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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의 퇴마사.

빛 아래 설 너에게 12.

by 다우

14층에 도달한 세 사람은 구석에 시선이 붙박혔다. 텅 빈 공간에 의자 하나만 뎅그러니 놓여있었다. 의자에는 고개를 숙인 낯선 남성이 깊게 앉아있었다.


“흑호교 놈들, 공간 낭비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이 건물은 행정실인 3층까지만 사용하고 그 윗층으론 쭉 공실로 비워뒀던 거겠지.”

“그리고 21층에 쿠로 키츠네가 머무른 걸테고···.”


한울과 호국의 대화에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분, 졸고 계신 걸까요?”


아무런 반응이 없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위를 깎아놓은 듯 다부진 인상에 리아는 움찔했다. 남자는 세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 쿠로 키츠네님을 귀찮게 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그건 흑호교 네 놈들이 더 잘 알겠지.”


“참으로 어리석은 답변···.”


한울에 대답에 남자는 턱을 괴었다. 그는 조금 생각해보는가 싶더니, 다시 말을 보탰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으로 보아 네 녀석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 정도는 알겠구나.”

“생각 정도는 하는 놈이로군.”


한울의 도발에도 남자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남자는 손잡이를 잡고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우뚝 선 사내의 키는 상당했다. 그는 품에서 작은 칼을 하나 꺼냈다. 은장도 크기의 칼은 스산한 소리를 내며 손 안에서 바르르 떨렸다.


“해어도 解語刀, 전투 준비.”


사내의 낮은 목소리에 감응하듯 은장도는 떨림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한울을 향해 날을 겨눴다.


“해어도라···. 호오, 말을 알아듣는 검인가.”


은장도는 총탄처럼 날아와 한울의 귀를 잘라내려 했다. 하지만 한울은 그보다 더 빨랐다. 그는 은장도를 맨 손으로 움켜잡았다. 한울의 손에서 핏방울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지만···.


“네 놈, 제법 귀여운 장난감을 갖고 있어.”


한울은 손에 쥔 은장도를 바닥에 던졌다, 은장도는 타일에 부딪쳐 얇은 쇳소리를 내었다.


“다시 공격.”


주인의 감정없는 말투에 은장도는 충직한 개처럼 한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울은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달려드는 은장도를 부채의 살로 가볍게 쳐냈다.


“다시 공격.”


은장도는 사방에서 빗발치는 총알처럼 끊임없이 한울에게 날아들었다. 필사적으로 까지 보이는 은장도의 공격에도, 한울은 놀라운 동체시력으로 번번히 칼부림을 막아냈다.


한울이 부채를 비스듬히 세워 흔들자,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 은장도의 매듭끈이 끊어졌다. 은장도는 당황한 듯 덤벼드는 것을 멈췄다. 다행일까, 끈은 완전히 풀리지 않고 끄트머리에 걸려있었다.


“저 녀석을 베지못하면 날을 두 동강내서 부러뜨릴 줄 알아.”


사내의 음산한 위협에 은장도는 파르르 떨더니, 한울의 높은 코를 베려 들었다. 한울은 순간 부채를 전부 펼쳐 얼굴을 가렸다. 부채의 살에 부딪쳐, 구석으로 날아간 은장도는 매듭이 풀렸는지 바닥에서 딸깍 또 딸깍 거렸다.


“한심한···.”


은장도는 끊겨서 풀린 매듭을 다시 제 끄트머리 장식 구멍에 넣어보려 애썼지만···.


은장도와의 협공을 포기한 듯, 사내는 주먹을 말아쥐고 한울에게 걸어왔다. 리아는 구석에서 버둥거리는 은장도를 보고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녀는 호국의 눈치를 보다가,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진 은장도에게 다가갔다.


리아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서 바닥에서 달싹이는 은장도를 쓸어만졌다. 은장도는 놀란 듯 움직임을 멈추고 빳빳하게 굳어있었다. 그녀는 풀린 매듭끈을 은장도의 장식 구멍에 넣어주고 예쁜 매듭을 묶어주었다. 은장도는 얌전히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뭐하는거야.”


호국이 리아에게 묻자, 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죄송해요, 그냥 좀 가엾어서···.”


