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산골 교회에 가득한 당대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프랑스 샤모니를 방문하기 위해 중간에 쉬어가거나 혹은 겨울철에 스키를 타기 위해 이곳 스키장을 방문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될 조용한 마을 Passy. 작은 마을이거나 큰 도시거나 유럽의 도시나 작은 마을일지라도 마을을 상징하는 성당이나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발전해 왔던 터라 잘 모르는 곳에 들릴 때에도 마을의 종교 관련 건축물이나 바실리카를 꼭 찾아가 보곤 한다.
그런 차원에서 예외 없이 작은 마을에 비교적 규모가 커 보이는 눈에 띄는 교회로 들어가 보았다.
의외의 낯선 풍경. 모조품들인가 교회에 모사품을 갖다 두었을 리는 없을 텐데. 분명 유명작가들의 작품들이 외지고 방문자도 많지 많은 산골 작은 마을에 가득 있는 것이 신기할 노릇이다. 거기다 저렇게 유명한 작품들이 가득하면 경비하는 사람도 많아야 할 텐데 관리하는 사람들은 있는 것일까?
여러모로 이해가 가지 않는 교회와 작품들 이곳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마티스와 샤갈 등 굳이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듯한 미술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유명인사들의 작품에 눈이 즐겁긴 하지만 정말 그들이 작품이 맞나 하는 의심이 계속 드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저런 유명작가들의 작품은 사람들이 많이 다시는 유명도시의 멋들어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어야 할 텐데 한두 명의 작가의 작품도 아닌 다수 유명예술인들의 작품들 이곳에 모여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프랑스의 외곽의 조용한 산골마을에 당대 최고라 칭송받았던 작가들의 작품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식을 거부하고 궁금함과 함께 그야말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들의 존재로 인한 반전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비밀의 열쇠를 풀기 위해 노력을 해보면 이곳의 가이드와 안내서를 통해 이 산골 교회가 1926 년에서 1937 년 사이에 이곳에서 거주하던 결핵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위한 요양소를 바라보며 지어졌다는 힌트가 주어질 것입니다. 아픈 환자들을 위한 교회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그 해답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초 교회의 건축은 이곳을 돌보는 도미니키 신부의 요청에 의해서 Maurice Novarina에게 맡겨져 건축되었습니다. 교회는 1950 세기 신성한 예술적 감흥의 힘들을 빌어서 도시와 떨어져 외롭게 이곳에서 병치료를 하기 위해 거주하는 이들을 위해 산 중턱에 건축될 이곳 교회에 예술영감을 불어넣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시 미술관도 아니고 유명전시장도 아닌 방문자도 별로 없는 이곳에 외롭게 투병하는 병자들과 그들을 돌보아주는 이를 위로하기 위한 예술적인 도움의 손길은 이곳 교회를 아름 다운 작품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면서 이곳을 장식하는 장식물에는 당대 가장 위대한 현대 예술가들의 서명이 있습니다.
교회장식물을 제공하고 기부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혹은 정치적인 신념이 교회의 정신과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술참여자들은 웬일인지 사상이 다를 수 있는 이념들을 고려하지 않고 이곳을 장식하는 데 기꺼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였습니다. 당대의 최고라고 칭송받았던 예술가들은 자신의 참여는 물론 당시 가장 위대하다고 이름 불려지던 주변 예술가를 이곳의 기부 대열에 함께 설 수 있도록 적극 초대했습니다.
결핵환자들을 위한 교회건축과 예술가들의 열정적인 참여이야기는 이곳 고원의 이름인 Assy의 이름을 따서 "LA LECON D'ASSY"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핵환자들과 그들을 돌보기 위해 이곳 산골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작품의 관람자로 지정하여 봉헌된 작품을 위해 참여한 예술가 중에는 Bazaine, Bonnard, Braque, Chagall, Couturier, Kijno, Léger, Lipchitz, Lurçat, Mary, Matisse, Richier, Rouault, Signori, Strawinsky가 있습니다.
해발 1,000m에서 1,300m 사이에 위치한 Assy 고원에 이곳의 공기는 깨끗하고 건조하여 결핵 치료에 이상적인 조건이어서 Praz-Coutant 요양소가 1926년에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요양원의 목사인 Canon Jean Devémy는 병자와 간병인 및 그 가족을 위한 교회를 건설하여 고심하였고 이를 위해 젊은 건축가 Maurice Novarina가 선정되었습니다.
교회 장식을 위해 Jean Devémy 신부는 Passy의 이웃동네 Sallanches의 목사로 알려진 Marie-Alain Couturier를 시작으로 예술인들의 참여를 요청했습니다. 외진 고원의 요양원은 도시에서 온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고, 도시에서 생활하다 이곳 결핵요양원으로 이동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성격의 참여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교회건축물의 기부형태보다 대담할 형태일 수 있었다"라고 문화해설자인 앤 토베 (Anne Tobé)는 말합니다.
조르주 루오 (Georges Rouault)는 그리스도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주제를 바탕으로 1948년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처음으로 제공했습니다. 그의 참여 이후 이 행렬에 참여하는 예술가는 계속 뒤따랐습니다. Braque가 조각한 성막 장식물이 채워지고 Bonnard는 병자를 방문하는 Saint Francis de Sales를 그려서 헌사하였습니다.
