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오직 쓰기 위하여 / 천쉐 지음
요새 다니던 도서관에서 애들 책만 빌리다가, 간만에 나를 위한 책을 골랐다. 어른 책 코너 서가에 글쓰기 관련 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 중 한 권을 집었다.
천쉐 작가가 누군지 몰랐고, 책 디자인이, 두께-얇고, 크기-작고, 제목-끌리고 하여 손 가는 대로 집어든 책이다.
7페이지가량, 머리말을 읽는데 글이 훌륭해서 책을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글을 써왔고, 그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부분을 포기하고 살아왔는지 잘 전달되었다. 머리말을 읽으며 '이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판단을 내렸다. 천쉐 작가가 어떻게 글을 써 왔는가, 를 보여주는 글이지만, 천쉐가 어떻게 살아왔나, 를 보여주는 글이기도 했다. 작가의 나이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았다. 인생의 선배로 삼기도 적당해 보였다.
그런데 머리말을 읽다가 잠시 인지부조화가 생기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 '딸 노릇' 어쩌고 하는 내용을 앞에서 읽은 듯한데, 몇 쪽 뒤에 '여자친구에게 배신당했다'는 내용이 있어서였다. 딸이 아니었나? 남자였나? 싶어서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책을 잠시 내려놓고, 뇌가 판단을 내리기 위해 작동한다.
'나는 이 사람이 훌륭한 사람일 거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이 사람이 레즈비언이라는 후속 정보가 들어왔다.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천쉐 작가가 훌륭한 사람일 거라고 내렸던 내 판단을 보류해야 하는가?'
'아니오.'
'처음 내가 판단을 내릴 때는 레즈비언이라는 요소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음. 그러니 무시할 것.'
'그러나 판단에 당연히 이성애자라는 가정이 깔려있지 않았는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판단에 어떤 수정을 하기에는 정보 불충분함.'
대충 이런 정도의 사고를 거친 듯하다.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갖고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내 주변에서 레즈비언이나 게이를 본 적은 없다.
다만 미국에는 성 정체성이 22가지가 된다 카더라는 소문을 접하기도 했고, 요새 기대작인 게임에 요상한 주인공들이 나와 게이머들이 울분을 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인상 깊게 읽었던 재기 발랄한 그래픽 노블 '니모나'의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을 기대하고 틀었다가 남자 주인공끼리 입술을 부딪히는 장면이 나와서 식겁하여 꺼버린 적도 있다. 예상 못하고 접했던 그 장면은 아직 내게 폭력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천쉐 작가가 자신이 레즈임을 드러낸 것은 그렇게 충격적인 내용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사실일 뿐이다. 이 책 '오직 쓰기 위하여'를 쓰기 위해 작가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고군분투하며 글을 써왔는지 알게 하려면 작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간혹 등장하는 여자친구들이 인생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배제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오히려 삶의 힘듦과 고달픔을 가중시키는데 레즈비언이라서 더 힘들었을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은 언급이 없다. 아마 작가의 다른 책, 소설들에 그런 내용이 있으리라 추측해 본다.
이 책은 머리말이 80% 이상 먹어 준다. 그만큼 머리말이 잘 쓰여 있고,
본문인 1부, 2부, 3부에서 보여주는 건 결국 머리말의 확장과 변주이다.
1부 - 작가 자신이 어떻게 글을 써 왔는가
2부 - 작가가 글 써온 방법을 좀 더 도식화함.
3부 - 작가가 프리랜서로 돈 벌기 위해 견지해 온 태도, 자세
책의 제목은 '오직 쓰기 위해서' 지만
나는 이 책이 무엇이든 꿈을 가진 사람에게 도움이 되리라 여긴다. 어떤 사람이 행한 삶의 체험이 주는 감동은 지켜보는 이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 천쉐 작가의 삶에도 그런 힘이 있다.
천쉐 작가에게는 글쓰기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삶을 살면서도 어떻게든 글쓰기를 해냈다. 내게도 글 쓰고자 하는 욕망이 다른 욕망을 웃도는 것 같다. 그래서 공감을 많이 하며 읽긴 했지만, 꼭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꿈이더라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진정 시간이 없을까?
술 한잔 마실 시간이 없을까,
잠시 숨 고르며 드라마 볼 시간이 없을까,
오며 가며 책장 넘길 시간이 없을까,
짬짬이 운동할 시간이 없을까,
잠시 휴대폰을 보고 카톡을 하고 커뮤를 즐길 시간도 없을까?
게임을 하든 주색잡기를 즐기든 어떤 취미생활, 어떤 시간낭비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시간낭비가 우리가 삶을 인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악착같이 집요하게, 삶에서 중요한 것을 정하고 추구한다면,
진정 중요한 것을 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천쉐 작가의 삶을 통해 보여준 게 이 책의 가장 보배 같은 내용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30년 동안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는 작가답게 문장도 잘 쓰고 구성도 좋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읽어도 문장이 한눈에 잘 안 들어오고 답답한데 이 작가가 쓴 내용은 속독해도 내용이 쏙쏙 들어오니 이게 바로 반갑자 내공이구나 싶다.
사람마다 중요한 게 다를 수도 있다.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언제 어느 순간이든 우리가 우리에게 중요한 일에 시간을 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고, 매일 꾸준히 노력한다면 그렇지 않은 삶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지 않을까? 천쉐 작가처럼 마치 애벌레가 우화하여 나비가 되듯.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들
"자유롭다는 건 참 좋다. 하지만 나는 피아노 건반이 무한하다면 그렇게 좋은 악기가 될 수 없다고, 그저 자유롭고 호탕하게만 건반을 두드린다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시간과 체력은 한정되어 있다."
"지금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자. 열심히 써나가자. 나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을 쓰자. 그리고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소설을 뒷받침 하는 거다. 소설로 생계를 꾸릴 수 있기 전까지는 다른 일도 하고, 삶을 경험하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생활의 틈새에서도 소설 쓸 시간을 찾아낼 수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명예를 위해 글을 쓰는가, 돈을 위해 글을 쓰는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냥 쓰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내내 그렇게 소설을 썼다."
"예전에 나는 길가에 노점을 벌여놓고 거기서 글을 썼고, 배송하면서 묵어가는 모텔에서 침대 머리맡의 작은 스탠드를 켜놓고 쓰기도 했으며, 계혈석과 종유석, 커피와 같은 간식을 파는 카운터에서 글을 쓴 적도 있다."
"나는 천재가 아니며 그런 재능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글쓰기에서 가장 매혹적인 부분은, 글을 쓰기 전에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면 오랜 시간을 거쳐 다듬어진 작품이 글쓴이 자신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진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래오래 노력하다보면, 끝내는 하늘로 올라가 약간의 신력을 훔쳤다는 느낌이, 소설의 신이 더없이 귀중한 무언가를 아주 조금씩 우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