길에선 정말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만나기에 나와 다른 문화에 대한 얘기를 종종 접하게 된다.


"빠지직"

알을 깨고 병아리가 나오는 소리.

내 앎의 경계가 무너지는 그 순간이 난 참 좋았다.


내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 말이다.

그게 바로 순례길의 또 다른 숨은 매력이 아닐까 싶다.

앞서 걸어 뒷모습이 주로 찍히는 조안나
뒤에서 걸어와 앞모습이 주로 찍히는 마리엘라

조안나와 마리엘라와 함께 걸은 첫날, 저녁식사로 숙소에서 제공되는 순례자 식사를 사 먹기로 했다.

우리 셋의 식사가 긴 테이블의 식탁에 준비되었다.

따끈한 야채 스프와 함께 접시 위에 밥과 치킨 그리고 레몬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먹음직스러웠다.


그날 숙소에는 우리 말고도 몇 분의 순례객들이 더 있었다. 그중 50대쯤 되어 보이시는 유쾌한 한 프랑스 여자분을 저녁 식탁에서 만났다. 함께 온 일행이 아직 씻고 있어 기다리는 중이시란다. 그런데 배가 많이 고프시단다. 아직 그분들의 음식은 나오지 않은 상태.

어떻게 도움을 드릴까 고민하다

내 접시 위 레몬케이크를 가리키며 말씀드렸다.


"이거라도 먼저 드실래요?"

그랬더니 정중히 사양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건 디저트잖아요. 그건 마지막에 먹어야지요.”

아하!

프랑스 사람들에겐 음식의 순서(애피타이저-메인 디쉬-디저트)가 꽤 중요함을 알게 됐다.

그런데 얼핏 보니 조안나의 메뉴는 마리엘라와 내 것과 뭔가 달라 보였다. 알고 보니 조안나는 베지터리언(Vegetarian), 채식주의자였다.

좀 더 정확하게는 달걀이나 유제품은 먹고

육류만 먹지 않는 페스코 채식자(Pesco)였다.


하루는 소 가축장을 지나칠 때였다. 소들에게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는지 울타리 가까이로 가는 조안나.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어 곧장 곁으로 오는 순둥순둥한 소들을 향해 조안나는 농담을 건넸다.


"얘들아! 곧 잡아먹힐 텐데 너흰 그걸 알고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하고 오는 거니?"


역시 사람의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법!

타국에 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순례길에선 숙소에서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기에 한국 음식을 소개하고 싶어 야심 차게 준비해 온 게 있었다.


바로바로 소불고기 양념.


그것도 먼 길 오다가 흐르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밀폐가 잘 된 유리병에 담긴 걸로. 무거웠지만 한국의 요리를 선보여줄 설렘으잘 지고 왔는데 조안나가 채식주의자라니. 살짝 아쉬웠다. 하지만 무거운 배낭의 무게를 줄이고 싶어 뭘 버릴까 고민하던 차에 잘 됐다.


과감하게 유리 양념병을 꺼내 숙소 냉장고에 기부했다. 하지만 수혜자를 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한 무리의 독일 청년들이 느지막이 숙소에 도착해 저녁을 직접 해 먹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음식 냄새가 코 끝에 와닿았다. 불고기 양념 냄새였다. 낯선 땅에서 맡는 고국의 음식 냄새. 기분이 묘했다.


직접 해주지는 못했지만 독일 청년들의 저녁 식탁에서 들려오는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는 한국의 불고기 맛이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것이면 했다.


이제 차츰 예상을 뒤엎는 순례길 위 반전의 연속에

나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을 내일의 반전이 기대될 만큼.

동물을 사랑하는 조안나와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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