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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고딕 Oct 13. 2022

중세여행시작지,바리고딕

영혼의 울림이 있는 바리 고딕, 바르셀로나


한국에서  스위스 제네바로 이사하는 이삿짐을 싸며 아픈 어머니와 나이 드신 아버지를 오빠에게  맡기고 비행기를 타는 내 무거운 마음은 스위스에 도착해서도 계속 버겁고 힘든 상황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을 스위스로 먼저 보내고 어머니의 회복을 보고 비행기를 타고 싶은 마음에 스위스행 비행기를 계속 미루다가 어머니의 회복을 못 본 상태에서 스위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며 내 마음속에 흐르는 눈물은 스위스에 도착해서도  계속 진행 중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딸이지만 또 한가정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이기도 하였기에  병세가  불안한 어머니의 소식이 들릴 때면 정신을 못 차리고 일상을 허우적대다가 다시 아이들의 엄마로 아내로 학생으로 스위스 생활에  적응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불안한 내 마음을 다스리려  삶에 관한 강연을 보기도 하고 또 책과 종교생활에 도움을 구하였다. 마음이란 것이 정말 마음대로 되지 않아 스스로 나 자신을 바라볼 때면 정신적으로 불안한 고통이 나를 향해 계속 폭포수처럼 퍼붓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속수무책으로 고통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런 내 답답한 상황의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내 마음을 알아준 이는 바로 오래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고대와 중세 유적지와 같은 오래된 장소들이었다. 나도 어쩌지 못하는 힘든 내 마음에 말을 걸어준 옛 유적지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 데 그 시작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바르셀로나 시작의 역사를 가진 지구 '바리 고딕(Barri Gotic)에서 나의 여행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방학이 되어 아이들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방문하게 되었다.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아름다운 건물들 속에서 멋지고 흥겨운 도시의 정취는 매력적이라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왠지 도시의 정취에 이질감을 느끼게 되어 괜히 여행을 왔나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하였다.


바다까지 끼고 있는 해양도시라 육지와 바다를 망라하여 재미있는 놀 거리와 맛있는 먹거리도 풍부하니 신나 하는 가족들의 흥을 깰 수도 없고 왜 나는 이 상황을 즐기지 못하나 그저 답답한 심정이었다. 


병마와 싸우시는 아픈 어머니를 두고 재미있는 일상을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우울해졌다가 다시 마음을 잡고  내가 행복한 에너지를 만들어 그 행복에너지가 아픈 어머니에게 전달되게 하리라. 하지만 행복한 일상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나 자신을 초라하고 힘들게 붙들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도착한 지 이틀째 날 마음이 복잡한 상태에서 저녁 늦게  바리 고딕 지구를 방문하였을 때 그때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그곳에서  내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받은 것 같은 따뜻한 순간이 있었는 데 오랜 장소와 내가 교류하면서 그 장소가 주는  메시지를 통해 내가 받게 된 편안한 감정이 있었다.  또 그런 상호작용을 통해 그곳의 공간과 내가  오래된 친구처럼 느끼게 된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 경험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나의 인생 이야기를 해봐도 아이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세상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이가 지긋한 인자한 현자에게 내 삶의 고통을 얘기했을 때 그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는 듯한  인자한 미소를 나에게 보내주는 것 같은 그런 경험이었다.  



마음과 장소의 공감


Plaça Sant Felip Neri 


이곳은 중세 시대에는 길드 모임의 중심지로 당시 중세 산업의 핵심 기능을 담당하던 장소였지만 이후에는  스페인 내전으로 1938년 1월 30일 어린 초등학생과 선생님 42명이 폭격으로 쓰러져 숨진 바르셀로나의 아픈 기억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숨진 아이들이 다니던 이곳의 학교는 보수를 거쳐 지금도 여전히 학교이지만 주변 성당과 벽 등의 건물에서는 당시 스페인 내전에서 공중 발포한 폭격의 흔적들이  벽면에 흉터로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성당의 벽면과 폭격의 상흔은 전쟁의 참혹한 흔적을 도시 재건사업으로 지우기보다는 후대에게 교훈 등의 차원에서 보존하는 쪽으로 의사 결정되어 도시를 재건할 때 당시 폭격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8 각형의 예쁜 분수가 학교를 바라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이 공간에서 과거 일어났던 사건들을  떠올려보며 과거와의 접속을 시도해 본다.  


