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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14화. 도전과 수용과 운명

어느 포장마차 안에서 오간 인생 이야기

by 벽운

도전과 수용과 운명


이제 포장도로 옆 가로수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몇 잎이 남아 찬바람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다. 그것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니 시간문제이기에 굳이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누구는 아직까지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리에 이리저리 구르는 낙엽을 응시할 뿐이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우울해지고 무언가 공허감을 달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인지, 오늘도 포장마차에는 초저녁인데도 자리 잡기가 힘들다. 혼자서 마시기 위해 만든 주점이요, 혼자서 생각하기 위해 오는 벤치이듯이 손님들은 열이면 열이 다 혼자이었다. 왜 그들은 혼자 와서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인가.


부전시장 골목에서도 외딴곳에 있는 그 포장마차는 특이하게도 상호가 붙어있었다. 본래 주점이라면 간판이 달리는 게 맞지만 유독 포장마차 만은 상호가 없이 포장마차 자체가 상호인 셈인데 말이다. 간간이 순이네 집이나 목포집이니 하동집이니 하는 이름은 한 번씩 보이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포장마차는 그 자체가 탁월한 상호인 셈이었다. 그것은 나그네의 향수를 자극하고 혼자서도 올 수 있도록 손님들의 정서를 감안하여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포장마차의 주인과 손님들의 경제적 수준이 비슷하기에 고독한 사람들이나 그날 저녁 술친구를 못 맞난, 또는 귀가를 하기에는 아쉬워서, 주머니에 돈이 다떨어 질 때까지, 혼자서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등등 오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 포장마차의 상호가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도전과 수용과 운명’이라는 주점에는 걸맞지 않은 상호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상호를 보고 자신의 처지와 맞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그 포장마차의 포장을 들어 올리며 백발이 성성하고 덩치가 큰, 얼굴에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남자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디서 전주가 있었는지 혀가 좀 꼬인 목소리로 주문을 한다.

“보이소, 여기 닭똥집하고 대선소주 한 병 주이소. 오뎅 국물도 좀 담아주시고......”하고 탁자에 두 손을 뻗대고 말하는 폼이 좀 힘이 있어 보인다. 오른쪽 모퉁이에는 이미 젊은 남녀 한쌍이 바짝 엉덩이를 붙이고 한순간도 떨어지면 큰일이나 나는 듯이 감미롭게 앉아있었다. 그 청춘남녀는 주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서로의 목덜미를 껴안고 한 번씩 양다리사이에 손을 끼었다 뺏다 하면서 황홀하게 놀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조금 전에 들어선 백발의 노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하이구’하면서 한숨을 내쉰다. 주인은 갑자기 조심스러워지고 칼질을 잠시 멈추고 노인에게 눈치로 양해를 구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노인은 “말세야, 말세. 나도 그 정도는 안 했다. 어이구.”하면서 미처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 한잔을 탁 한입에 털어 넣는다.


그때 포장을 조용히 들어 올리며 몸집이 가냘프고 얼굴이 우글쭈글한 노인 한 사람이 또 들어온다. 그리고 백발의 노인 왼쪽에 있는 의자에 살포시 앉는다. 앞선 손님과 달리 얌전하고 겸손하게 보이는 게 서로 대조가 되었다. 주인이 무엇을 드실 것이냐고 물으니 가리비조개 구이를 주문하고 진로소주를 주문한다. 보아하니 전주는 없는듯하고 술을 즐기는 인상을 주었다. 그 노인도 오른쪽 탁자에 앉은 젊은 남녀에게도 시선이 가고 그 문란한 정경을 감상한다. 여전히 청춘남녀는 그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탁자에는 소주 한 병에 맥주 한 병에다 안주로는 꼬지오뎅 그릇이 놓여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소곤소곤 수근수근하다가 한 번씩 까르륵 웃기도 하였다. 백발노인은 눈을 개슴츠레 뜨며 꼴불견인지 볼견인지 감상을 하는지 다른 무슨 심사가 있는지 표정이 못마땅하다.


