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건강한 공격성은 우리 내면의 발전소입니다.
2. 추진력은 YES, 출세지향주의는 NO!
(1) 권력 게임에서 희생자 역할을 면하려면 반드시 저항하라.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요즘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입니다. 구조조정, 기업합병 같은 일들이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직원들이 해고를 당하고, 하루아침에 한 부서가 통째로 폐쇄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여기저기서 위계질서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능력있는 전문 인력과 간부들조차 감원의 거친 파도 속에서 살아남기 어려워졌습니다. 기업들간의 경쟁뿐만 아니라 기업 내부에서 벌어지는 밀어내기 경쟁도 더욱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성공을 향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전보다 현저하게 거세진 역풍을 계산해야 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 ❲제품, 시스템, 작업공정 등❳를 내놓을 때도, 보다 강력해진 저항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동료, 부하직원, 상관들이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까닭은 변화란 업무 증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의 아이디어가 그들의 아이디어보다 훌륭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당신의 의사를 끝까지 관철 시켜야 합니다.
파도는 걸수록 더 거칠어지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는 공격적으로 ‘이를 악물고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미덕이 되어버렸습니다. 밀어내기 경쟁이 사방에서 판을 치는 이런 상황에서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라 할 수 있는 공손함만 갖고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사람 좋은 남자 상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넘치는 여자 상사,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 동료, 너무나 친절한 남자 동료, 이들 모두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요컨대 모든 곳에, 경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빨리 천당으로 올라가 버린다!’ 이런 표현처럼, 그런 사람들은 쉽게 밀려나게 마련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거나 무언가를 바꿔보려 할 때면, 어김없이 이런 소리들을 듣게 됩니다.
○ 여기서는 그 방법이 안 통해.
○ 여기서는 예전부터 늘 그래왔어!
○ 자네는 우리 회사의 전통 같은 건 아예 안중에도 없군!
○ 자네는 아직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일단은 우리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한번 믿어보지 그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이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대신, 갈등이 생길 것을 염려해 처음부터 포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한 발 뒤로 물러나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이런 숭고한 행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물러터진 패배자로 치부해 버립니다.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과 관심사를 포기하거나,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승진과 출세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권익 보호를 위해 나서지 않는 사람은 항시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머지않아 동료의 사정을 봐주느라 금요일 저녁 늦게까지 업무처리에 전전긍긍하는 부류로 편입되고 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히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 입장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거절 사유를 밝히라고 물고 늘어질 때면, 대부분은 곤혹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거절 의사를 분명히 표명해야 합니다. 특히 궁지에 몰렸을 때, 그리고 동료와 부하직원, 상관이 당신의 출세 길을 망치려 들 때면 더욱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2) 자기희생과 자기중심적 태도 사이의 가파른 능선.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우화극 <사천의 선인>에 등장하는 주인공 셴테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인물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그러던 중 절체절명의 파산 위기에 빠진 그녀는, 냉혹하고 파렴치한 사촌 슈이타라는 인물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고,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을 부탁할 때면 사촌의 가면을 쓰고 그들을 대합니다. 그녀가 살아남을 수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바로 이런 인격분열뿐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셴테’는 자기희생을, ‘슈이타’는 자기중심주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 어디쯤엔가 우리가 희생자로 전락하거나 범죄자가 되어 죄를 짓는 사태를 막아줄 ‘중간 지대’가 존재합니다.
철학자이자 미디어학자인 노르베르트 볼츠는, 예측 불가능한 일을 유발하고 이를 통해 혁신을 가능케 하는 진정한 도전적 행위로서의 악마적 전략과 창조적 파괴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혁신적인 움직임에 계속 제동을 거는 기업 내 기득권 세력을 신랄하게 공격합니다.
강인한 투지의 소유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언제라도 남을 도울 태세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결코 이용당하거나 착취당하는 처지로 전락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더 많은 존경을 받습니다.
윤리학의 한 분야인 소위 ‘행복추구윤리학’은 자기희생과 자기중심주의 사이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의무윤리학’은 바람직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반면 행복추구윤리학은 자기관리 능력과 더불어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줍니다.
예컨대 인간관계에서는 일방적으로 주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행복추구윤리학의 권고사항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용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이용당할 우려가 있을 때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칭찬과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책임과 동시에, 공공의 안녕을 도모해야 할 의무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이익을 공공의 이익과 결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공리주의를 주창한 제레미 벤담은 기업에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언제나 공공의 이익을 기준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경제 옹호자들의 총아인 애덤 스미스조차 ‘최소한의 배려’를 요구함으로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인 이익 추구를 거부했습니다.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켜 선한 목적을 달성하는 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입니다.
신명을 다해 의연하게 싸우려는 투지와 각오, 이것은 곧 천성적으로 타고난 공격성을 활용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물론 타고난 공격성을 활용한다고 해서 상대방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승화’를 의미합니다. 즉 공격적인(그리고 성적인) 에너지를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으로 승화시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각종 문화 활동 지원과 사회재단 설립에 사용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공격성을 승화시킨다는 것은 활용되지 못한 채 썩고 있는 공격성, 자연스럽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공격성을 활성화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입니다. 공격성을 부인하고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공격성은 인간의 근간을 형성하는 요소로서 우리가 살아남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관건은 우리에게 주어진 공격성을 다루고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공격성을 건설적으로 사용할지 아니면 파괴적으로 사용할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건강한 공격성은 우리 내면의 발전소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의사관철 능력이 최초로 생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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