이 장소에서 중세 길드의 신발 제조 길드 모임 등이 만들어지고  중세 상공업자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학교 옆 성당에서 가우디가 기도하고 나와서 산책을 하는 모습이 매일 반복이 되고 있다. 가우디가 이곳을 참 사랑했구나 생각하며 흐뭇하게 바라보는 순간 다시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에서는 전쟁의 처참한 폭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 아이들의 몸도 마음도 처참하게 부서지는 비참한 이곳의 아픈 광경들 그 아이들은 그저 학교에서 공부하려고 이곳에 와서 공부하다가 쉬는 시간에는 천진하게 뛰어놀던 그저  아이들일 뿐인데 놀이한다고 이곳저곳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일 뿐인데. 자신이 왜 폭격에 숨져야 하는지도 모고 죽음을 맞이했던 어린 영혼들, 이  어린아이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누구를 위해서 왜 이곳을 폭격하고 아픈 상처들을 이곳에 남겨야 했나. 시간이 흐른 후에 이곳에서 벌어진 그 폭력들은 정당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  


이곳을 바라보고만 있는 나도 이렇게 마음이 안타까운데 고통스럽게 죽었던 이곳 아이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그들의 죽음 앞에서 남은 그 가족들은 또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은 가족들은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었겠구나.  이 공간이 품고 있었던 가슴 아픈 메시지들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 도시의 흥겨운 기운에서 나는 편안하지 못했는데,  이 공간의 메시지들은 나의 영혼을 편안하게 감싸 안아주었다. 이 도시에서 내가 기댈 곳이 없었는데 기대하지 않게 자신들의 고통을 오랜 세월 동안 감싸 안고 있던 이 공간의 오랜 메시지들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다고 느끼는 순간에 내 마음에 쌓여있었던 눈물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동안 참 많이 울고 싶었는데 속으로 누르고 참았던 눈물이 이곳에서 더 참지 못하고 밖으로 터져 나와 버렸다. 에너지가 넘치는 밝은 분위기의 흥이 많은 이 도시는 도무지 나에게 관심도 없어 보였는데 특이하게도 이 공간은 내 아픈 상처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 같았고, 귓가로 들리는 버스킹 음색 하나하나가 나를 정조준해 달려오는 것처럼 내 영혼 깊숙이 음악적인 울림까지 주었다. 


폭격의 잔해가 남아 있는 성당 근처에서의 버스킹



그곳의 공간은 나처럼 마음이 아픈 사람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의 깊이가 있었고 나는 그 공간이 나를 반겨준다는 생각이 들면서 공간의 기운과 나는 친해질 수 있었다. 이곳은 또한 바르셀로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가우디가 매일 기도하고 산책했던 곳으로 가우디가 숨지는 날에도 이곳에서 기도하고 사그리다 성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실제로 가우디는 바르셀로나가 고딕 지구에서 점차 도시가 확장돼가면서 액샴플레를 새롭게 개발하는 과정에서 여러 획기적인 창의적인 건축물을 많이 만들었는데 신도시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계속 만들 때에도 바로 이곳  고딕 지구의 건축물들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이곳 공간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와 분위기도 마음에 들고 또 바르셀로나의 상징인 가우디가 이곳에서 어떤 기운을 받아 멋진 건축물을 세상에 선사할 수 있었는지 느껴보려고 그가 매일 고딕 지구로 와서 성당에서 기도하고 걸었던 길을 따라서 걸어보았다.


검소한 생활을 한 가우디는 사고가 나서 거리에 쓰러진 날에도 허름한 옷차림 이어서  부랑자가 거리에 쓰러져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오인하여 바로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지 못하고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가우디가 산책 후 성당에서 돌아와야 할 시간인데도 그가 귀가하지 않자 그를 걱정한 사람들이 가우디가 산책하던 길을 따라 그를 찾아 나선 후에야 길에서 쓰러진 그를 발견하고 가우디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가우디가 이곳에서 산책하며 1926년 6월 10일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약 12년 후에 이곳은  전쟁의 공중폭격으로 악몽의 장소가 돼버린다. 