조금 있으니 또다시 포장이 휘청이며 헌팅캡을 쓴 노인이 휘청거리며 들어선다. 그의 인상은 다소 온화하였고 몸매는 날씬하였으며 얼굴은 탱글탱글하였다. 어디서 많이 마셨는지 백발노인의 탁자 곁에 겨우 앉았다. 그는 아직도 술이 목마르는지 우선 소주 한 병을 달라고 한다. 주인이 무슨 소주인가 물으니 그냥 소주를 달라고만 한다. 아마 상표는 따지지 않는 걸 보니 성격이 좀 유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안주를 물으니 ‘그냥 있는 대로 주이소’하니 안주보다는 술이 더 중한 모양이었다.


시간은 열 시가 조금 넘었지만 포장마차 바깥의 거리는 여전히 북적거리고 귀갓길을 재촉하는 사람보다는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포장마차 안은 포장으로 거리와 격리되어 있으니까 바깥의 소음은 의미 없는 아우성이었다. 맨 먼저 온 백발노인은 닭똥집에 대선소주를, 두 번째 겸손해 보이는 노인은 가리비조개에 진로소주를 홀짝 거리면서 마시고 있었다. 오른쪽 탁자의 청춘남녀는 세명의 노인들 앞에서 시아버지에게 장인어른에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니 흐뭇해하시라는 듯이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니 먼저 온 백발노인이 주인에게 또 한마디를 한다. “요새 말세인지는 알지마는 그렇게 눈치도 없는 애들을 보면 한심하네.”말하니 주인은 “옛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안 보는 세상이지요. 좋은 게 좋다 하고 넘어가시지요.”하고 말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노인들 중에는 두 번째 손님이 질책은커녕 긍정적으로 보는 듯하고 마지막 손님은 그쪽으로 아예 시선을 보내지 않고 소주잔만 기울인다. 시간이 얼마간 흐르니 세명의 노인들이 조금은 머쓱한지 서로를 쳐다보며 눈인사를 나눈다. 먼저 온 백발이 통성명을 하자고 제안하니 각자 이름은 놔두고 성씨만 말한다.


“저는 강가요.” “나는 안가고요.” “소생은 김가입지요.”하고 돌아가며 말한다. 나이를 물으니 60대 초반이고 한 살 그 아래위로 이었다. 노인이라고 말했지만 나이를 들으니 중년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서로는 통성명을 하고 나서 문제의 청춘남녀를 화제에 올렸다. 먼저 백발의 강씨가 요새 젊은이들이 남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입을 열었다. 그에 대해서 안씨와 김씨에 대해 동의를 구하니 안씨가 응답을 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 따라가야지요.”하고 유연하게 말하자. “아니 지들이 좋으면 남의 눈에 없는데서 놀면 되지 아버지뻘 되는 우리 앞에서 대놓고 노니 막된 것들이 아니요.”하고 강씨가 탁자를 툭 치면서 말한다. 그리고 옆에 있는 김씨에게 의견을 구하니 술에 취해서 그런지 반응이 없다. 조금 있다가 부스스 눈을 뜨면서 “저그들이 좋으면 저그 알아서 하것지요.”하고 무심코 말한다. 그러니 강씨는 못마땅한 듯이 자존심이 상한 듯이 “요새 어른들이 이러니 젊은애들이 지멋대로가 아닌가요. 좀 반성하입시다.”하고 말한다. 그러자 포장마차 주인이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청춘남녀의 눈치를 살핀다.


어찌 된 일인지 그 청춘남녀는 장님들인지 귀머거리인지 아랑곳없이 여전히 껴안고 입을 맞추고 손장난을 한다. 그 장면을 보고 참다못한 백발의 강씨가 대놓고 그들에게 불호령을 한다. “이봐. 젊은이들. 지금 아버지뻘 앞에서 무슨 고약한 짓이야. 사람 안 보이는데 가서 지랄을 하던 해라.”고 하니 청춘남녀는 깜짝 놀라면서 “아버님, 저희들은 오랜만에 만나 너무 반가워서 그래요. 좀 눈감아 주시면 안 될까요.”하고 당돌하게 말하니 백발의 노인은 벌떡 일어서서 삿대짓을 하였다. 주인이 분위기가 심상찮아 청춘남녀에게 자리를 옮겨서 노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니 그들은 입을 삐죽거리며 포장마차 포장을 발로 툭 차고 밖으로 나간다.


