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아래 설 너에게 16.
“한국인들을 모조리 학살해라! 소노카미와 카라카미, 고대 한국의 신들이여!”
쿠로 키츠네의 찢어진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지며, 판세가 뒤집힘을 알렸다.
공기의 밀도가 달라지며, 묵직한 압력이 사방에서 가해지자, 심장에 통증이 느껴지는지 리아의 두 눈에 촛점이 돌아왔다.
호국은 못 견디게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쥐어짜듯 무자비하게 찍어 누르는 거대한 힘에 한울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세 명의 신령은 평온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다가오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한울의 무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신령 중 하나가 스르르 몸을 굽혀 한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 그대.
한울은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눈 앞의 신령을 노려보았다.
- 그대, 반도의 사람인가.
신령의 물음이 분명하여, 한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지금 뭘 하고 있는건가!”
신령의 뒷 편에 널부러져 있는 쿠로 키츠네가 소리를 질렀다.
신령의 목소리는 맞닿은 나에게만 들리는 거구나, 한울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 그대, 어찌하여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우리와 마주섰는가.
한울은 눈을 감고, 생각을 빠르게 정리했다. 신령은 한울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 읽는 듯,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 그대의 말대로라면, 반도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아닌 하나의 단일 국가가 되었다는 것인가.
한울은 허리가 동강난 한반도의 지도를 머릿속에서 이미지화 했다. 신령의 표정은 도통 의미를 알 수 없었다.
- 바다 건너, 타국에서 눈을 감고 있는 시간 동안 이토록 많은 일들이···.
신령은 천천히 몸을 돌려, 뒤에 떠 있는 다른 신령들과 눈을 맞췄다. 서로를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은 점차 깊어져갔다.
“뭘 하고 있어, 죽여! 한국인들을 죽여! 한 마리도 살려놓지 말고, 당장!”
쿠로 키츠네의 찢어지는 고함에, 신령들은 천천히 팔을 펼쳤다.
한울은 숨을 꿀꺽 삼켰다. 쿠로 키츠네는 기쁜 듯 말을 이었다.
“그래, 항상 그랬지. 조선인들을 핍박하던 것은 언제나 같은 조선인이었다. 우리 관대한 일본인들은 미개한 너희를 구원하러 와 준 거야. 모두가 모두에게 악당인 조선. 지옥같아 비참한 조선인들의 삶을 영광스럽게 끝내주기 위해서···. 대일본제국의 거름이 되어라. 한국의 고대 신들에게 산 채로 찢겨 죽어. 뜨거운 피와 살을 제국을 위한 제물로 바쳐라.”
“··· 하, 씨발. 혀가 너무 길어.”
호국이 못 듣고 있겠다는 듯, 남은 7장의 젖은 부적을 한꺼번에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이글거리는 불꽃들이 하늘에 일렁거렸다.
호국은 손으로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빙글빙글, 호국의 머리 위를 돌던 불꽃이 하나, 쿠로 키츠네를 향해 날아갔다. 난데없이 불덩어리를 뒤집어 쓴 쿠로 키츠네는 비명을 내질렀다. 파닥거리며, 불을 끄려는 모습이 볼썽사나웠다.
“애국심이라고 부를 만한 예쁜 감정은 딱히 없는 사람인데도···.”
호국은 낮게 중얼거리며, 두 번째 수인을 맺었다. 이번에는 불꽃 두 개가 놈에게 날아들었다. 간신히 불을 껐던 쿠로 키츠네는 다시 불에 휩싸여, 몸을 뒤틀었다.
“네 놈 말을 듣고 있자니, 울컥하는 부분이 생긴단 말이지.”
호국은 팔을 크게 휘저으며, 세 번째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남은 네개의 불 덩어리가 각각의 방위로 날아갔다. 불 들은 허공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며, 21층에 있는 존재들을 위협하듯 날아다녔다. 불꽃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한울은 부채를 꺼내 공기의 흐름을 호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꿔주었다.
