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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고딕 Oct 12. 2022

중세 스위스 용병 이야기,무르텐

스위스 용병에 관한 중세 역사를 간직한 스위스의 '무르텐'


스위스 용병 이야기에서 뜬금없이 정몽주의 단심가가 떠오르는 건 '스위스 용병'과 '단심가'에서 나에게 공통분모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스위스의 용병은 특히 신뢰할 수 있는 정직함과 강인함으로 유럽 용병 시장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신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스위스 용병의 이미지가 고려 시대의 충신이었던 정몽주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의 충신이었던 정몽주는 쓰러져가던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하며 당시 고려에서 변절하여 신흥 왕조인 조선에게 협력하던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신의를 지켰던 충신이다. 


당시 정몽주는 백성들의 신뢰가 두텁고 또 백성들에게 무척이나 사랑받던 관료였기 때문에 그가 조선왕조를 건립하는 데 협력하였다면 조선에서 최고의 부귀영화를 보장받을 터인데도 그는 고려 임금에게 신하로서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신흥 왕조 세력인 조선에 협력을 거부하였다.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한 그 신의의 맹세는 나라가 망할 때도 흥할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지켜졌고 그의 이런 충성스러운 마음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러들 어떠하리'라고 그의 마음을 물어보는 신흥 세력 이방원의 시구절에 백번 죽어도 자신은 변하지 않노라며 당당하게 답가로 표현되고 있다. 


근래 보기 드문 신의의 상징인 이런 멋진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나는 참 좋아하는 데 내가 만약 유명 레퍼였다면 그의 품성이 널리 널리 온 세상에 퍼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몽주가 자신의 충절을 답시로 한  '단심가'로 랩을 만들어 세상 사람들이 소리 높여 그의 시를 따라 부르게 했을 것 같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후렴구 반복)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힘센 신흥 왕조 세력 이방원이 새 왕조에 함께하자는 의미의 ‘하여가’를 먼저 읊으니 여기에 대차게 단심가로 답한 정몽주의 '신의'와 '충성심'은 단심가를 접할 때마다 나를 항상 울컥하게 만든다. 현명했던 그는 자신이 답을 하는 순간 무자비한 세력들에 의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였지만 죽음을 거부하지 않았던 그 '거침없는 신의'를 보면서 스위스 용병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명품이라고 불리는 제품은 많지만 정작 명품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적은 요즘 세상 속에서 '정몽주'와 '스위스 용병'처럼 신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본분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당신들은 진정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시대를 초월하는 사람 명품들이라고 생각한다.

  


 



스위스의 루체른은 방문하면 도시의 대표적인 기념 조형물인 '빈사의 사자상'을 방문하게 되는 데 암석을 깎아 만든 이 조형물이 사실 슬픈 스위스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스위스가 근대와 현대를 거쳐 지금처럼 잘 살기 이전에는 산악지형을 품고 있는 스위스는 농사가 불리한 환경이라 농경사회 시절에는 주변 국가들에 비해서 지금처럼 잘 사는 나라는 아니었다. 지금이야 황홀한 풍경의 멋진 알프스 환경과 호수가 최고의 관광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어 알프스의 존재 자체가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고 삶에서도 엄청난 프리미엄이 되었지만 농경사회 시절에는  스위스 알프스와 호수가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삶에 어려움이 많았고 비옥한 토지를 품은 주변국에서 생산물을 얻어야 하는 처지이기도 했다. 사실 그 시대의 스위스는 먹고사는 것이 주변국보다 어려운 처지였다. 

이런 상황이니 스위스 젊은이들은 산악지형으로 인해 발달된 심폐기능과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용병으로 해외로 나가서 싸워 돈을 벌어와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나라의 중심을 이끄는 가장의 역할을 했다. 용병 시장에서는 1315년  11월 15일 모르가르텐 전투 [Battle of Morgarten]로 스위스 연합군이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이후 스위스 연방군은 잇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용병의 뛰어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스위스 용병은 유럽의 용병 시장의 최고 비싼 몸값을 자랑하며 유럽의 용병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어려운 환경에서 비싼 몸값을 받아먹고살게 되었으니 스위스 용병은 스위스 내에서는 중요한 비중의 산업이 되었다.     


