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수치심 그리고 경이
수치심과 슬픔 그리고 경이
요새 앵거스 플레처 씨의 책에 푹 빠져 있습니다. 책에서 드러나는 통찰력이 좋고, 무엇보다 깨닫는 바를 제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책을 집어 들고 한 챕터를 음미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갈래를 치고 떠오릅니다. 좋은 책이니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책의 내용 중 고유 지능의 일부인 감정.
감정 중 일부인 수치심과 슬픔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경이의 감정도요.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명제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슬픔의 상태는,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라는 명제가 깨진 상태입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일 수도 있고, 처참하고 잔혹한 인간의 아수라장을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나'에게 충격을 주고 슬픔의 감정에 빠지게 합니다.
내게 상처를 주고 충격을 주는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슬픔에 빠져듭니다.
수치심의 상태는,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깨진 상태입니다.
거짓말, 옳지 않은 일, 후회되는 일, 잘못된 태도, 대처 등등으로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자부심이 엎어진 상태이죠.
객관적으로 세상이 살만한 곳인지, 내가 좋은 사람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느끼는 세상이, 내가 살만한 세상이고, 내가 나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정적 감정의 충격이 크거나 반복적이라면 슬픔과 수치심의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충격을 회피하기 위해 해리의 상태를 추구하거나 우울의 상태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뜨거운 불이 손에 닿으면 '앗 뜨거' 하며 손을 피하는 건 자연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이 상태가 오래되면 이 또한 질병의 상태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수치심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된 명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며,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깨졌기 때문에 부정적 감정이 온 것이기 때문에
단지 부정적 감정을 끊어내거나, 멀리 회피한다고 해서 긍정적 감정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며,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느끼게 되어야 회복이 됩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이 상태로 회복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과거에 잘못한 행동을 바로잡고 올바른 행동을 쌓아 가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노력으로 극복되는 상태는 사실 크게 염려할 것이 없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니다.'라고 느끼는 상태에서 회복하는 것이 진정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내 의지와 달리 세상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들은 불합리하고 나를 내버려 두지 않으니까요.
진실로 자신을 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선택의 자유가 있는 사람이 자신을 안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될 선택을 할까요?
스스로를 안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게끔 선택을 종용하는 세상의 압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 대해서,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여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앵거스 플레처는 그 답이 '경이(wonder)'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경이는 상을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여기게 한 부정적 충격들에 반대되는,
세상을 살만한 곳이라고 여기게 하는 긍정적 충격입니다.
경이는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반복하는 나에 대한 누군가의 작은 감사일 수도 있고,
매직 아워의 저녁 노을일 수도 있고, 잠시 쉬는 시간에 들리는 선율일 수도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온 내게 얼굴을 부비부비 하는 반려견, 반려묘일 수도 있겠죠.
사람들 인생만큼 느끼는 만큼 제각각일 것입니다.
제 인생에는 어떤 경이가 있었던가... 책을 그렇게 감명 깊게 읽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해 보지를 않았습니다. 글을 적고 있는 지금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첫사랑이라고 할 만한 상대가 고등학생 때 있었습니다.
간절히 원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학교 시절 육 년간 내내 그 사람의 그림자 아래 지냈습니다.
소개팅을 하거나 누군가를 사귈 때에도 내가 정말 원하던 그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있어서 오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저녁 무렵 하교 길에 언덕을 내려가면서 문득 내 마음이 참 너덜너덜해진 누더기 같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밤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마음은, 저 별빛처럼 완전무결하고 단단하고 흠집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내가 상처투성이고 누더기라 생각한 것은 그저 마음의 껍데기의 일일 뿐이니 진정한 나의 마음은 상처받지도 않고, 상처받을 수도 없으며, 고고한 자태로 그 자리에 영원할 것이다.
그러더니 정말 별빛으로 이루어진 결정 구조로 이루어진 마음 같은 것이 내 안에서 느껴졌습니다.
환상일지 몰라도 저는 그 순간 믿었습니다.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고요.
그 후로 다시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힘든 시절에 는 종종 별빛으로 이루어진 그 마음을 느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순간의 기억은 살면서 제가 겪은 제법 강렬한 '경이'의 순간이라 하겠습니다.
책에서, 목적의식을 잃고 방황하는 환자들 10명에 대한 '일기 쓰기' 치료 시도가 있었습니다. 마음챙김, 명상 등 다른 다양한 수단이 통하지 않았던 그룹이었습니다. 10명 중 한 명이 일기 쓰기를 통해 회복했습니다. 회복에 성공한 그 사람의 일기는 삶을 힘들게 한 다양한 기록으로 가득했지만 마지막 부분에는 삶이 엉망일 때 우연히 좋은 일이 일어났던 반전의 경험이 적혀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떠올린 '경이'였다고 앵거스는 해석합니다. 경이는 남에게 전할 수도, 가져올 수도 없는 자신만의 감정이며 경험입니다. 스스로 발견해야 합니다.
경이의 부분을 읽으며 저는 (제게는) 제법 재미난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고등학생 때 학교 도서관에서 최인호 작가님의 '길 없는 길'이란 소설책을 읽은 뒤 불교와 선, 깨달음과 화두에 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고승들의 깨달음의 순간을 어쩌면 '경이'의 순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스님들은 참 우울한 사람 아닙니까.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니다. 그렇게 느끼니까 깨달음을 얻기 위해 토굴에 들어가 몇 년을 보내기도 하고 속세와 연을 끊고 가족도 만들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부처님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고 천명하실 정도인데 부처님 본인이 느끼는 세상의 고통의 강도는 얼마나 어마무시했을까요. 보통 사람들은 그 정도로 느끼지는 않고 그럭저럭 그냥 대강 살아갑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그렇게 뼈저리게 느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태생적으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여기지 않던 사람들이(고승들께서)
대오각성하며 외친 오도송에는 경이의 순간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깨달음이란 결국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라는 결론이었던 게 아닐까요?
30년 동안이나 검을 찾던 나그네
몇 차례나 낙엽 지고 싹이 돋았는가
복숭아꽃을 한번 본 뒤로는
지금까지 다시는 의심치 않네.
저 복숭아꽃이 영운 선사에게 경이의 순간을 선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