“땡중. 남은 부적도 이제 없을 텐데, 마지막은 총섭천비수 總攝千臂手 진언으로···!”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신령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냐타, 바로끼데 스와라야 살바 뚜따 우하미야 스와하!”
호국은 진언을 외침과 동시에 손목에 차고 있던 염주를 강한 힘으로 튿어냈다.
그러자 튿어진 염주에서 염주 알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염주알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푸른 빛이 알알이 맺혀 있는데다가, 튀어나가는 속도가 총탄같이 빠르고 매서웠다.
“이 자리에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마구니들의 항복을 필히 받을 것이니, 다냐타, 바로끼데 스와라야 살바 뚜따 우하미야 스와하!”
호국의 총섭천비수 진언이 말로 발현되자, 염주알은 한 알, 한 알에 혼이라도 깃든 것처럼 방 안을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아악, 악, 아악!”
튀어오른 염주알이 쿠로 키츠네의 몸을 마구 때렸다. 신령들도 팥알 세례를 맞은 것처럼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21층 벽면을 타고 원을 그리던 불꽃들은 점점 그 폭을 좁혀갔다.
결국 세 명의 신령을 불의 사슬로 꽁꽁 묶어버린 호국은 당차게 외쳤다.
“좋아, 한울아. 이제 저 세명의 신령들을 네 부채에 봉인해 버리자. 사역하는거야.”
한울은 신령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령들은 여전히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참 말이 없던 한울은 낮게 중얼거렸다.
“이상하지, 신령들은 우릴 공격할 생각이 없어보여.”
“아냐. 아까 팔을 뻗었잖아, 뭔가 하려 했었다고···!”
호국이 수인을 풀지 않은 채 대꾸했다. 신령들을 묶어놓는 불 줄기. 그 매듭의 끝을 호국이 잡고 있는 듯 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한울은 저벅저벅, 신령들에게 다가갔다. 중력의 차이로 인해, 코피가 터져나왔지만 그저 소매로 쓱 닦은 후 그들 앞에 담담히 섰다.
신령들은 불줄기에 묶여서 한울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울은 신령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서로 공명하는 듯한 감각이 되돌아왔다.
- 그대.
“말씀 하십시오.”
맞닿은 신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울은 영혼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 오늘 날, 반도는 참으로 지옥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 그대의 삶은 어떤가, 진정 비참한 모습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울의 즉답에 신령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신령들은 한명씩 차례대로 팔을 펼쳤다. 그러자 신령들을 옭죄던 불줄기가 연기와 함께 녹아 사라져버렸다.
불줄기의 매듭의 끝을 잡고있던 호국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한울은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히 어깨를 편 채 신령들과 마주보고 있었다.
신령들은 모두 팔을 펼친 후, 21층의 곳곳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놀라울만큼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쿠로 키츠네는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제야 조금 마음에 드는 군. 괘씸한 무단침입자 놈들을 끝장내는거야!”
그때였다, 신령 중 하나가 호국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서 일으켜세웠다. 호국은 지끈거리는 허리가 말끔히 나았음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놀란 호국이 말을 잇지못하자, 리아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상황을 열심히 살폈다.
태연한 것은 한울 뿐이었다. 그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엷게 미소지었다.
세 명의 신령들은 한울과 호국, 리아에게 날아와, 그들의 몸에 곱게 감겼다. 반투명한 베일에 조심스레 감싸인 것처럼. 신령들은 각각 한 사람씩을 맡아서 보살폈다.
맑은 공기가 가득한 숲을 거닐 듯 가슴 속이 후련해지는 감각에, 세 사람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신령들의 손길이 몸의 구석구석 닿고 있었다.
세 사람이 마치 포근한 담요에 감싸인 아가들처럼 편안한 표정을 짓자, 쿠로 키츠네는 일갈했다.
“어떻게 된거야!”