리아는 옷깃으로 은장도의 날을 부드럽게 닦아준 뒤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은장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는 한울에게 빠른 속도로 주먹을 휘둘렀다. 붕-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울은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앞선 노인네와 비등한 속도지만 힘은 더 쎄다, 이건가···.”


한울은 바닥을 박차고 날아서, 커다란 사내의 어깨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발을 굴렀다. 어깨 위에 올라선 한울에게 연달아 발길질을 당한 사내는 휘청대며 자세가 틀어졌다.


그는 재빨리 한울의 발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한울을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한울은 날아가며 자세를 틀었다. 그리고 벽면을 딛고 다시 사내에게 덤벼들었다.


“해어도! 뒤에 서 있는 여자의 목에 날을 겨눠!”


사내의 외침에, 은장도는 가까이 선 리아의 목에 자신의 칼을 겨눴다. 사내에게 날아들던 한울은 멈칫하고 중간에 멈춰섰다. 사내는 이기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여자의 목을 찔러.”

“순 비열한 자식이잖아.”


한울은 잇샌 소릴 내었다. 목에 칼이 겨눠진 리아는 덜덜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한울은 부채의 살을 활짝 펴고 큰 바람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네 녀석의 상대는 나란 말이다!”


사내는 한울의 외침에 비열한 어투로 대답했다.


“해어도, 여자를 죽여.”


리아는 두 손을 꼭 말아쥐었다. 숨을 꼴깍 삼킨 후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목 언저리에서 붕붕대며 떠 있던 은장도는 사내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주춤대고 있었다.


“여자를 죽이라니까!”


사내의 호통에 은장도는 흠칫 했지만···.


“날을 밟아서 부러뜨리기 전에, 여자의 목을 찔러! 당장!”


리아는 자신의 목 언저리에서 맴돌 뿐인 은장도를 손으로 감싸쥐었다. 은장도는 리아의 손길에 파르르 떨었다. 리아는 손 안의 은장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리아의 말에 은장도는 다시금 빳빳하게 되었다.


“내 말을 안 들을 셈이냐! 해어도, 여자의 코를 베어! 귀를 베어!”


사내의 분노에 한울은 부채를 파닥이려던 것을 멈추고, 상황을 관찰했다. 리아는 병아리를 손에 쥐고 있듯, 은장도를 조심히 감싸쥐었다. 그러자, 은장도는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금 파르르 떨었다.


“죽여! 여자를 죽이란···!”


리아의 손에서 잠시 머무르던, 은장도는 삽시간에 날아가 사내의 코를 베었다. 눈 깜짝할 사이, 코가 사라진 남자는 얼굴을 움켜쥐고 비명을 내질렀다.


은장도는 멈추지 않고 사내의 양쪽 귀를 전부 베었다. 모두 놀라서 멈춰있는 동안, 은장도 만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괴물의 형상이 된 사내는 목에 은장도가 박힌 것을 마지막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하···.”


한울은 숨을 삼켰다. 은장도는 남자의 목에 박혀있는 자신의 칼 날을 힘껏 뽑듯, 뒤로 몸을 뺐다. 허공에서 멈춰있던 해어도. 녀석은 핏방울을 떨어뜨리며 리아에게 날아갔다. 비행은 조금도 서글프거나 사납지 않았다, 우아하고 수줍게 녀석은 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 앞에서 머뭇거리듯 서성였다.


“···해어도야.”


리아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서 은장도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옷깃을 잡아당겨 맺힌 핏방울을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은장도는 바르르 떨더니 도로 빳빳해졌다.


“15층으로 갈까.”


이 모든 정황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호국이 정적을 깨뜨렸다. 한울은 부채를 품에 넣고 고갤 끄덕였다. 리아는 손 안에서 몸을 뉘인 은장도를 바라보았다.


“해어도야, 너는 어떻게 할래?”


리아의 다정한 물음에 은장도는 처음으로 단맛을 느낀 사람처럼 몸을 떨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해어도는 허공에 뛰어올랐다. 녀석은 큰 원을 그리며 리아의 곁을 빙글 날았다.


“주인이 바뀐 모양이군. 날아다니는 게 꼭 리아를 지키겠다는 것처럼···.”


