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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고딕 Oct 17. 2023

살 수 있었는 데 왜 그런 선택을

왜 스위스 용병 786명은  프랑스왕을 위해  죽었나?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파리] 

1792년 프랑스혁명 당시, 스위스 용병은 근위대로 루이 16세를 지키고 있었다. 프랑스 민병대가 틀트리궁전으로 루이 16세를 죽이려도 들이닥쳤을 때 다른 나라의 용병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끝까지 남아있던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그 자리에서 장렬하게 죽음을 선택했다. 


프랑스 민병대는 프랑스 군인도 아닌 용병인 스위스군인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주었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왕이 도망갈 수 있도록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서 몰살당하였다. 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 궁정의 길목을 끝까지 지킨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던 프랑스왕가 일가족은 그날 파리 틸트리 궁정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스위스에 살면서 가슴 뭉클하던 때가 몇 번 있었는 데 스위스 용병이 그 하나였고 그때의 기억이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뻥 뚫리는 듯한 보기 드문 선택의 장면에서 느꼈던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수십 년 전 배낭여행을 와서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상을 볼 때도 용병의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갔는 데 이곳에 살면서 스위스 역사를 공부하고 이곳의 문화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용병의 역사가 다시 다가왔다. 


손해 안 보고 살아야 하고 일단은 내가 먼저 살아야 하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당장 내가 살 수 있는 데도 살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었는 데로 불구하고 죽기로 작정하고 급료를 줄 왕도 없어진 궁에서 왕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선택한 것은 왜일까?  나에게 만약 그 자리에 서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래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과연 저런 선택을 할 것인가? 물었을 때 대답이 잘 안 나온다. 나는 눈치를 보면서 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왜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용병들은 도망갔는 데 그 순간 그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였을 까 호기심이 들었다. 


스위스 용병들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마키아벨리도 그의  “군주론”에서 언급하면서 프랑스 발루아 가의 왕들은 스위스인들이 없으면 제대로 군대를 꾸리지 못했을 정도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스위스용병으로 활동하던 젊은이들은 낙후된 고향에서는 경제적 수익과, 모험과 또 전술에 유능한 군인으로서의 스위스인의 자부심으로 외지로 나가 싸웠다. 1490년대까지 스위스 용병들은 용병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다. 그러나 이후 스위스 용병들을 모방한 용병부대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틸트리 궁정에서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살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죽어가면서까지 그 자리를 지킨 스위스 용병들은 당시 독일 이태리와 함께 최고의 용병자리를 다투고 있었으며 다른 나라 용병과는 달리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 용병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이후 중립국등의 이유로 용병산업을 접었지만 오늘날에도 바티칸 시국에서는 근위병으로 스위스인들을 고용하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베른에서 보까지 스위스연합국은 브로이강을 따라 무역으로 부유해졌는 데 이는  스위스용병이  외국으로 자주 나가면서 발달된 산업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부터 무역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점차 이렇게 쌓은 부로 도시의 집도 재건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지금의 세계 최고의 부유한 국가인 스위스의 기틀은 용병산업이 그 기초가 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자는 용병의 상징이었고 빈사의 사자상은 그 당시 틸트리궁에서 스위스근위병으로 있었던 파이퍼 폰 알티쇼펜(Karl Pfyffer von Altishofen) 경관이 그날 휴가로 파리에 있지 않고 루체른에 있는 집에 있던 중 우연히 목숨을 건지게 된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 예상하지 못한 동료들의 몰살당한 그 역사의 아픈 상황 속에서 그의  동료들이었던 스위스용병 틸트리의 근위병을 기리는 마음에서 자신의 고향 루체른에 조형물을 건축하기 위해 모금을 시작하였고 완공 후 반사의 사자상은 스위스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조형물이 되었다. 


먹거리가 풍성하지 않은 나라에서 외국에 나가서 몸으로 돈을 벌어야 했던 스위스 용병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빈사의 사자상을 바라볼 때면 용병으로  자신들의 목숨까지 버리면서까지 신뢰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으며 후대에게  남다른 선조들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용병으로서 세계 최고의 몸값을 받았던 그들의 자존심은 미래에 스위스가 진출한 산업 분야에서는 항상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1792년의 스위스 용병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스위스를 가장 부유한 나라로 이끈 그 정신은 눈에 보이는 당장 자신들의 이익을 구하며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도망치지 않고 후대와 나라의 미래 먹거리를 고민한 선조의 죽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스위스가 아름다운 관광자원과 행운이 있는 나라로 잘살게 된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면 스위스를 이끈 선조들의 죽음과 자신들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을 버림으로 미래에 남겨주고자 했던 그 정신이 무엇이었다는 우리는 먼저 바라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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