 

 여행 후에 별 기억이 안 남고 바로 기억에서 지워지는 장소가 있는 반면 기억이 진하게 남아 마음의 여운을 크게 남기는 여행 지도 있다. 기억에 진하게 남는 곳은 인생 여행지가 될 텐데 사실 세어보면 몇 개가 안될 것 같다. 풍경이 멋있거나 한 곳은 눈이 즐겁고 액티비티가 신났던 곳은 몸이 즐겁다. 눈과 몸이 즐거운 곳은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지만 그래도 오래 기억이 남고 진한 여운이 남는 곳은 내 경우에는 영혼의 울림이 있는 곳이었다.


영혼의 울림이 있는 그런 여행지가 있었나? 일반적인 경우에 어쩌면 하나도 없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여행지에서 내 눈과 귀가 즐거웠던 기억은  나의 표피세포로 감각이 전달되고 말초 감각이 세포 속에 잠시 있다가 빠져나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영혼을 건드려 잠들어 있던 영혼에 종소리를 땅땅 울리는 그 기억은 내 감각세포를 뚫어버리면서 마음속 깊이 박혀버리는 데 감각세포만 살짝 건드렸던 다른 경험과 비교가 되겠는가? 


영혼을 건드린 여행지의 기억은 아마도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내 뇌 속의 기억들이 짧게 압축되어  내 인생 파노라마가 마지막 영상으로 나에게 보여줄 때 등장할 수 있는 곳이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 만나게 될 나의 스토리 영상에까지 등장할 정도의 장소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에서 쉽지 않을 것이다. 


내 마지막 스토리에 보이는 내 인생의 중요한 장면에서 무엇이 등장할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 중요한 장면에서 물건만 등장한다면 내 인생이 비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 중요한 요소가 고작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면 내 인생은 무엇이었나 허탈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마지막 길을 가는 나에게는 물건들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내가 바라는 마지막 나의 영상은 지구라는 여행지에서 만난 나의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행복한 에너지를 전해주고자 노력했었던 내 모습이 마지막 영상으로 상영되길 원한다.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가끔 좋은 여행지를 내 영혼에 선물도 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했던 좋은 추억들 이런 영상은 내 영혼을 풍성하게 하려 한 삶의 여유와 노력들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이다. 마지막 순간 아름다운 추억들을 가슴에 품고 떠날 수는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귀중한 물건이라도 가슴에 품고 떠나갈 수 없지만 아름다운 추억은 가슴에 담고 갈 수 있다. 


 '그래 살면서 힘든 순간도 있었고 때로는 내가 잘못 생각한 일도 있었고 후회되는 것도 있었지만 힘든 순간에 나에게 손 내밀어 준 좋은 사람들도 있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래도 정의로운 길로 가려고 비틀거리면서 여기까지 왔다. 마음고생도 많았지만 모든 순간순간 감사하게 생각했고 그래 전체적으로는 난 괜찮은 사람으로 살았어' 그런 자막이 쓰인 내 인생의 마지막 영상을 인생의 마지막 날에 보고 싶다.  

 

여행 후 집으로 돌아온 후 Plaça Sant Felip Neri를 생각하면 그 공간에서의 울림이 나에게 유독 왜 그렇게 컸을까 생각하면 그곳에서의 버스킹도 한몫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곳에서도 버스킹을 많이 접하였지만 바르셀로나의 고딕 지구에서만큼 소리의 울림이 나에게 크게 와닿은 곳이 없었던 것 같다.


단순히 그곳의 가수들이 유난히 가창력이 더 뛰어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바리 고딕 지구를 분석한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았는데 로마시대의 구획 안에 건축된 오래된 건축양식으로 일반적인 건물들과 달리 벽 사이의 공간이 높고 빽빽하게 붙어있어 그 공간의 특성 등으로 인해 소리가 오래 머물면서 주변으로 퍼질 때는 좀 더 특색 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는 대체적인 고딕 지구의  분석글들에게 나도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왜 그렇게 나에게 그곳의 메시지들의 울림이 컸는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그곳의 공간의 특성으로 인해 버스킹의 소리 울림도 남달랐고 그래서인지 나에게 영혼의 울림이 남달랐던 공간이었다. 


