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아래 설 너에게 11.
삐그덕거릴 정도로 낡은 10층의 문이 열리자, 호국이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성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눈을 감고 방의 정중앙에 자릴 잡고 있었다.치렁치렁한 옷은 마치 수행자의 그것같았다.
한울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이 놈. 쿠로 키츠네인가?”
한울의 중얼거림을 들었던지, 노인은 눈을 바뜩 뜨고 벼락같이 소리쳤다.
“위대하신 쿠로 키츠네님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아라!”
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리아가 딸꾹질을 하자, 한울은 혀를 찼다. 그는 방의 정중앙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갔다. 익숙하게 부채를 꺼내서 노인의 머리를 톡, 내리치려는 순간.
노인은 빠르게 한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아귀에 얼마나 많은 힘이 서려있는지 손끝은 빨갛다 못해 하얗게 질려있었다. 우악스럽게 잡힌 손목의 방향을 틀어, 팔을 빼내려던 한울은, 눈썹을 치켜떴다. 노인이 손에 더욱 많은 힘을 주었던 것이다.
“뭐야, 이 노인네···.”
한울은 어깨가 저려오는 듯 미약하게 팔을 떨었다. 우둑, 한울의 손목에서 뼛소리까지 나고 있었다. 한울이 미간을 찌푸리고 낮게 신음을 내뱉자 노인은 치켜뜬 눈으로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손의 힘은 줄어들 지 않았다.
기어코,
기어코 한울의 손에서 부채가 떨어지자,
노인은 그 즉시 가부좌를 풀고, 자유로운 발 끝으로 한울의 부채를 멀리 걷어차 버렸다. 방의 구석으로 날아가 버린 부채를 줍기 위해 호국이 빠르게 달려갔다. 노인은 그제야 한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한울의 손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노인은 빠른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련 자세를 취했다. 노인의 펼친 손바닥에서 공기의 기류가 기묘하게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한울은 눈을 크게 떴다.
“헤에, 영감탱이. 꼴에 수행을 좀 한 모양인데···.”
손에서 기공이 느껴지는 노인이, 팔을 천천히 휘젓자 물결처럼 빈 허공에 파동이 일어났다. 한울이 공기의 일그러짐을 눈으로 확인한 그때, 바로 그 때였다.
노인은 재빠르게 주먹을 말아쥐고 한울의 어깨를 내리 찍었다.
한울은 어깨를 뒤로 제쳤다.
날쎄게 그의 주먹을 피했지만,
노인은 주저없이 팔을 안으로 접어, 팔꿈치로 한울의 광대를 가격했다.
한울은 즉시 머리를 뒤로 재껴 그의 팔꿈치가 얼굴에 닿지 않게 했다.
얼굴을 세게 얻어맞을 뻔 한 한울은,
발로 노인의 무릎을 걷어찼다.
노인은 자세가 조금 흔들렸을 뿐.
권법이라도 되는 듯, 노인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노인의 공격을 막기 위한 한울의 움직임도 덩달아 빨라졌다.
사방에서 주먹이 날아오는 것과 같은 착각.
덤벼드는 노인이 한 명이 아닌 것만 같은···.
격투를 거듭하던 중 굉장한 소리가 텅 빈 공간을 반으로 갈랐다.
아차, 하는 순간
기공이 서린 손바닥으로 한울의 뺨을 때렸던 것이다.
얻어맞은 한울의 입 안에서 피가 터져나갔다.
“노인네 거 참, 씨발···.”
울컥 피를 쏟아낸 한울이 퉤, 하고 검은 핏덩이를 뱉어냈다.
“빌어먹을, 아프잖아!”
소릴 지른 한울이 노인의 명치를 세게 걷어찼다. 노인은 조금 밀려났을지언정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다. 커다란 산과 같은 기세에 뒤에서 서 있던 호국이 나섰다.
“얌마, 도와줘?”
부채를 주워 온 호국이 큰 소리로 묻자, 한울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뺨다구 맞아서 자존심 상하는데 땡중 자식, 뒤에서 너까지 긁을래?”