원신과 한신은 세 사람을 축복하듯 빛 무리를 안겨주었다. 빛의 화관을 쓴 세 사람은 묵은 피로가 깨끗하게 가시는 걸 느꼈다. 완전한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한울의 인사에 신령들은 옅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점차 흐릿해지더니, 끝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주변은 숨소리까지 들릴만큼 고요해졌다. 침묵을 박살낸 건 역시나 쿠로 키츠네였다.
“빌어먹을!”
“애초에, 고대 한국의 신령들이 한국인을 공격할 리 없잖아. 네 놈은 머리를 도대체 왜 달고 다니냐?”
한울은 가뿐한 몸으로 부채를 펼쳤다.
“여우 녀석, 잔재주는 이제 다 부린 모양인데··· 슬슬 끝을 내 볼까.”
한울은 끓어오르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한 듯 한번 크게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와르르, 건물의 외벽이 무너졌다. 쿠로 키츠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한울은 다시 한 번 큰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21층 위의 건물 벽이 삽시간에 무너져 버렸다.
달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밤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어쩌냐, 내가 지금 힘이 넘쳐서 조절이 안되는데···.”
한울은 공격 자세를 취했다.
“죽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 해 봐, 존엄하신 쿠로 키츠네.”
쿠로 키츠네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네 놈이 원하는 게 뭐냐.”
놈은 끝을 예감하기라도 한 건지, 세치 혓바닥을 쉼 없이 놀려댔다.
“돈을 원하는 거면, 평생 먹고 살 수 있을만큼의 재화를 주마.”
쿠로 키츠네는 땅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여자를 원한다면, 리아만큼 예쁜 여자들을 수십, 수백명을 안겨주마.”
그는 한울을 향해 두 팔을 뻗고, 두 손을 벌렸다. 그 모습은 비참하고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랑 같이 가자, 새로운 빛과 함께 욱일기 아래서 멋진 꿈을 이루는거야. 돈과 명예, 여자까지 뭐든 채워 줄 테니까···.”
한울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쿠로 키츠네는 침을 꼴깍 삼켰다.
“리아야, 저 녀석을 어떻게든 꼬여내. 이건 교주로서 명령이다.”
리아의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리아는 공중에 떠 있는 해어도를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뗐다.
“새로운 빛 같은 건 필요없어요.”
그녀의 등 뒤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난 어둠을 가르고, 새 날을 뜻하는 그 경이로운 상징성에, 모두 숙연해졌다. 리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에게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겠어. 새로운 빛 같은 건 필요없···!”
“선택받은 민족, 번영하는 일족이 되고 싶지 않아? 태양 아래에서 영험하게 빛나는 황국 신민이 되고 싶지 않냐는 말이다.”
조용히 침묵하던 한울은 멀리서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를 느끼고, 입을 뗐다.
“쿠로 키츠네. 한민족이 왜 하얀 색을 고집하는 백의 민족이라고 불리우는지 알아?”
뜬금없는 그의 말에 쿠로 키츠네는 한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울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얗다, 희다의 백白은 태양을 뜻하는 일日자와 어원이 같기 때문이야. 빛 아래에 서서 태양을 귀히 여기는 건 본래 한민족이란 말이다.”
“그런···.”
“욱일기, 태양에서 뿜어져나온 그 햇살들에 도취 된 너희와 달리, 우리 한민족은 백의 민족, 요컨대 태양의 민족 그 자체란 말이다!”
한울은 쿠로 키츠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기세에 눌린 쿠로 키츠네는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부들대며 떨기만 했다.
한울은 쿠로 키츠네에게 속삭였다.
“네 놈, 뭐라고 떠들어댔더라. 내게 막대한 돈과 명예와 여자들을 안겨주겠다고?”
결이 단단한 목소리는, 올곧고 바르게 울려퍼졌다.
“정당한 방법으로, 또한 스스로 얻지 못한다면 전부 다 의미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