용병에 관한 일화 중 스위스 용병이 목숨을 바쳐 계약을 지키려 한 일화들이 있다. 그중 일화로 1792년 프랑스혁명 당시, 스위스 용병은 근위대로 루이 16세를 지키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을 일으킨 민병대가 티트리 궁전으로 루이 16세를 죽이려고 궁으로 들이닥쳤을 때 궁을 지키던 다른 나라의 용병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도망을 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끝까지 왕을 호위하기 위해 틸트리에 남아서 싸웠으며 근위병이었던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장렬하게 죽음을 선택하고 싸우다 전멸하였다. 


당시 프랑스 민병대는 프랑스 군인이 아닌 용병 군인들의 도망갈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주었지만 그들은 도망가지 않고 대신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다 몰살당하는 것을 택하였다. 자신의 나라의 왕도 아닌 프랑스 왕의 용병으로 스위스 용병들은 목숨을 버리면서 왕의 궁정을 끝까지 지킨 덕분에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었던 프랑스 왕가 일가족은 틸트리 궁정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Monumental painting depicting the Insurrection of 10 August 1792 출처: 빈사의 사자상 현장설명사진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그때 퇴로를 통해 도망가면 살 수 있었는데도 도망가기를 거부하고 그곳에서 죽음을 선택했는데 왜 그랬을까? 그 용병을 이끌었던 리더는 왜 그런 결정을 하였고 모든 용병들은 리더를 따라 몰살당하는 것을 선택했을까?  쓰러져 죽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내적으로 많이 힘든 그 상황이 상상이 잘 안 간다.


   그들의 그 자리에서 죽기로 결정하고 도망가지 않은 이유는 바로 먹고살기 힘든 조국의 상황에서 용병은 나라의 큰 먹거리인 데 자신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도망친다면 스위스의 다음 세대들은 앞으로 계속 용병직을 구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고 다음 세대가 계속 최고의 몸값을 받는 용병직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당시 도망치면 살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 데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목숨을 버리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싸운 것이었다. 당시 최고의 몸값을 받던 스위스 용병의 자존심을 지키고 다음 세대를 위해 엄청난 수의 프랑스 민병대 앞에서 기꺼이 죽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자신들이 맺은 계약의 신뢰를 지키고자 한 것은 바로 그들의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었다. 


당시 최고의 몸값을 받을 수 있는 해외 용병직이 아니면 살아가기 힘들 수 있는 조국의 상황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보면 당장 자기의 목숨을 구하겠다고 다른 나라의 용병들처럼 도망가 버릴 수 없었던 스위스 군인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싸우다 죽은 것이다. 


'빈사의 사자상'은 그 당시 틸트리에서 스위스 근위병으로 있었던 파이퍼 폰 알티쇼펜(Karl Pfyffer von Altishofen) 경관이 우연히 그날 휴가로 자신은 틸트리궁전에 있지 않고 루체른에 있는 집에 있던 중 목숨을 건지게 된 당시의 상황에서 틸트리에서 일어난 스위스 용병에 대한 그곳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스위스인들에게 알리고 자신의 동료이자  스위스 용병이었던 틸트리의 근위병을 기리고자 자신의 고향 루체른에 조형물을 건축하기 위해 모금 후 완공하게 되었고 이곳은 이후 스위스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징과 조형물이 되었다. 

빈사의 사자상에서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상징인 백합을 안고서 한쪽으로는 스위스 상징을 옆에 두고 아픈 듯 누워있는 사자의 모습을 보면 외국에 나가서 돈을 받고 전쟁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던 스위스 용병의 아픈 역사를 보여준다. 용병으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까지 버리면서까지 신뢰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으며 후대에게  다른 나라 용병과는 남다른 선조들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용병으로서 세계 최고의 몸값을 받았던 그들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스위스 선조들이 용병 시장에서 최고의 전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최고 위치의 용병의 자존심을 보여준 것처럼 이후 다음 세대들은  스위스가 진출한 산업 분야에서는 항상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그 선조에 그 후대인 것이 스위스 제품을 보면 세계 최고의 일류 제품을 만들어 보여준다는 스위스인들의 자존심을 볼 수 있는 데 선조들의 자존심을 후대들은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당장의 자신들의 목숨을 건지는 것보다 후대들에게 지속적인 먹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모습이 투영되서인지  빈사의 사자상을 볼 때면 왠지 그 위엄 앞에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된다.