로마제국 시대의 작은 식민도시로 파벤티아 (Faventia) 라 불리며 로마의 도시구획 형태로 만들어졌던 바르셀로나는 2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딕 지구 옆의 지금의 바르셀로네타 항구를 통해 해외로 영토 확대를 하면서 아라곤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한 세력으로 바르셀로나에서 아테네에 이르는 지중해를 지배하며 세력을 키워나가고 해상무역을 통해 도시가 점점 더 발전하면서 고딕 지구를 중심으로 중세 도시의 항구도시로 성장해 갔다. 



돈 많은 상인과 귀족들은 고딕 지구를 로마시대의 구획 안에서 당시 유행하던 건축기법을 동원하여 로마네스크 양식과 이후 르네상스 양식 등 다양한 혼합된 최신 양식을 도입하여 중세 건물들로 채웠다. 


이 시기의 발전 형태를 볼 수 있는 유적은 Plaça del Rei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딕 지구(Barri Gòtic)는 이 시대의 중심지였으며 콜럼버스는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대서양으로 확대시키려는 연합세력들과 이사벨 여왕의 지원으로 아메리카 신대륙을 개척할 수 있었다. 


이사벨 여왕은 15세기 카탈루냐를 통치하는 아라곤 연합왕국과 카스티야 연합왕국 사이에 통일 왕조 시대를 열고 해상무역 최대 강국의  위치를 확보하고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전성기를 계속 유지하기가 힘든 것은 모든 제국과 왕조, 인생사에만 해당되는 것이랴? 도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전성기를 지나가는 데 바르셀로나는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화에 따른 지중해 무역이 감소하면서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의 경제적 영향력도 약화되어간다. 


고딕 지구를 중 1289년에 시작해 15세기 말에 완공된 고딕 양식의 성당을 중심으로 주변을 보며 거리의 버스킹을 듣기 위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걷기를 반복하면서 산티아고의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처럼 도시 안에서 생각하고 걷기를 반복하였다. 



Plaça del Rei


지하에 바르셀로나 역사를 볼 수 있는 역사박물관이 위치한 이곳은 콜럼버스가 신대륙 항해 이후  원주민과 함께 이곳에서 자신의 항해의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을 당당하게 문으로 입장하며 만난 장소이다. 당시는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의 인기로 서양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시기였는 데, 대서양 건너편에는 머리카락과 눈 색깔이 이곳과 다른 사람들이 산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해하던 시절이었다. 책에서만 보고 구두로 전해져 오던 믿지 못하던 이방인의 이야기를 이곳에서 직접 현실에서 보여주며 원주민까지 대동하고 나타난 콜럼버스를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쳐다봤을지 모습이 상상이 간다.

  

콜럼버스가 항해 후 원주민을 대동하고 이사벨 여왕을 만난 계단


당시 지중해 교역의 한계로 더 큰 세계로 교역대상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시대였고 아라곤 연합왕국 이룬 이사벨 여왕의 지원으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항해에 성공한 이후 아마도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어 원주민을 직접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었을지 상상해 본다. 


당시 대서양 항해는 지금의 우주 탐사 같은 개념이라 발전한 선진국의 전유물이었던 대서양 항해를 도전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거기다 심지어 콜럼버스가  외계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데리고 이 광장에 늠름하게 척 나타났으니 당시 사람들이 놀라서 눈이 얼마나 휘둥그레졌을지 또 이사벨 여왕은 처음 만나는 원주민의 모습과 행동에 어떤 반응이었을지 상상만 해도 재미있다.


고딕 지구와 연결되어 당시 해상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던 지금의 바르셀로네타 해변에는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개척하러 나갔던 큰 꿈의 높이만큼 높게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해상교역의 영향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Felip Neri 주변으로 상인 협동조합인 길드를 조성해 활동하였고 현재의 피카소 박물관 주변으로 귀족들이 집이 고딕 지구에 몰려있었으니 당시 귀족들의 삶을 보고 싶어 피카소 미술관과 주변을 방문하여 당시 귀족들과 부자들의 집을 둘러보며 좁은 골목을 따라 중세 부자 상인의 발걸음처럼 빠르게 걸어보았다. 

