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래, 우리···.

빛 아래 설 너에게 13.

by 다우

한울의 활약은 멈출 줄 몰랐다.

16층에서는 불이 붙은 화마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카맣게 타버려 뭉그러진 얼굴, 고기가 익는 불쾌한 냄새.

뜨겁다 못해 따갑기까지 한 열기가 세사람을 격렬히 반겼다.


호국은 뒷 편에 서서 일체 나서지 않았음에도,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다.


한울은 열기에 아파하는 호국더러 저저 등신, 소릴 한번 쏘아주고

파닥거리는 호국에게 월정마니수月精摩尼手 진언을 읊어주었다.


열병으로 고통 받을 때 시원함을 구하는 진언인지라

머리카락의 끝이 이미 잔뜩 녹아버린 호국은,

서늘한 냉기에도 입술이 비죽 나와있었다.


“옴 스시디 그리 스와하, 옴 스시디 그리 스와하···.”


리아는 한울이 알려준 진언을 따라서 계속 읊었다.

사방에서 불붙은 혼령들이 달라붙었다가도,

진언에 의해 떨어지길 반복했던 것이다.


화마들을 꽁꽁 얼려서 제압한 한울은,

얼음조각이 된 귀신들을 부채의 살로 쳐서 부숴버렸다.


“이번에는 왜 흡수하지 않는 건가요?”


리아의 물음에 한울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화마는 이미 부리는 녀석들이 잔뜩 있고···.

불붙은 혼령이 가득한 이 방에서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간 건물 전체가 타고 말테니까.”


리아는 그의 지혜로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17층에 도착하자마자 한울은 벌컥 짜증을 냈다.


“젠장할, 맹렬히 타오르는 불 다음은···!”


리아는 하하, 웃으며 대신 말을 이었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을만큼 깊은 물이네요.”


섬뜩할만큼 새카만 물귀신들이 사방에 물방울을 흘리며,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울부짖었으나,

물 속에서의 고함인 듯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호국은 물귀신들의 수를 헤아리고 한울을 넘겨보았다.


“얌마. 네가 좀 쉴 수 있게, 내가 천도제를 할까?”


호국이 물귀신들을 승천시키려 하자, 한울은 고갤 저었다.


“이 놈들, 단순히 저수지나 계곡에서 죽은 놈들이 아냐. 물의 깊이가···.”

“···그럼?”


한울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같이 짠 바다내음이 나.”


그는 부채를 펼쳤다.


“그리고 이 원통함. 심장이 찢겨져 나갈 것만 같은 분노. 이건 분명히···.”


한울은 부채 뒤로 울분을 삼켰다.


“강제로 바닷속에 수장 된거야.”


호국은 대답 대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연호했다.


물귀신들은 리아에게도 엉겨붙기 위해 질척거렸는데,

그럴 때마다 해어도가 허공을 가르며, 그들을 멀리 떼어놓았다.


은장도 녀석은 얼마나 득달같이 엄호를 하는지,

리아의 주변에는 물귀신들이 얼씬도 하지 못했다.


한울은 나침반으로 동서남북의 위치를 확인한 뒤, 부채를 펼쳤다.

커다란 파닥임에 빛의 파동을 닮은 기류가 일어났다.


동쪽과 남쪽, 서쪽과 북쪽으로 한번씩

부채를 흔든 한울은,

머리 위로 회오리 바람이 만들어지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어떤 기구한 사연으로 그 무겁고 검은 물 속에 가라앉았는가.”


물귀신들은 각혈하듯 울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깊은 물 속에 잠겨있어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죽은 후에도 타인에게 부림을 당하는 자들아.”


한울은 눈을 감았다가 바뜩 치켜떴다.


“격렬한 원한, 비통한 생애, 내가 모조리 씹어 삼켜주마.”


한울은 혼령들을 흡수해 사역할 수 있는

촉루장수 觸髏杖手 진언을 읊었다.


맺은 수인에서 신묘한 기류가 피어올랐다.


“옴 두나 발라 하흐.”


진언에 따라 물귀신들은 머리 위 회오리 바람에 감겨들었다.

그리고 한울이 펼쳐둔 벽조목 부채에 녹아들었다.


마지막 물귀신이 몸을 뒤틀며 스며들자,

한울은 부채를 탁, 소리가 나도록 한번에 접었다.


바닷물의 짠내가 사라진 방에는 메마른 공기만이 남았다.


