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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어느 더블린 사람에 대한 일대기

by 닭죽

제임스 조이스 - 어느 더블린 사람에 대한 일대기


'더블린 사람들'의 그래픽 노블인 줄 알고 빌렸다.


그 책이 아니고 제임스 조이스 본인에 대한 일대기였다.


읽기 시작하자, 제임스 조이스라는 인물과 인생이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에, 토요일의 오전과 오후, 애들에게 복대기면서도 한 번에 몰아서 쭉 다 읽었다. 애들 뒷바라지를 도맡아 한 집사람이 한가롭게 책이나 본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라는 유명한 작품을 썼다고는 알고 있다. 그 작품에 대해 얼핏 들려오는 평을 봤을 때 나는 읽어보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재미도 못 느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번역하는 것 자체도 너무 어려운 일이라 영어 원문으로 읽어야 할 책 같은데, 내 영어 실력으로는 아이들 영어책 읽기도 갑갑하다. 영어로 읽으면 아무래도 미묘한 맛과 뉘앙스를 못 살리고 읽는 속도도 느리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흥미가 동해서 작가를 살펴보게 된다. 제인 에어를 읽고 샬롯 브론테의 일대기를 찾아보았고, 폭풍의 언덕을 읽고 에밀리 브론테의 삶을 찾아보았다. 겸사겸사 브론테 자매들의 평전도 빌려 읽었고. 인간 실격을 읽고는 다자이 오사무를 찾아보았고 스토너를 읽고 존 윌리엄스를 찾아보았고 소설은 아니지만 지방의 역설을 읽고 니나 타이숄스를 찾아보았다.


글을 읽으면 글을 쓴 사람이 보인다고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 왔다. 글을 쓰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욕망, 표현법, 시대의 배경 같은 것들... 글을 읽으면서 글쓴이에 대해 이러저러한 정보를 알게 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형태 같은 것을 어렴풋이 만들어 보게 된다. 그리고 작가의 일대기를 찾아보면서 채우지 못한 부분을 채워 본다.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호기심도 충족되고, 왜 이 작품을 썼을지도 생각해 본다.


나는 소설들이 굉장히 자전적이라고 느낀다. 소설을 쓰고 싶어서 이리저리 궁리하는 중이라 더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사람이 상상하고 쓰는 내용이 사람의 체험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거의 없다. 소설 속 세상은 결국 그 사람이 겪고 느끼고 생각한 세상을 작품 속에 끌어와 만들어 내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브론테 자매의 작품들 속에 끊임없이 나오는 여백의 낙서들처럼 환경을 가져올 수도 있고, 다자이 오사무처럼 첫사랑, 자살 시도 같은 인생에 큰 굴곡진 경험을 끌어와 구성하기도 한다.


내가 읽은 작품들이 단편이 아니라서 그랬던 걸까?

작가의 일대기를 먼저 읽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제임스 조이스가 특별한 사람이라 그런 걸까?


제임스 조이스의 일대기를 읽고 이 사람의 작품에 대해 궁금해져서 진짜 '더블린 사람들'을 읽어 보는데 앞에 실린 단편 두 개를 읽고 약간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형태와 색채가 읽히지 않는다고?


작품을 쓴 상대방, 작가의 윤곽이 보이지 않는다.


단편 자체는 디테일이 잘 살아 있고 말하고자 하는 어떤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글을 쓴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냄새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일부러 체취를 지운 것처럼 혹은 원래 냄새와 체취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욕망, 약점, 은근히 무의식 중에 보여줄 법한 그런 흔적들,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만들도록 내가 느끼는 단초들을 얻지 못한 것 같다.


단편이라서 그런 걸까? 15편을 다 읽으면 달라질까? 장편인 율리시즈를 찾아서 읽어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작가에 대한 느낌이 안 느껴지니 좀 소름 끼치고 오한이 든다.