 


해상강국의 패권을 쥐고 위엄을 떨치던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 축소로 인한 해상강국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바르셀로나도 그 위상이 축소되게 되고 쿠바마저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이탈하자 조금씩 해상무역 강대국의 위상이 줄어들게 된다. 이후 스페인은 나라 안에서 좌우 이념 대립으로 분열과 혼란이 지속되면서 불안한 사회 양상을 보이고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좌파 공화 정권이 집권하게 된다.  


이때 군부는 식민지가 줄어들면서 군부의 통치 지역이 줄어들고 입지가 좁아져 불만이 커나가다가 좌파 공화정이 집권하자 그동안의 불만을 터뜨리며 우파정권인 프랑코가 군사 반란을 일으켜 성공하게 된다. 스페인 내부의 좌우 이념 대립과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벌어진 스페인 내부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나라밖에서는 독일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군부정권인 프랑코 정부를 도우며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실제 독일의 전투기는 프랑코를 도우며 스페인 내전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프랑코의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당시 고딕 지구에 주로 거주하며 좌파정권을 지지하던 상공업자들과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폭격이 감행되었고 이런 과정에서 죄 없는 어린아이들도 그 자리에서 몰살당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이념 대립 등 불안한 국내외 정세 시기에 발생한 이념 대립 형태의 내전은 스페인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몇 군데가 더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스페인 내전과 비슷한 형태로 남한과 북한 간의 이념 전쟁이 있었기에 이 역사의 장소는 더욱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 비극적인 역사는 스페인에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나의 조국에서도 동일하게 평행이론처럼 같은 형태의 전쟁이 벌어졌고 남한과 북한의 전쟁을 훗날 역사가들은 미국과 러시아 간의 대립으로 대표되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대표적인 이념전쟁으로 부르고 있으며, 이후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그 전쟁부터 남과 북으로 나눠져 그 분단의 비극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유일한 전 세계의  분단국가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주요한 국가들에서는 스페인 내전에 국가적으로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스페인 내전은 형식적으로는 내전이었으나, 실제로는 나치와 무솔리니 정권이 프랑코 정권을 지원하였고 반대편에서는 공산주의의 좌파정권을 지지한 소련이 있어 내전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부분이 있었고  주변 국가에서의 민간인 참여 등으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코 측에서 쏟아부은 폭탄 파편을 보고 있으니 역사가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고 현명한 역사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역사 또한 계속 반복되고 있으니 히틀러 같은 리더가 다시 지구상에서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고 이후 세대에게도 역사적으로 아픔을 주는 이런 역사가 또다시 계속 반복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의 남북전쟁에서처럼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서처럼 이데올로기로 인해 서로 죽이고 하는 그런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곳의 카탈루냐 사람들은 카탈루냐의 전통을 사랑하고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는데 가우디도 카탈루냐인의 자부심과 카탈루냐의 전통을 신도시 건설 시 반영할 정도로 이곳 전통을 사랑한 사람으로 수많은 명소에 카탈루냐의 혼이 들어간 건축물을 남겼는데 이념 시대에는 카탈루냐 언어를 사용한다고 총살까지 당했다고 하니 당시에 이념과 일방적인 문화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나와 사상이 다르면 상대방이 죽어야 한다는 생각도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는 것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고 다음 세대들과 후대 역사가들이  역사적인 사건들을 평가할 때도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처럼 전쟁의 당위성을 부여해 줄지 깊이 성찰하였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한 나라의 통치자들은 당장의 이익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우리 세대 이후의 다음 세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특히 전쟁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 다음 세대에게 전쟁의 짐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주변의 이익이나 당장 보이는 이익을 물리치고 이후의 다음 세대까지 생각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데 현대는 알렉산드로스 시대나 나폴레옹 시대처럼 전쟁을 직접 하는 나라에만 전쟁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닌 지구상의 전체 나라가 전쟁의 영향을 받게 되니 전쟁을 일으켜 시대의 영웅이 되었던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은 현대전에서는 나올 수 없다. 