 

무르텐은 스위스에서 이런 스위스 용병의 역사를 마을의 유산으로 가지고 있는 곳으로 마을의 이름은 ‘호숫가 요새’를 의미하는 켈트어 moriduno에서 파생되었다고 전해진다.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공영 어인 이곳은 독일어로는 무르텐(독일어: Murten) 프랑스어로는 모라(프랑스어: Morat)로 불리는 스위스 프리부르 주의 지방 도시이다.   무르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언덕 기슭의 보이는 호숫가를 따라 위치한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로 신석기 이후의 유물과 기원전 로마시대 시대의 별장과 로마 도로로 발견된 곳이다. 중세 시절 이곳 무르텐에서 벌어진 부르고뉴와의 전투에서  스위스 연합군 용병들이 크게 승리하면서 스위스 용병이 유럽에 크게 유명세를 날리게 된 계기가 된 곳이기도 하다. 

중세 시기 무르텐 지역은 여러 왕가들로 소유자가 계속 바뀌면서 도시의 부침이 심한 곳이었다. 1255년 무르텐은 사보이가의 보호를 받았다가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가 왕실 소유로 몰수했다가 다시 또 사보이가에서 1291년에 도시를 샀다가 다시 또 사보이가는 독일의 발브레이히트 1세에게 무르텐을 빼앗기게 된다. 사보이 왕가는 1310년에 도시와 주변 땅을 다시 사들이면서 다시 사보이의 통제하에 있던 중에 무르텐은 주변 스위스 도시와 동맹관계를 발전시키며 1245년에 프리부르와 조약을 맺었고, 1335년에는 베른과도 동맹 조약을 맺으면 스위스 동맹을 강화시켜나갔다.


1476년 6월 22일, 부르고뉴의 샤를 공작이 무르텐/모라 전투로 알려진 이곳에서 전쟁을 시작했을 때는 금방 무르텐을 함락시킬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스위스 군인들은 적은 군사 수를 가지고도 쉽게 투항하지 않고 무르텐 성벽 주변에서 13일 동안 버티며 주변 동맹관계의 스위스 연합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스위스 동맹군들의 도착하자 함께 부르고뉴 적의 군대를 완전히 파괴시키고 약 10,000명의 부르고뉴인이 무르텐에서 사망했고 전쟁을 승리하였다. 그 이후부터  무르텐은 매년 6월 22일에 이 승리를 축하하는 무르텐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부르고뉴 침략 당시 당시 무르텐은 수적으로도 군사물자적으로도 부르고뉴 군인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상황이라서 부르고뉴에서는 무르텐 성벽이 바로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열악한 상황의 스위스 군인들이 겁먹고 금방 항복할 것이라고 판단한 부르고뉴 샤를 공작은 죽음을 무릅쓰고 기세를 꺾지 않고 달려드는 무르텐의  스위스 군인들에게서 놀라서 한 발짝 물러섰다고 전해진다.  당시 무르텐에 1580명의 수비대만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포병으로 무장한 샤를의 군대에 대한 별 저항 없이 무르텐을 바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은 당연했을 수 있다. 

  중세의 형태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Murten 주위 성벽


부르고뉴 군대(Burgundians)는 Murten 주위에 성벽을 무너뜨리고 포격을 가하면서 전쟁을  시작했고, 지속적으로 성벽에 밀착하면서 성벽에 계속 발포하였다. 이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레시아 성벽에서 전투를 했던 것과 같은 전술이었는데 포위된 요새 주위에 대포를 설치하고, 스위스 군대를 압박하면서 물러나게 하는 방식이었다. 카를 공작부대는 스위스 연합 군대가 무르텐을 도우러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무르텐 성으로 바로 돌진하지 않고 포격에만 전념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몇 일안에 금방 끝날 것으로 예상한 무르텐에서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부르고뉴의 군인들은 스위스 연합 군대가 곧 도착할 것이라 두려움에 떨었다고 전해진다. 스위스 군대라 도착했다는 경보가 여러 번 울리고 그때마다 적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군대 전열을 정비하였지만 스위스 연합군은 그때마다 나타나지 않으면서 부르고뉴 군대의 힘을 빼면서 부르고뉴 군은 다시 진영으로 돌아오고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6월 21일, 카를 공작은 무르텐을 정찰하며 어떤 이유에서 인지 스위스 연합군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었다고 전해진다. 