한울은 합장하는 자세를 취했다. 한울의 태도가 좀 더 진지하게 바뀌자 노인 역시 다시 대련하는 자세를 취했다. 노인의 펼친 손바닥에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기류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음을 달리 먹는다고 도대체 무엇이 달라지겠느뇨. 발버둥 친다해도, 결국 쿠로 키츠네님의 제물이 될 뿐이지.”
노인의 말에 한울은 지지않고 화답했다.
“혓바닥 긴 늙은이. 노인공경 제대로 할 테니, 진심으로 한 판 붙어보자고···.”
한울의 허락없이 호국이 후방 지원을 해주려던 참이었다. 11층과 이어진 비상구 문이 열리며 작은 얼굴의 여자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할아범, 내 차례는 언제 와? 나도 싸우고 싶은데···.”
노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제 선에서 정리할 테니 11층으로 다시 올라가십시오, 아기씨.”
“뭐야, 나도 싸울 거란 말이에오···.”
인형을 한 손에 쥔 여자아이가 기어코 10층의 중앙까지 터벅 터벅 걸어왔다. 리아와 눈이 마주친 여자아이는 방긋 웃었다.
“와앙, 엄청 예쁜 언니네오. 눈이 별처럼 반짝거려서···.”
여자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언니의 그 두 눈을 제가 뽑아가도 될까오?”
아이의 말에 호국은 숨을 삼켰다. 리아는 겁에 질려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이는 인형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하늘 위로 뻗었다. 그러자 검은 구체가 빠직거리며 맺히기 시작했다. 호국은 리아의 앞으로 나서서 그녀를 뒤로 숨겼다.
“안된다는 말은 하지 말아줘오, 나는 그러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아이는 공놀이를 하듯 허공에 맺힌 검은 구체를 리아 쪽으로 던졌다. 호국은 빠르게 부적을 한 장 날렸다.
건물이 울릴 정도의 소음이 모두를 뒤흔들었다. 호국의 머리, 바로 그 위에서 구체가 박살났던 것이다. 그 소음을 신호로 한울과 노인은 힘을 겨뤘다. 두 사람이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팔과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구체가 터져나가고 부터 한울과 노인의 싸움, 그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 거친 숨소리만 들리는···.
리아는 두 눈을 문질렀다.
호국과 여자 아이가 기이한 힘으로 대치하고, 한울과 노인이 합을 맞춘 듯 정신없이 움직이며,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호국의 불꽃과 아이의 검은 구체가 허공에서 맞붙어 어지러웠고,
한울과 노인은 온갖 집기와 기물까지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리아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벽에 기대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벽의 옆면을 타고, 아이의 등 뒤까지 간 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그리고 리아는 여자아이의 등을 뒤에서 세게 걷어찼다.
“아악!”
여자 아이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이의 손에 맺혀있던 검은 구체는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호국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이에게 불길을 퍼부었다. 몸에 불이 붙은 아이는 비명을 질러대며 빙글빙글 돌았다.
“아기씨!”
한울과 대련을 하던 노인은 일순간 집중이 깨진 듯, 불 붙은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울은 손으로 날을 세워 노인의 목을 가격했다. 우둑, 하며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노인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쓰러진 채 불에 타고 있는 아이, 그리고 목이 꺾여 숨을 거둔 노인···. 한울은 무릎을 손으로 짚고선 숨을 몰아쉬었다. 벌겋게 피를 뒤집어썼던 얼굴이 흐르는 땀으로 인해 멀끔해 져 있었다.
“···고마워. 덕분에···.”
한울의 말에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국 역시 옷 매무새를 다듬으며 숨을 골랐다. 리아는 11층으로 향하는 문고리를 잡고, 힘주어 말했다.
“멈추지 말고, 올라가요!”
11층을 지키고 있던 것은 아까 그 여자 아이였는지, 텅 비어있었다. 세 사람은 12층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무언가의 기척은 찾아볼 수 없었다. 13층의 문을 열 즈음이었다. 남녀간의 교합하는 듯한 묘한 신음 소릴 들었던 것은.