Jean Lurçat는 합창단을 장식하는 태피스트리를 디자인했으며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는 정면에 마리아 모자이크 장식물에 그의 서명을 추가합니다. 예술가들의 작품의 설치는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고라도 칭송받았던 당대의 예술가들을 이 외로운 산골에 그들의 독창적인 작품들로 채우게 하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곳에, 예술적 지위에서 최고자리를 다투며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던 독립적이고 혁신적인 예술가들을 작은 산골 이곳에 한데 모은 것의 그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이 "이곳이 주는 교훈"입니다. 예술적인 영감으로 이념이나 기타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초월한다는 초기 정신이 깔린 듯한 건축가이드라인을 지키며 교회 건축 시 교회에 참여한 예술가에게 그들의 종교가 기독교인지 아닌 지 그들이 불신자인지,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와 장 루르사(Jean Lurçat)와 같은 공산주의자인지, 샤갈(Chagall)이나 립시츠(Lipchitz)와 같은 유대교 신앙인지를 묻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마리 알랭 꾸뛰리에(Marie-Alain Couturier)는 이 현상에 대해서 알듯 모를 듯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모든 진정한 예술가는 영감을 받습니다. 이미 본성적으로, 예술가의 기질에 의해, 그의 영적 직관에".
설립초기 종교와 이념을 초원한 이곳에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 헌사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이후에 이곳은 기독교 근본주의에 관한 논쟁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불분명 한 얼굴 특징을 가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표현에 정당성이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곳에 참여한 예술가중 참여자의 경력과 이념을 문제 삼아 이곳은 작품들의 정당성이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곳의 작품들에 대한 논쟁의 대해서 바티칸 공의회는 창립자들의 직관을 지지했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도 이곳의 교회가 더 이상 논쟁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곳에 거주한 외로운 환자들의 고통을 이곳에 헌정된 작품들이 함께 해주었다는 이유로도 논쟁이전에 기독교의 사랑의 실천이 행해졌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이념에 관한 것이라 보는 시각에 따라서 생각의 다름이 있을 수 있으니 그런 것은 논외로 하기로 하였으면 합니다.
도시 외곽에 세외진 교회가 기존 교회건축과는 다른 과감한 방식의 적극적 예술 참여 형태의 건축으로 새로운 교회 건축의 모습을 구현한 이곳 교회의 모습은 이곳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부 예술가들의 이념과 정치색으로 인해 공격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기존 교회 건축의 관행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이곳에 머물고 치료를 받던 병자와 의료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자 한 최초 건축자의 의도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습니다.
기존 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하는 체제에 반하는 안티테제는 언제나 논란과 공격대상이 아닌 때가 없었지만 이곳 예술작품으로 종교건축물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상에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접근은 우리들에게 자신이 가진 사고의 틀의 한계를 확장시켜 주고 있다.
처음 이곳에 우연히 몽블랑 전경을 찾아 방문한 이후 이 산골 교회의 미스터리 한 풍경이 내 주변인들의 관심사가 되기도 하였다. 몇 명은 직접 방문하여 이곳의 현장을 확인하였지만 설마 이렇게 큰 명성을 가진 유명 예술가들이 찾는 이도 별로 없는 한적인 고원에 왜??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곳에 존재하는 예술품에 대한 진위여부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기도 하고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 어리 둥절 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이곳의 작품은 아마 모조작품일 것이다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위조품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도대체 방문자도 별로 없는 이런 곳에 저런 내로라하는 예술품들이 가득하다는 게 이해가 되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유명예술가들의 모조품을 가득 갖다 둔 것도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곳의 작품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파헤쳐봐야겠다 싶어서 여러 번 다시 이곳을 방문하고 안내자에게도 이곳의 사항을 확인하고 기록물을 찾아가고 이곳에 관해서 스터디하면서 이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해 나가며 이곳을 알아나갔다. 내가 발견한 이곳의 반전 매력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곳 이야기를 찾아내가면서 교회의 입구에 서서 내부를 서서히 바라보면서 교회 설립자의 입장에서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곳에 작품을 헌사한 입장에서 이곳을 바라보기도 하고 또 이곳에서 환자의 눈으로 이곳을 다시 바라보면서 이곳의 반전의 매력에 깊이 빠져봅니다.
이곳의 예술작품은 매우 아름답지만 그보다는 차 한 대가 간신히 올라갈 수 있을 듯 비틀비틀한 길을 올라 마주한 산중턱의 고요한 고원의 생소한 프랑스 마을에 상상이나 했을 까. 고즈넉한 모습을 예상하고 문을 열어 들어간 곳에 이런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 정말 예상치 못했었다. 미리 얘기라도 듣고 갔다면 크게 놀라지도 않았을 텐데.
그날의 선명한 기억으로 이곳의 이야기를 파헤쳐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초기 교회 건축 시 예술적 기운을 가득 담은 교회를 건축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유명인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상상하진 못했을 것 같고 신인작가들도 아니고 이미 유명인의 궤도에 오른 유명인들이 사람들도 방문하지 않을 결핵환자들의 교회에 자신의 작품을 헌정하는 결정도 스스로에게 쉽지 않았을 듯한데 그 결과는 반전이지만 이곳의 건축 과정은 가히 기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건축가와 예술참여자뿐 아니고 이곳의 환자들도 놀랐을 것이다. 설마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지 않았을까?
그 어떤 유명작품도 이곳의 위치한 예술품의 반전의 미와 견주기 벅찰 것 같다. 이런 것을 만들어 낸 힘이 세상을 좀 더 좋은 인간미가 있는 좋은 에너지로 웅축되어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의 빛 같은 존재로 남으리라고 기대해 본다.
Passy 마을의 아름다운 몽블랑의 전경과 이곳 고원의 쾌적한 공기 그리고 산꼭대기 샬레의 정감 어린 주변풍경과 맛깔 있는 메뉴는 이곳의 좋은 에너지를 받아서 그 에너지들이 나의 온몸으로 퍼지는 데 부 가서비스를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