그즈음 스위스 연합군 진영에서는 베른에서 6월 10일 군대 동원령을 발표했고 6월 11일에 베른 부대는 국경 지점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바로 다음 날 부르고뉴와의 충돌을 대비하였다.  6월 19일 수요일, 베른 민병대(5-6천 명)는 부르고뉴 군대의 전방 진지에서 불과 5km 떨어진 Ulmitz에 진을 쳤고 바젤 민병대와 알자스의 기병대와 같은 동맹의 민병대도 접근하기 시작했다. 스위스의 연합 군대가 속속 모여들면서 전방은 Aargau의 Hauptmann Hans von Golwill이 지휘했는데 5천 명에 정도가 모였고 후위대(nahhut)는 루체른 출신의 Hauptmann Kaspar Hartenstein이 지휘했는데. 5-6천 명의 병사들이 무장을 하고 준비하였다고 한다. 또한 취리히에서도 스위스 연합군이 도착했고 무르텐까지의 엄청나게 험난한 길에 지친 상태였지만 도착과 함께 즉시 전쟁 평의회가 소집되었고 총지휘권은 빌헬름 헤르터 폰 게르테네그에게 위임되었다고 한다. 

무르텐파노라마 사진과 글 인용 https://www.murtenpanorama.ch/en/schlacht/212.php

스위스 연합군의 정찰은 6월 22일 토요일 아침 일찍 이루어졌는데  500명의 기마 헌병과 800명의 보병이 부르고뉴의 위치로 이동하며 부르고뉴 진영에 도달했지만 포격을 받고 후퇴했으나 후퇴하면서도 부르고뉴가 건설한 장애물과 포병의 위치를 모두 파악하였다. 


스위스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부르고뉴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것이었는데 그전에 발생한 경보들이 다 잘못된 공격으로 판명 나면서 부르고뉴 군사들이 다시 발생한 경보에도 불신을 하면서 마치 늑대가 나타났다고 양치기가 그동안 거짓말하다가 정말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아무도 양치기의 말을 믿지 않았던 이야기 같은 일이 이 전쟁에서 벌어졌다.


 카를 공작은 경비원의 스위스 연합군의 공격 보고를 불신하였고 자신의 판단을 믿으며 즉시 군사 경보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서 전투에서 스위스 군대의 공격에 부르고뉴는 참패하게 된다. 무르텐의 전투는 스위스 보병의 높은 전투력을 증명하면서 그들이 지형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적절한 총기의 도움으로 적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스위스 군인들이 가진 미늘창은 스위스 용병이 전쟁에서 우위를 보일 수 있었다.


스위스 군인들은 미늘창 외에도 핼버드로 무장한 밀집 방진으로 유명했는데 당시 스위스의 각 ‘주(州) 정부(canton)’들은 백성들에게 군역을 부과했기 때문에 스위스인들은 전투에 잘 훈련되어 있었고 또한 군 장비도 갖추어져 있었다.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고 싶은 타국 군주들은 주정부에 의뢰를 하면 쉽게 용병을 사용할 수 있었다. 

스위스 군인의 특징인 장창 밀집대형 : 출처  전쟁의 역사 


스위스 군인들의 용맹함은 13세기 말경부터 시작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무르텐전투로 유럽 전역에서는 부르고뉴 왕국을 물리친 스위스 군인들의 용맹함이 더욱 퍼져 스위스 군인들은 용병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곧 유럽의 최고 몸값의 용병으로 활동하기 된 계기가 되었다. 스위스 용병들은 6미터에 달하는 미늘창으로 기사를 견제하고 할버드로 찍거나 말위에서 끌어내리는 새로운 전법으로 승리를 얻었다. 스위스 용병은 적은 수로도 항상 승리하며 전투에서 다른 용병과는 달랐다. 

 

 중세의 전술과 전술 조직이 없다고 할 정도의 시기에 스위스 군인들은 정말 제대로 된 전술 조직을 로마 군단 이후로 유럽에 보여주었고 스위스 용병들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언급하면서 프랑스 발루아 가의 왕들은 스위스인들이 없으면 제대로 군대를 꾸리지 못했을 정도라고 기록하였다. 스위스 용병으로 활동하던 젊은이들은 낙후된 고향에서는 경제적 수익을 선물하고 전술에 유능한 군인으로서의 스위스인의 자부심을 가지고 외지로 나가 싸웠다. 