헐벗은 듯한 젊은 여성과 술냄새가 나는 젊은 남성이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방금까지 애무를 했던 것인지, 여성의 몸에는 온통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리아는 히끅, 소리를 내며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호국은 리아의 등을 한번 쓰다듬고는, 앞서서 걸었다. 호국의 발걸음 소릴 들었던 걸까, 남자가 세 사람이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아아, 결국 우리 차례가 되어버렸군. 아쉽게도, 좋던 참에···.”
취한 남성의 읊조림에 여성은 부드럽게 상대를 밀어냈다. 그녀의 손짓과 목소리에는 교태가 한껏 묻어났다.
“그러게, 12층에서 올라오지 말라니까는···. 덕분에 나까지 나서야 하잖아요.”
“윗 층에 네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안 올라올 수 있겠어.”
“어쩜, 사랑스러운 사람···.”
“사랑스러운 건 너야. 네게서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두 사람의 농밀한 대화가 거듭되자, 한울이 머리를 부비며 짜증을 냈다.
“낯뜨거운 지랄들은 그만하고, 길이나 열어.”
한울의 퉁명스러움에, 술 취한 남자는 여성에게서 손을 뗐다. 어쩔 수 없이 할 일을 해야한다는 듯, 얼굴은 잔뜩 찡그린 채였다. 누가보더라도, 상부의 지시 때문에 마지못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행동에 호국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술 취한 남자는 낮게 한 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빨리 끝내고, 나누던 사랑을 다시 나눠볼까.”
“네 놈의 계획대로 될 수 있을런지, 나는 잘 모르겠다만···.”
한울은 아까 얻어맞은 뺨이 욱씬거리는 지, 왼쪽 볼을 매만지며 말했다.
술에 취한 남자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춤추듯 주먹을 휘둘렀다. 한울은 느긋하게 그의 주먹을 피했다. 그러다가, 옆에 놓인 사물함에 술 취한 남자의 주먹이 빗맞았다.
와그락.
철제 사물함은 우스울만큼 형체가 가볍게 우그러졌다. 분명 눈으로 보기에는 천천히, 그것도 힘없이 휘두르는 것 같은데, 주먹이 빗겨나가 다른 기물에 부딪치면 물건은 산산히 박살났다. 한울은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이리저리 주먹을 피하며 하품을 했다.
“아까 노인네가 13층에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자식은 그냥 힘만 더럽게 쎈 놈이고···.”
말을 마친 한울은 부채를 꺼내 술취한 남자의 관자놀이를 탁, 쳤다. 술 취한 남자는 부채의 살에 닿자마자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입에서는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오고 있었다. 뒤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헐벗은 여자가 소리쳤다.
“자기야, 괜찮아?”
대답할 리 없었다. 정신을 잃은 남자를 본 여성은, 바닥에 내려놓은 쇠 송곳을 양 손에 하나씩 쥐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일때마다 출렁거리며 가슴이 흔들렸다. 거의 내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 모습에 한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다. 땡중, 네가 가라.”
한울은 부채를 접고 뒤로 물러났다. 호국은 키득키득 웃었다.
“왜, 기세좋게 저 계집애랑도 마저 싸우지.”
“시끄럽다···.”
“발가벗고 덤벼드는 여자들에게 약한 건 여전하네.”
“시끄럽다고···.”
호국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앞에 나섰다.
“한울님은 벗은 여자들과는 못 싸우나요?”
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자, 한울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리아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자, 한울은 리아의 아마를 아프지 않게 톡 때렸다. 리아는 이마를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헐벗은 여자는 거의 속옷차림이나 다름없었다. 가슴과 목덜미에는 입맞춤으로 인한 붉은 자국이 잔뜩 어려있었다. 자박자박, 걸어오는 것만으로도 몸의 곡선은 요염하게 드러났다.
호국은 부적을 한 장 날렸다. 날아간 부적은 여성의 머리에 가서 철썩 달라붙었다. 부적이 머리에 닿아있는 그 순간, 호국은 손가락으로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여성은 몸이 경직된 듯 그 자리에 굳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예뻐서 봐 줬다.”
호국의 편향적인 관대함에 한울은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국은, 뒤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한울에게 말했다.
“자자, 14층으로 올라가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