“오니 군단에서부터 도인들, 그리고 화마와 수마까지

슬하에 두고 부리는 걸 보면,

··· 쿠로 키츠네 녀석, 예삿 놈이 아니야.”


호국이 중얼거리며 진심을 꺼내놓았다.


“머리카락 좀 탔다고, 땡중. 겁 먹었냐?”


한울의 말에, 호국은 울컥 화를 냈다.


“이제 윗층인 18층에 뭐가 있을지 감도 안 잡힌단 말이다.

또 그 다음 19층에는, 20층에는···!”

“업계 초짜도 아니고, 왜 이래.”


한울은 스트레칭을 하며 호국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정 그렇게 무서우면 돌아가던가. ”

“··· 얌마, 말 그딴 식으로 할래?”


“부적 몇 장 남았는데?”


한울의 말에 호국이 입을 닫았다.

호국에게 시선을 준 한울은 집요하게 되물었다.


“몇 장 남았냐고 묻잖아.”

“···10장.”


호국의 말에 한울은 혀를 끌끌 찼다.


“종종대고 쫓아다니며 염불이나 외워라.”

“얌마!”


호국이 발끈하자 리아가 얼른 대답했다.


“괜찮아요, 언니. 제가 지켜드릴게요.”


리아는 해어도를 들어보였다.

해어도는 자신에게 맡겨두라는 듯

허공에 날아올라 커다란 원을 그렸다.


호국은 주먹을 꽉 쥐어보이며,

무력으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18층에 올라가자 난데없이 정글이 펼쳐졌다.


검은 표범부터 붉은 곰까지

갖가지 짐승들이 혼령 상태로 부유하고 있었다.


“쿠로 키츠네 녀석, 진짜 가지가지 하네.”


놈들은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한울은 동물령은 사역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도깨비들과 귀신들을 꺾는데 사용하는 보검수 寶劍手 진언만 읊었다.


신묘한 힘에 얻어맞은 동물들은 하얗게 타들어갔다.


꼬리 부근부터 지워져가는

푸른 늑대의 영혼이 리아에게 덤벼들자,

해어도가 즉각 나섰다.


리아로부터 별다른 명령이 없었음에도,

해어도는

날이 깨져도 상관없다는 기세로 혼령에게 덤벼들었다.


“옴 떼세떼쟈 뚜비니 뚜데 사따야 훔 바트.”


보검수 진언을 연달아 읊는 한울.

그의 어깨 너머로 커다란 고래의 영혼이 튀어올랐다.

막대한 크기의 혼령, 그 묵직한 힘에

한울은 뒤로 조금 밀려났지만···.


“고집부리지 말고 소멸해, 그렇게 평온을 찾아.”


한울의 말을 이해한 것처럼 고래의 령은 두 눈을 꿈뻑였다.

그는 낮은 한숨과 함께 재차 진언을 들려주었다.


“옴 떼세떼쟈 뚜비니 뚜데 사따야 훔 바트.

역겨운 이승을 떠나서, 무의 존재로 되돌아가라.”


한울은 불꽃처럼 사그라드는 고래를 보며 부채를 접었다.

리아는 왠지 모를 숙연함에 입을 다물었다. 해어도는,

풀이 죽은 리아를 위로하려는 듯 눈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리아는 사랑스러운 해어도를 부드럽게 쓸어만졌다.


19층에 올라가자 기세좋던 한울은 탄식을 내뱉었다.


발가벗고 있는 남녀의 영혼들이 몸을 맞대고서 귀접을 하고 있었다.

리아는 두 눈을 가렸고, 호국은 큰 소리를 냈다.


“이 녀석들, 전부 다 음마잖아!”


한울은 두통이라도 일어나는지 머리를 짚었다.


“보면 누가 모르냐고···.”


한울의 전투력이 급격하게 낮아지자,

호국은 음마의 수를 헤아린 뒤 10장 남은 부적을 꺼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설 차례네.”

“10장 남았다면서.”

“한울이 너, 발가벗은 여자를 상대로 공격할 수 있냐?”


한울은 정신없이 귀접에 열을 올리는 음마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저 놈들은 여자라기보다는···.”

“그래, 여자가 아니라 그냥 귀신이야.”


“그래도 좀 내키질 않는데···.”


한울은 부채를 폈다, 접길 반복했다.

뒤에서 두 눈을 가리고 얌전히 서 있던 리아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제가 해 볼게요.”


리아의 말에 한울과 호국은 뒤를 돌아보았다.