1490년대까지 스위스 용병들은 용병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다. 그러나 이후 스위스 용병들을 모방한 용병부대가 나타나면서 마리냐노 전투(Battle of Marignano, 1515), 프랑스 편에서 싸운 비코카 전투(Battle of Bicocca, 1522),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 1525) 등에서 패배하면서 용병 세계에서의 일인자 자리를 내놓게 된다.   비록 최강의 자리를 내주기는 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명예를 중히 여기고 선호되는 용병들이었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틸트리 궁정에서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살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죽어가면서까지 그 자리를 지킨 스위스 용병들은 당시 독일 이태리와 함께 최고의 용병 자리를 다투고 있었으며 다른 나라 용병과는 달리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 용병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이후 중립국 등의 이유로 용병 산업을 접었지만 오늘날까지도 바티칸에서는 근위병으로 스위스인들을 고용하고 있다. 


도망가면 살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최고의 용병 자리를 지킬 수 없고 이후 후대들은 용병을 계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니 프랑스 왕과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왕을 지키다 죽기로 결심한 선조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은 죽음 이후 스위스는 유럽의 최고 잘 사는 나라로 일어서는 데 스위스가 가장 잘 사는 나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힘은 선조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지킨 신뢰와 최고의 제품에 대한 자존심이 현재의 스위스가 제작한 제품은 최고의 제품과 신뢰를 제공한다는 결의로 연결되어 있어 보인다.


선조들이 후대들을 위해 뿌린 씨앗과 또 선조들이 죽음도 불사하며 후대들을 지켜 주려 한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는 스위스인의 정신적인 단결과 결의가 지금의 세계에서 가장 살사는 나라로 스위스를 끌어올린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후대에게 어떤 빛을 비춰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사항이다.    


스위스는 유럽의 대표적인 관광국가지만 알프스의 장관과 깨끗한 자연환경을 많은 사람들의 방문하지만 도시 자체의 관광은 유럽의 유명한 도시만큼 도시 관광이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스위스의 자연환경만큼 도시 관광이 주는 묘미가 있다. 중립국이라 세계대전을 피해 갈 수 있어 중세도시 시절 구축한 성벽 등이 잘 보전되어 있는 곳들의 있고 대표적으로 무트 텐과  프리부르 주인데 프리부르는 스위스의 가장 긴 성벽이 잘 보존되어 중세의 모습이 깨끗하게 보전되어 있는 스위스 외부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중세도시이다. '무르텐'이 호수를 낀 성벽 중세도시라고 하면 근처에 있는 '프리부르'는 스위스의 가장 긴 성벽을 따라 걸으며 안전한 스위스의 중세도시에서 멋진 향취를 느낄 수 있는 도시이다. 


웬만한 중세도시를 방문해도 사실 스위스 성벽 도시들만큼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잘 보존된 중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곳도 없는 것 같다. 스위스에 살다 보니 정작 스위스 안에 있는 도시보다는 다른 나라를 방문하느라 스위스 도시들은 잘 안 가게 되는 데  정작 다른 나라의 도시를 방문하고 스위스로 다시 돌아오면서 느끼는 것은 스위스의 '무르텐'과 '프리부르'처럼  중세도시로 보전이 잘되고 깨끗하고 안전한 도시도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무르텐'과 '프리부르'가 스위스 서쪽 끝으로 합스부르크와 부르고뉴 등 프랑스와 독일의 영향을 받은 중세도시라고 하면 스위스에서 성벽이 잘 보전된 또 다른 중세도시로 동쪽 끝에 위치한 '벨린초나'는 이태리와 붙어있는 특성으로 이태리스러운 감성이 묻어나서  '무르텐'과 '프리부르'와는 다른 느낌의 성벽 도시다.  스위스 성벽 도시들은 같은 스위스이지만 중세도시의 건축물 양식과 도시의 느낌도 많이 달라 각각을 방문하는 색다른 묘미가 있다.


스위스가 알프스의 낭만만 가진 나라가 아닌 지금의 잘 사는 나라로 일어선 데에는 어떤 요소가 있는지  어떤 사건과 중요한 이벤트들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사 공부가 될 수 있다. 스위스를 여행할 것이라면  알프스의 자연도 아름답고 좋지만 중세 성벽 도시인 '무르텐' '프리부르' '벨린초나'를 방문해 보존이 잘 된 상태로 남아있는 성벽을 따라 투어를 하며 성벽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의 정신을 떠올려보며 스위스의 정신을 알고 가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될 것 같다.