한울의 말에 은장도는 허공에 원을 그리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리아의 손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리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사르르 미소지었다.


15층에 오르자 검은 기운이 곳곳에 서려있었다. 리아는 왜 인지 기분이 나빠져서 어깨를 움츠렸다. 호국은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알을 돌리며 연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렸다. 차가운 물에 닿은 것처럼 오싹한 기분. 리아는 호국의 안색을 살폈다. 호국은 리아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을 건냈다.


“리아양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이 곳에는···.”


호국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원한에 찬 악령들이 가득해요.”


한울은 가슴이 답답한 듯 명치를 두드렸다.


“출근길의 만원 지하철처럼, 한 층 가득 빽빽할 정도로 귀신투성이라 숨이 막힐 정도야.”


한울은 어깨를 뚜둑거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호국은 염주알을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리아는 호국이 뒷걸음질 하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호국은 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우리에게는 퇴마사가 있으니까···.”


한울은 소매를 걷고서 대답했다.


“그래. 대한민국 최고의 퇴마사, 한울님이시지.”


그는 방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옷 속에 손을 넣어 작은 나침반을 꺼냈다. 동서남북의 방향을 확인한 한울은 부채의 살을 펼쳐 큰 바람을 각 방위를 향해 불어넣었다. 바람들은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하나로 모여들었다. 정중앙에 서 있는 한울의 머리 위로,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무당 같은 행동은 하고 싶지 않지만, 보검수 寶劍手 진언.”


처음 보는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한울은 눈을 감았다. 호국은 리아에게 작게 설명을 해 주었다.


“리아양, 보검수 진언은 모든 도깨비나 귀신들의 항복을 받으려 할 때 쓰는 진언이에요. 한번도 본 적 없는 장관이 펼쳐질테니 잘 봐둬요.”


깊고 깊은 바닷 속, 고래가 내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한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옴···.”


산스크리트어인 옴ॐ이란 진언이 한울의 몸에서부터 진동으로써 묵직하게 퍼져나갔다. 낮고도 진중한 떨림은 우주를 향해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리아는 한울이 내는 오묘한 소리에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무언가 그윽하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또한, 목덜미를 차갑게 만들던 냉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옴이란 범어가 울려퍼지면 퍼질수록 주변의 공기가 숲속 어딘가처럼 맑아져갔다. 생애 처음 느껴보는 신성한 음절에 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한울을 우러러 보았다.


한울의 머리 위에 맺힌 소용돌이가 눈으로 보일만큼 또렷한 형체가 되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건물의 실내에서 바람이, 소용돌이가 만들어지는 기이함에 리아는 입을 벌렸다. 한울의 머리카락과 옷이 강렬한 바람에 쉼없이 흩날렸다.


한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목소리는 달빛처럼 서늘했다.


“옴 떼세떼쟈 뚜비니 뚜데 사따야 훔 바트.”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리아의 눈에 흐릿한 형체들이 명확히 보였다. 호국의 말처럼 엄청난 수의 혼령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한울은 신묘한 수인을 맺으며, 다시금 보검수 진언을 읊었다.


“옴 떼세떼쟈 뚜비니 뚜데 사따야 훔 바트.”


혼령들은 소리없이 절규하며 하얗게 타들어갔다. 리아는 두 눈을 몇 번씩 부비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방에 자리잡은 혼령들이 그슬린 듯 뭉그러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한울은 귀신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 부채의 살을 넓게 펼쳤다.


“옴 두나 발라 하흐.”


그가 진언을 읊자, 소멸하던 귀신들은 한울의 머리 위 소용돌이에 감기듯, 방의 정중앙에 선 한울에게 끌어당겨졌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검은 부채에 차곡차곡 흡수되었다. 마지막 혼령이 절규하며 부채에 스며들자, 한울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세를 바르게 했다.


“방금 전에 읊은 진언, 그건 뭐 였나요?”


리아의 물음에 한울은 눈을 반짝였다.


“촉루장수 觸髏杖手 진언. 모든 귀신들을 내 것인 양 부릴 수 있는 진언.”


미소짓는 한울의 하얀 치아가 맹수의 그것처럼 빛났다.


“부채에 묶인 혼령들은 이제 모두 다, 나의 수하가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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