전쟁은 일으키는 것은 어느 국가라도 의사 결정할 수 있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전쟁을 일으킨 사람의 의도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군인들 간의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제어가 힘들어 군인들이 사실상 미치광이가 되어도 사실상 방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스페인 내전처럼 전쟁이 내전의 형태로 시작되어도 점차 주변국들이 이권에 따라 개입하고 강대국이 전쟁 참여하게 되면 전쟁을 일으킨 당시와는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기 마련이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쟁터는 현대전일수록 큰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고 그야말로 송두리째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어쩌면 이 지구상에 사는 인류 전체의 멸망까지도 의도치 않게 갈 수 있는 공포가 실제 현실이 될 수 있다.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고 확산될지 아무로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될 수 있으니 지구상의 모든 전쟁은 확대되는 것을 막는 것이 인류에게는 최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화와 이해와 이해당사자 간의 양보가 국가 간에도 또 나라 안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오래된 마을이나 도시는 다양한 스토리를 품고 있다. 현재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와 때로는 지금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오래된 건물과 유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그곳에서 본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나이가 무척이나 오래된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았던 이야기와 지혜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수백 년 전에도 그 자리에서 존재하였던 그들을 통해 나 역시 예전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지켜본 것들을 유추해 볼 수 있으니 오랜 유적들과 함께 옛터에 서서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나도 바라보면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항상 드는 것은 역사의 흐름 있는 그들의 지혜에 내가 압도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나에게 보이는 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옛 유적이 있는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이 겪었던 이야기들을 그 당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면  그동안 내가 바라보던 것들이 어쩌면 좁고 편중된 시선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바라보던 시선을 벗어나 세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내 영혼에게 의미가 있는 좋을 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고대와 중세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여행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오래된 도시나 마을을 방문하게 되면 제일 먼저 그 도시의 뿌리가 어디인지 도시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부터 찾아보게 된다. 그 도시의 기원이 되는 역사의 뿌리를 알기 위해 도시의 가장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을 찾아가 그 당시 사람들이 바라보았던 시선으로 그들의 생각을 읽어보게 되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였던 사람들이나 사물들에게 공감하면서 그들이 만들었던 작품과 건축물을 만져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것들을 내 여행의 여정들에 죽 기록해 보려 한다.     


특히 오래된 유산을 의미 있는 형태로 간직하고 있는 고대와 중세 유적지를 방문하게 되면 오랜 유산들이 품고 있는 여러 역사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데 그 이야기들을 마주할 때는 마치 나에게 소중히 간직되고 있는 오래된 물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간직하는 오랜 물건들은 그것이 값비싼 보석도 아니고 보잘것없어 보이고 낡고 빛바랜 물건이라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들에는 나의 이야기와 그리고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추억 메시지가 담겨있어 나에게는 소중한 것들이다.  


큰 아들이 돌 무렵 걸음마 연습할 때 신었던 아기 신발을 간직하고 있는 데 큰 아이가 그 신발을 신은 지 16년이 지났고 다시 사용할 일도 없고 남에게 사용하라고 주기에도 낡고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보물 같은 것이다. 아기용 그 신발은 큰애와 작은 아이가 첫걸음 떼고 걸음마하던 그 순간을 함께하였고 그 순간은 내 일생의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그 작은 신발에는 엄마라고도 아직 못 부르는 조그만 아이를 뒤로하고 아침 일찍 출근하며 걱정스럽게 어린아이를 뒤돌아보며 현관문을 닫고 나가던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 있고 또  딸의 아이를 돌보아 주시며 언제나 힘든 내색 없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힘든 육아를 표현해 주었던 사랑 많으셨던 나의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있다. 또 퇴근한 딸이 쉬지도 못하고 저녁에 아이를 목욕시키는 것이 안쓰러워 땀을 흘려가면서 저녁시간에 아이를 목욕시키시고 구부정한 허리를 펴시며 손주를 안고 나오시던 내 아버지의 모습이 그 신발에 오롯이 담겨 있다. 


내 마음의 아픈 상처와 함께 이 여행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내가 여행지에서 공감하며 위로를 받았던 나의 여행 경험이 이 세상을 함께 살아나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로로 전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조금 더 넓어지면 좋을 것 같다. 


지금의 주어진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항상 살아가기를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특히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이 글들이 어떤 형태로 다가가든 조금이라도 위안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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