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의 딸 정선 공주 이야기
조선 3대 임금 태종인 이방원은 9대 임금 성종과 더불어 배우자를 가장 많이 둔 조선왕에 해당한다. 태종 이방원은 10명의 부인에게서 12남 17녀의 자녀를 두어서 다복하면서도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 외에도 그는 여러 후궁을 두었다.
왕의 정실왕비가 낳은 딸에 대한 칭호가 공주이다. 이는 중국의 진(秦)한(漢) 나라 때 황제가 딸의 혼인을 삼공(三公). 대사공(大司公)에게 맡겨 주관하도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정선공주는 생애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불화가 원인이기 때문이다. 정선공주는 태종 이방원과 어머니 원경왕후 사이에서 넷째 딸로 태어났다. 이방원과 원경왕후 소생은 3명의 어린 왕자는 어린 나이에 죽고, 이후 4남 4녀 중 원경왕후 민 씨가 40세 때에 낳은 막내딸로 태종의 나이 38세였다.
조선의 드세고 영리한 왕후인 원경왕후 민 씨(1365~1420)가 이방원의 정비(正妃)이다. 원경왕후는 고려 멸망 27년 전 조선의 왕비를 3명 배출한 명문가인 여흥 민 씨 민제의 딸로 출생했다. 원경왕후는 이방원을 도와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을 결정적으로 도와 이방원을 왕위에 앉히는 큰 역할을 했다.
평소 자녀 양육에 이견이 없고 남편의 정치적 야망에도 동맹이자 지원군이면서 같은 팀이었지만,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에 19명의 많은 후궁을 들였고, 왕세자 옹립에 대한 사건으로 친정 남동생 민무구, 민무질의 숙청 사건으로 둘의 관계가 상당히 소원해졌다.
이럴 즈음에 늦둥이 딸로 정선공주가 태어났다. 이런 극심한 부부의 불화로 출생기록은 없지만 세종실록에 세종 6년 1월에 2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출생 연도를 알 수 있다. 정선공주가 태어나고 몇 년 후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세력을 극도로 경계하던 태종이 제주도에 귀향 갔던 민무휼. 민무회 처남들에게 자결을 명한다. 원경왕후의 친정을 멸문시키면서 왕비와 사이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태종은 자신의 딸들이 다들 쟁쟁한 유력가문에 시집보낸 것을 후회하며 외척세력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막내딸 정선 공주만큼은 세력이 약한 한미한 집에 시집을 보내기 위해 사윗감을 간택하기로 한다. 이로 인해서 조선 왕조 최초 부마 간택이 실행되었다.
고관대작의 유력 가문을 제외하고 정 4~5품 이하(현대로 치면 7급공무원 이하) 가문의 아들들을 조사한 후 3명으로 압축 후 왕이 면담과 심사 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선공주의 배우자로 최종적으로 간택된 주인공은 남휘였다. 남휘는 과부의 아들이었으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재의 손자였지만 남재는 그 당시 연로해서 정치적 야심이 없었고 남휘의 아버지 남경문은 요절하였기에 명문가 집안 출신이면서 정치적 배경이 없는 태종이 바라던 딱 맞는 혼처였다.
이런 이유로 당시 13세의 정선 공주는 혼인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선 공주와 남휘의 부부생활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선 공주가 17세 때 어머니 원경왕후 민 씨가 세상을 떠나고 2년 후에 아버지 태종까지 죽게 되어 연이은 초상으로 엄격한 유교 사회였던 조선은 왕실 예법에 따라 3년간 남편과의 부부생활을 못하게 된다.
이러한 왕실의 장례법에 남휘는 불만으로 노름에 빠졌고 부모를 잃고 상심한 정선공주를 더욱 외면하며 투전판을 기웃거린다. 당시 조선의 왕실 예법에서 부마는 첩을 둘 수 없었음에도 남휘는 관비 출신 윤이를 보란 듯이 첩으로 들이게 된다. 이 소식에 분노한 세종이 남휘를 불러 꾸짖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선공주는 남휘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되며 남편과의 관계 회복에 힘쓰며 둘째 딸을 출산하고 연이은 부모의 초상으로 약해진 몸으로 병마에 시달리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한편, 공주가 어렵게 낳은 아들 하나와 딸은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남이(南怡) 장군과 딸의 후손은 신사임당의 할아버지 신숙권이다. 정선공주는 남이(南怡) 장군의 할머니이자 신사임당의 증조할머니로 기억되어진다.
세종은 여동생인 정선공주가 병상에 몸져누워있을 때 문병을 갔었다. 1424년에 21세의 일기로 떠난 여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사제문을 내렸다.
젊은 나이에 병들고, 백약이 무효하여 세상을 떠났네. 길이 손발이 이지러짐을 생각하니, 심간(心肝)을 베어내는 아픔을 어이 이기리오. 부왕의 상례를 다하기도 전에 동생이 이승을 하직했네. 아, 이 서러움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어린 조카가 갑자기 믿고 의지할 곳도 잃었네. 슬픔을 머금고서 말을 엮어 사관을 보내 전(奠)을 드리노라. 슬프다. 살아서는 남매로서 항상 친애한 마음을 두터웠는데, 죽어 가니 유명의 길이 다르네.”
<세종 6년 2월 2일>
후대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선공주의 일생을 어떻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금수저 중 금수저 출신이었지만 애절하고 슬픈 비극적인 삶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