리아는 빨갛게 익은 얼굴로 당차게 걸어나왔다.

귀까지 수줍게 물들어, 그녀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됐어, 내가 처리 할테니까.”


한울은 쯧, 하고 혀를 찬 뒤 이어말했다.


“열여덟 어리숙한 청소년도 아니고, 마음에 걸릴 게 뭐람.”

“기사도로 여자라서 손 못대는 거 아니었어?

여지껏 부끄러워서 그랬던 거야?”


호국의 물음에 한울은 부채의 살을 펼쳤다.


“닥쳐. 여자든 뭐든, 권선징악.”


부채를 크게 파닥이며 한울은 보란 듯 이어말했다.


“내 세계관에서 악으로 정의된다면

성별과 상관없이 빠따로 줘패주겠다, 이 말이야.”


넋을 잃고 교접하는 혼령들을 날 선 바람으로 동강내며,

한울은 수려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팔과 다리, 그리고 그 밖의 여러가지들이 잘려나가는 혼령들을 보며

호국과 리아는 입을 벌렸다.

단 한 명의 음마도 사역하지 않겠다는 듯, 한울은

진언을 한 글자도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음마인 헐벗은 여성의 두 가슴이 잘려나가고,

동강 나 마구 뒤엉켜 있는 음마들의 팔과 다리를 내려다본 뒤,

한울은 20층으로 향하는 문고리를 잡았다.


“할만큼 했으니까 윗층으로 올라가자.”

“그래, 애 많이 썼다.”


새빨갛게 익은 귀로, 덤덤하게 말하는 한울.

호국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

리아는 해어도가 잘 따라오는지 재차 뒤를 돌아보며 걸어나갔다.


20층에 올라오자, 문을 열기도 전에

둥둥거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심장 소리를 연상케 하는 북소리 다음으로는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뒷따랐다.


“이 소리는···.”

“왜?”


리아의 말에, 한울이 뒤를 돌아보았다.

리아는 북소리를 좀 더 귀기울여 듣더니,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 소리는 분명 흑호교의 찬송가예요.

우리는 쿠로 키츠네님을 찬양할 때, 노래하며 북을 치거든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데···.”


호국 역시 숨을 죽이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을 맞추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세 사람.

한울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음마도 꺼리낌없이 해치웠는데, 이 이상 걱정스러울 게 뭐 있겠냐.”


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해어도와 함께 나서서 싸울테니까, 걱정마세요.”


호국은 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좋아, 연다.”


기름칠이 되어있지 않아, 끼긱거리는 육중한 쇠문이 열리고

자욱한 연기가 쏟아져나와 세 사람의 발목을 붙잡았다.


코와 입을 감싸고, 리아가 토할 것처럼 기침을 해댔다.

매캐한 연기는 숨쉴 때 쓰라린 느낌까지 주었다.


“빌어먹을, 이게 다 뭐야.”


한울의 짜증에 호국은 도로 문을 닫으려 했다.


“도망칠 생각이냐고!”

“숨을 못 쉬는데 어쩌자는 거야!”


한울과 호국의 언성이 높아지자 기침을 해대던 리아가 나섰다.


“그만두세요. 두 분, 싸우지 마세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와중에

20층 내부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세 사람이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소름끼치는 광경에 리아는 흡, 숨을 들이켰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은,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세 사람을 향해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숨결을 타고 날아오른 종이들은···.


“말도 안돼.”


리아는 자신의 눈 앞에서

형체가 변하는 종이들을 보고 놀라 주저앉았다.


한울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저 녀석들, 음양사들이로군···.”


세 사람을 향해 날아오던 종이는 사람처럼 두 발로 선 생쥐들이 되었다.

사람의 덩치만한, 하지만 머리는 분명 생쥐의 것인···.


괴물.

아니, 괴물들.


둔갑한 종이들은, 기기묘묘한 낯선 생명체가 되어

세 사람 앞에서 공격태세를 취했다.


한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부채를 꺼내들었다.


“좋아, 해 보자고.”


호국은 조심스럽게 리아를 일으켜 세웠다.

리아는 그녀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어도는 주인이 걱정스럽다는 듯 허공에서 바르르 몸을 떨었다.


“저도, 저도 돕겠어요.”


리아의 단호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울이 씨익 웃었다.


강한 적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한울,

그의 목소리가 제법 근사하게 들렸다.


“그래, 우리 신나게 놀아보자.”

keyword
이전 12화대한민국 최고의 퇴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