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천한 왕자가 감히

사랑을 했다?

by 닭죽

하늘에서 가로되, 무릇 세상 일 중에서,


곡식을 생산하는 일, 가축을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생명을 도축하거나 물건을 만드는 일, 병을 고치는 일이 그 다음가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학문을 연구하거나 제도와 규율을 정비하는 일은 가장 천하다 하였다.


천한 일은 응당 노예나 맡을 일이니, 노예 중에 가장 천한 자가 왕이요, 미래의 가장 천한 자 될 자가 왕자였다.

여기, 왕자로서 감히 농사꾼의 딸을 사랑한 자가 있었다. 농사란 대저 생명의 근본을 기르고 경작하고 수확함이 모두 땅의 법도와 하늘의 시간을 따르는데, 감히 왕자가 농사꾼의 딸을 엿본 것이다.


사랑의 열병에 빠져 끙끙 앓는 왕자에게 왕이 물었다.


왜 그러는 게냐. 신분에 맞지 않는 여인이라도 마음에 품은 게냐?


말해보거라. 장사꾼의 딸이냐? 아니옵니다.


갖바치의 딸이냐? 아니옵니다.


설마 백정의 딸이더냐? 아니옵니다.


하면… 왕의 안색이 점점 흐려짐이로다.


그녀는… 아니 그분은 땅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농신의 자식, 농사꾼의 딸이옵니다.


왕은 근심에 빠졌다. 왕자가 이룰 수 없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꿈꾸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니 될 말이다.


어째서 입니까?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밤을 들끓는 마음으로 지새운 왕자는 농사꾼 소녀를 만나러 갔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녀가 좋았다. 순박한 표정으로 곡식을 쓰다듬는 손마디에 옹이가 진 그녀가 좋았다. 바지를 끌어올리고 맨다리로 흙을 다지고 씨를 뿌리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가 나물을 손질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 왕자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왕자? 예서 무얼 하는 거야?


그대를 사랑합니다.


놀란 그녀를 뒤에 두고, 왕자는 도망쳤다.


왕자는 학자 중에 잔꾀를 잘 낸다고 알려진 변성자와 귀곡자를 찾았다.


잘 오셨습니다. 왕자님.


그대들이 가장 기괴하고 시답잖은 계책을 많이 낸다 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읍했다.


왕자님은 이 세상이 잘못됐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변성자가 역삼각형의 계급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위로 갈수록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은 이 구조가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전혀요. 고귀한 자들이 위에 많으니 유익함을 받는 자가 여럿이오,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면서 부담을 지는 이가 줄어드는 구조이니 아름답지 않습니까.


팍.


왕자가 역삼각형을 땅에 꽂아 넣었다.


힘을 받을수록 단단히 파고들어 흔들림 없고 안정적이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계급도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늘이 부여한 계급도가 잘못됐다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농사꾼의 딸과 사랑에 빠진 가련한 왕자로서, 선생님들의 조언을 얻으러 왔을 뿐입니다.


왕자님의 자식은요? 그 자식의 자식은요? 손자의 손자가 다시 농신의 딸과 사랑에 빠지면요? 이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면 그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입니다. 제도를 고치고 개선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고요.


그렇죠. 천하디 천한 일.


그러나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왕자님.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이 계급도를 뒤집어 버립시다.


생각이 많은 자들, 제도를 관리하는 자들, 그들이 건드려선 안 될 것이 천부의 권리를 기록한 것이 계급도였다. 그들의 생각은, 생각만으로도 벼락 맞아 타 죽을 더럽고 오염된 소리였다.


계급도를 엎자고요?


귀곡자가 역삼각형의 계급도를 거꾸로 돌려세웠다.


이렇게 가장 위에 왕이 있고, 그 아래 관리들이 있고, 그 아래 장사치들, 농사꾼들을 두는 겁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왕자는 역겨워 토할 것 같았다.


귀한 자는 한 줌에 불과하고, 진정 귀한자 들을 저렇게 짓밟고 천하게 여긴다니 이는 하늘의 법칙에 위배됩니다! 게다가 쐐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구조가 흔들림 없고 안정되려면 쐐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쐐기가 필요 없습니다. 왕자님, 우리가 더 이상 저들을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래가 넓은 구조이니 그냥 둬도 어지간하면 엎어지진 않을 것입니다. 뭐, 저 백정, 장인의 무리를 옮겨서 쐐기를 만들 수도 있고요.


귀곡자가 삼각형을 변형시켰다.

이렇게 말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삼각형의 꼭대기에서 권세를 누리는 겁니다.


권세. 입에 착 감기는 달콤한 말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가장 밑바닥의 자들이 작당한다 한들, 아무리 조직 개편의 권한을 가졌다 한들, 어떻게 천한 자가 고귀한 자가 되고 귀한 자가 천한 자가 된단 말인가.


천원지방(天圓地方) 입니다. 왕자님.


귀곡자가 요사스러운 혀를 날름거렸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납니다. 이는 하늘의 법칙이요, 땅의 근간이죠.


이 근간을 뒤흔들어 버리는 겁니다.


변성자가 요사스러운 혀를 더했다.


어떻게?


천방지원(天方地圓). 하늘은 모나고, 땅은 둥글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알게 될 때, 세상이 뒤바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방법을 캐묻던 왕자는, 아니, 왕은 잠에서 깨어났다. 요사스러운 날갯짓 같기도 하고 허물을 벗는 소리같기도 한 것이 귓가에 맴돌다가 꿈처럼 사라졌다.


흥청망청. 그날도 채홍사에서 흥청이들을 선발해 올렸다. 개중에 피부가 까만 농사꾼의 딸이 있었다.


이놈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느냐. 어느 안전이라고 저런 계집을 전하께 올려.


피부가 하얀 처녀는 씨가 말랐습니다. 나리.



그만.


왕은 벗은 발로 정전 아래로 내려갔다. 발로 흙바닥을 디뎠다.


이것이 흙의 감촉이지. 만물을 살리는 힘.


눈을 감고 햇볕을 느껴보았다.


이것은 태양의 은혜, 생명의 빛이로구나. 심장 소리가 울린다.



전하께서 또 저러신다. 꿈자리가 편치 않으셨나 보네. 놔둬. 금방 또 여자와 술을 찾으실 거야.


신하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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