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이른 꽃구경

by 화당

3월이다. 산너머 남촌에서 훈풍이 불어오고 따스한 햇살이 비추더니, 주말 아침엔 옅은 비가 내린다.

성지곡 호수에도 빗물이 동그라미를 그리고 둘셋 무리를 진 오리들은 마치 보트처럼 물살을 가른다. 나뭇잎도 촉촉이 윤기를 더해 반짝인다.


바람의 언덕으로 가는 산길에는 아직 꽃이 필 생각이 전혀 없다.


"봄꽃 구경하러 한번 갈까요?"

"어디로"

"매화, 산수유 피는 광양이나 구례가 어떤지요!"

"아 그래, 오늘 투표를 하고 선거일에 떠나볼까!"


언제나 우리들 마음은 봄보다 앞서 간다.


우리는 꽃망울을 일찍 터뜨리는 매화와 산수유 여행을 가기 위해 집으로 오는 길에 사전투표를 하였다.

(본 투표일 하루가 온전한 휴일이 생겨지니 사전투표제도는 참 잘 만들어졌다.)


본 투표일 전날, 아내와 아들과 함께 남해고속도로를 달렸다. 햇살이 포근하다.


휴게소에 사람이 붐빈다. 어디에도 꽃은 보이지 않지만, 모두 내 마음처럼 꽃구경을 가는지 밝은 표정들이다.


하동 IC로 내려와 섬진강변 국도를 달리며 창문을 내렸다. 강바람이 내 눈과 코, 귀를 시원하게 한다.


벚꽃이 없어도, 이곳은 끝없이 달렸으면 좋은 길이다.


다리를 건너 광양에 들어서니 길옆에 핀 매화가 조금씩 보인다. 홍쌍리 여사 매화농원에는 차들로 가득 찼다. 성급한 상춘객들이 농원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다.

봄을 앞질러 와서 매화는 이제 10%의 개화다.


무엇보다 전망이 탁 트인 길지이다. 홍쌍리 여사가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왔으나, 이렇게 멋진 섬진강과 모래밭 풍경을 보며 매실농사를 가꾼 것은 큰 복 이리라.


우리는 수만 평 매실밭의 여러 길이 보이는 곳곳마다 모두 걸어 다녔다. 배가 고팠다.


농원을 내려와 순천을 향해 차를 몰았다. 광양에서 바라본 섬진강변의 모래사장과 대나무 숲, 하동 마을 풍경도 걸작품이다.


우리는 '남녘들 밥상' 집에서 냉녹차 보리굴비와 불고기로 점심을 먹었다. 역시 음식의 고장이다. 많은 반찬들이 제각각 다 맛있다.


식당 옆 순천만 국가정원을 산책했다. 한 바퀴를 돌며 각국의 정원 구석구석 다 보았다. 예전에 친구들과 단체 야유회로 몇 번 왔지만, 그때는 술에 취하여 구경은 늘 주마간산 격이었다.


아내가 가고자 했던 순천만 습지로 차를 몰았다.

광활한 갈대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온갖 새와 벌레들의 지저 김 속에서 하늘을 수놓으며 날아가는 철새 떼가 연이어졌다.


아내가 예전에 낙조 사진을 찍으려 올랐다는 추억의 용산 전망대를 보고 온 것이 큰 수확이다.


갈대숲을 지나온 동천이 S자로 바다에 흘러가고 옆 늪지와 갯벌에 투영된 해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게다가 노을이 물들기 직전이었으므로 우리 모두 완전한 힐링의 시간이었다.


미리 예약한 구례 K호텔로 돌아오니 시간은 밤 8시를 넘겼다. 저녁은 모두 간편식이다. 농원에서 사 온 매실막걸리, 산수유 맥주, 쑥빵 마늘빵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나는 눈 속에 핀 매화의 굳건함과 노란 산수유화의 아름다움이 우리들 몸속으로 스며들기를 기원하며 술을 마셨다~ㅎ)


"당신, 내일 생일 아침밥은 이해하세요." 아내의 말에 나는

"그래, 당연하지, 생일에 이렇게 놀러 온 것도 감지덕지지!"


여행을 왔으니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을 좋은 곳에서 하자는 것이다.


(내 생일을 모르고 있을 둘째에게도 아내는 내일 전화라도 드리라며 문자를 보내고 있다.)


다음날 아침 아들은 몸에 좋다며 백화점서 사 온 생주스와 일본 컵라면을 끓여준다.


"그래 고마워, 생일날 미역국을 못 먹어도 면을 먹어야 장수한다고 했지!"


어제 캄캄한 밤에 도착해 길 옆 산수유꽃이 피었는지 알지 못하는 아내는 무작정 일찍 산수유 마을로 꽃을 보러 가자고 보챈다.


호텔을 나와 차로 산수유 마을인 반석~ 하리~상리로 돌았으나 길은 텅 비어 있다. 아직 피어난 산수유꽃이 한송이도 없으니, 마을 축제도 없이 조용하다.


봄은 오지도 않았는데, 꽃이 보고 싶어 조급하게 달려온 우리들 마음의 탓이다.

산수유 꽃에의 열망과 그리움을 이렇게 강하게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그래 열흘 후에 한번 더 와보자.ㅎ"

이제 무얼 해야 할까! 당초 계획이 없는 시간이다. 차를 돌려 남원 광한루로 가서 예쁜 연못과 누각을 둘러보았다.

광한루 앞 '소원의 다리'를 건너 보기도 하고, 근처 '추어향'에서 깻잎 싼 미꾸라지 튀김과 떡갈비, 추어탕을 먹었다. 들깨가루를 넣으니 구수하고 독특한 맛이 느껴진다.


아들과 몇 번 여행을 오니, 서로를 잘 알게 된다. 아들은 미식가 수준이다.


따라서 우선 배가 고프지 않도록 하고, 맛집 선택은 아들에게 맡길 것이며, 천천히 먹을 수 있도록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이다.


숙박도 정결한 곳 아니면 가지 않는다.

그 덕분에 모두가 잘 먹고 편하며 즐겁다.


옛과 달리 노인보다 젊은이를 잘 대우해야 할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아내와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도 큰 다행히 아닐는지!ㅎ


그러한 결과로 더욱 친하고 익숙해졌으니 정말 좋은 일이다.


우리는 차를 돌려 순천 선암사로 갔다.

예전에 산악회를 따라 조계산을 두 번 오르면서 들렀지만, 이렇게 아담하고 예쁜 절인 지 오늘 처음 깨달았다.


뒤깐에 걸린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도 읽어 보았으며, 가족과 함께 오니 더욱 꼼꼼하고 세세히 보게 된다.

절에서 주차장까지의 길은 호젓했다.


남해고속도로 귀갓길에 늘 그렇듯이 진영휴게소에 들러서 저녁을 먹었다.


집으로 오니 대선 개표방송을 한다. 샤워도 잊은 채 TV 앞에 앉아서 사 온 산수유 막걸리를 마셨고 시바스 리갈도 마셨다. 오랜만의 혼술에 취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멋진 밤이 흘러가고 있다.


즐거운 여행에서 돌아온 생일날에 내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는 소박한 꿈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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