화려하진 않지만 성벽을 따라 중세 감성이 묻어나는 프리부르(fribroug)의  야경

무르텐은 프리부르 주에 속해 프리부르와 가까이 위치해 중세 성벽 도시로 언뜻 도시 분위기가 비슷해 보이지만 종교적인 색채가 달라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무르텐은 신교도 기욤 파렐이 새로운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한 후 개신교를 채택했는데 보수적인 가톨릭을 채택하였던 프리부르와 갈등이 많았다. 17세기 후반에 무르텐은 베른에서 보까지, 브로이 강을 따라 무역으로 부유해졌는데 특히 스위스 용병은 외국으로 자주 나가면서 발달된 산업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부터 무역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점차 이렇게 쌓은 부로 도시를 재건하였다고 한다.

 

용병은 사라졌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현재까지 바티칸을 지키고 있는 스위스 군인 © AlLes, 출처 Pixabay
중세 성벽 도시로 성벽을  따라 오밀조밀 조성된 프리부르(fribroug)                                

부를 축적해가며 힘을 축적해 나가던 무르텐에서  목수, 자물쇠 제조공, 캐비닛 제작자가 1731년에 처음 길드를 결성했고  17세기 후반에 마을에는 벽돌 공장과 양조장이 세워졌고 에띠엔느-오비데 도몽(Etienne-Ovide Domon)이 시계 공장을 설립한 1850년대 초부터 무르텐에서 시계가 생산되기 시작하였으며, 20세기까지 정밀 공학, 전자와 식품 분야 등 무르텐에서 기업이 발전되었다.


잘 사는 나라를 여행하며 그 나라의 히스토리를 보면 그 나라의 선조들의 후대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씨를 뿌린 역사가 곳곳에 보인다. 스위스도 마찬가지로 선조들의 희생과 노고가 오늘날의 지구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만든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갑자기 선조들의 자신들을 버리고 비움 없이 지금 세대만의 힘만으로 뛰어나서 잘 살게 된 선진국이 있는지 보면 잘 사는 선진국이 된 그 씨앗은 선조들이 후대를 위해 씨를 뿌린 밑거름이 작용하며 잘 사는 나라로 발돋움하는 힘들 길러준 것들이 대 부분이다. 반면 후진국으로 갈수록 다음 세대를 위한 밑거름을 뿌릴 자원이 없다는 핑계로 지금 먹고살기도 힘들다면서 지금에만 집중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는 나라에 미래가 과연 밝을 수 있을까?  


리더들이 미래의 다음 세대보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본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하다. 전 세계의 폭력으로 이룬 독재 정권의 경우도 다음 세대의 미래보다는 불안한 자신의 상황을 보전해 줄 현재에 집중하게 되므로 나라의 발전이 더디고 국민들이 힘들 수밖에 없다. 건전한 리더와 선조들은 자신에게 집중하기보다는 다음 세대에 집중하므로 당장 지금 힘든 상황을 맞더라도 후대에는 일어설 수 있는 양분을 주어 잘 사는 나라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스위스 알프스 산악지형의 농경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변국들에 비해 먹고살기 힘들었지만 스위스 선조들은 잘 살아보기 위해 치열하게 살면서도 후대를 위해 죽음조차 의연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후대들을 더 먼저 생각하고 자신들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는 정신자세를 보여주었다. 우리 세대의 리더들과 이 세대들이여!! 스위스 용병을 보고 자신만을 채우려고 하는 욕심 대신 '버림의 미학'과 후대를 위한 '비움'을 배워보자. 


자신만을 위한 삶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고대 카르타고의 부자 시민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카르타고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자신들을 버리고 비웠던 스위스 용병의 정신은 후대에도 이어져 세계 최고의 분야를 개척해내며 현재까지도 그들의 선조들의 정신이 이어져오고 있다. 나보다 전체를 바라보며 비움과 버림의 소명의식의 중요성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배워나갔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주변국에 비해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우뚝 솟아오른 스위스의 뿌리가 무엇이었는 지 그 역사적 의미를 파악해 보면 지금 상황이 어려운 다른 나라들도 앞으로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을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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