글을 쓴 작가가 느껴지지 않는 글을 별로 안 좋아한다. 솔직하게 쓰고, 진실되게 쓴 글이라면 작가가 잘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감추려고 의식하거나 남에게 보여주거나 가르치려 쓰는 글들은 별로라고 여겼다. 그런데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은 그렇게 숨기거나 감추려고 쓴 글 같지 않다. 보여주려고 쓴 것 같은데, 보여지는 게 없는 기분이라 묘했다. 귀신을 본 것 같다.


더블린 사람들에 세 번째 실린 단편 이블린 - 이 작품은 일단 글을 쓴 배경이 이해가 되었다. 제임스 조이스가 노라와 더블린을 떠나던 장면을 그녀의 관점에서 적은 모양이다. 그런데 어디서 모티브를 따왔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은, 작가는 잘 안 느껴진다. 안개처럼 흐릿한 형체라도 느껴지는 게 아니고, 그냥 사람이 없는 텅 빈 책상만이 느껴진다.


더블린 사람들을 읽던 태블릿을 큰딸이 윌라 전자책 본다고 뺏어가서 겸사겸사 크레마에서 율리시 로 검색해 보았다. 그 유명한 작품은 어떤가 구경이나 해보자 싶었다.


아니 율리시스는 번역판이 없나? 크레마에는 온통 원서만 있다.

(인터넷 검색해 보니 최근에도 번역판이 나온 듯싶다. 도서관 가면 빌릴 수 있으려나?)


그래서 제임스 조이스의 초기작품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어 보았다. 이건 번역본이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 일대기에 나온 내용들이 여러 군데 나왔다.


파넬의 죽음을 두고 집에서 나누는 대화,


돌란 목사에게 억울하게 매를 맞은 이야기,


그리고...


읽다가 말았습니다.


흠...



제임스 조이스의 이야기에는 정보가 넘쳐흘렀다.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필름 같은 기억력을 가진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주변상황과 환경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그에 대한 주인공의 생각의 흐름이 끝없는 강물처럼 넘실대고 너울거리며 흘러간다.


물론 그 흐름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는 하지만...


아주 조용한 곳에서 집중하고 몰입하고 읽어야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까지 일부러 노력해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글을 쓰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공백처럼 느껴졌다.



대충대충 페이지를 넘기고 뒤의 해설을 읽어보니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먼저 썼다가 불태워 버린 스티븐 히어로를 새로 쓰면서 훨씬 압축한 형태라고 하는데, 압축한 것도 이렇단 말이야?



그래픽 노블 일대기에 표현된 그 삶조차 제임스 조이스 본인의 모습을 얼마나 반영한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제임스 조이스와 평생을 함께한 노라는 대체 어떤 모습을 보고 반하여 평생을 함께한 것일까.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마쳐야겠다.


다음에 기회가 오면 이어갈 기회가 있겠지..


언제 도서관에서 율리시스 번역본을 보게 되면 잠시 빌려 보기로 하자.




자면서 몇 가지 더 생각이 나서 덧붙인다.


글을 쓸 때 욕망의 자리가 있다.


작가가 말하고 싶던 것, 주장하고 싶던 것을 주장하는 자리가 있다.


이루지 못한 꿈일 수도 있고, 안타까운 현실일 수도 있고, 맺어지지 못한 사랑일 수도 있다.


하여튼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인데,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에서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고,


그가 느낀 세상의 불가해함만을 접했다.


"내가 느낀 세상은 이렇게 다양한 정보를 내게 주고 있지만, 해석의 여지가 이렇게나 많구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신의 판단, 감정, 긍정과 억울함 등의 감정을 마다하고 온전히 읽는 이에게 판단을 내맡기고 있다.



누구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표현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그의 감각과 인식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가 세상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느낀 세상, 날 것 그대로의 세상을 수저로 떠먹여 주는 듯하다.


그 맛은 먹다 체할 것 같은 맛이다.



여러 학자들이 맛있게 해석한 해설서를 읽는 게 차라리 훨씬 맛나지 않을까?


거기에는 적어도 그 학자들의 생각이 조미료처럼 얹혀 있어 맛을 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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