그들이 나가고 난 뒤에 후련하다는 듯이 백발 강씨가 대놓고 말한다. 아마 그동안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많이 참았단 모양이었다. 기질이 그래서 그런지 성격이 매우 직선적이고 도전적이었다.

“아이구, 이제야 술맛이 제대로 나네. 그 두년놈들 때문에 술이 확 깨버렸네. 여기 두 분께서는 너무 무관심하시던데 왜들 그러십니까.”

“저는 그 장면을 보고 별다른 생각이 안 나고 좋은 풍경이구나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으면 좋았겠다고 여겨집디다.”

“허허, 어른이 되셔가지고 잘못된 것은 지적도 하고 훈계도 하셔야지 무책임하십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냥 청춘남녀가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구나 하고 비쳤고 간섭을 한다는 것은 자유를 침해하는 걸로 생각이 드네요.”

“이런 이런, 도대체 어른이 그 모양이니 세상이 자꾸 말세로 가지요. 혹시 자녀들도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켰는가요.”하고 강씨와 안씨는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옆에 있는 김씨는 아직도 멍멍한지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전주가 있어서 조금 전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모양인지, 앞에 있는 우동그릇은 비워지지 않고 김만 모락모락 외로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도 강씨의 언성은 높았고 씩씩하였으며 안씨는 그의 말에 동조하기보다는 애매모호한 선문답으로 응수하였다. 한편에서는 열을 올리고 다른 쪽에서는 찬물을 끼얹고 하니 대화는 중단되지 않고 하루고개 놀이처럼 계속 이어졌다. 그때 옆자리에서 고개를 푹 박고 있던 김씨가 큰소리로 한마디를 하여 다들 깜짝 놀랐다.

“아이구, 무슨 이야기들이 젊은 애들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시오들. 그냥 저그들 하는 데로 내버려 두시요.”

“아따. 조용히 계시던만 이제 좀 정신이 드시나 보요. 김씨께서도 또 이상한 말을 하시네요.”

“이상한 말이 아니고 이런 자리에서 그렇게 길게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봅니다.”하고 강씨와 김씨는 주고받았다.


이상하게 조용히 있던 김씨가 나서서 제법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 진의가 궁금하다. 아마 귀중한 시간을 자신들의 문제가 아닌 청춘남녀들의 행실에 대해 이야기하니 안타까워하는 뉘앙스 같았다. 그때 조용히 듣고만 있던 포장마차 주인이 오랜만에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요새 애들의 사랑이라는 게 옛날하고 엄청나게 다릅디다. 쉽게 만나서 사귀다가 또 쉽게 헤어지고 하더라구요. 진정한 애정이 없는 그냥 즐기는 거라고 할까요.”

“어허, 그러니까 어른들이 나서서 잘못을 바로 잡아 주어야지요. 이 자리에서 나만 꼴통처럼 되어버린 것 같구만.”

“이런 김에 여기 계신 어르신들의 연애담을 한번 들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어떻게 하여 결혼을 하셨는지 많이 궁금합니다.”하고 강씨와 주인이 주고받은 이야기였다.


포장마차 주인의 긴급 제안으로 분위기가 바뀌었고 이제 그들 자신들의 연애이야기나 결혼에 대하여 주제가 넘어갔다. 백발의 강씨 외에는 그런 민망한 장면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연애시절이 그립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 세명의 성격은 생김새와 옷차림과 말투에서도 서로 각각이었다. 강 씨는 무슨 군복 비슷한 잠바를 안씨는 등산복 차림을 김씨는 정장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직이 궁금하였지만 스스로 털어놓지 않은 한 알 수는 없었다. 포장마차 주인이 사회자가 되어 돌아가면서 질문을 할 모양이었다.


“강선생님께서는 연애결혼이 아니고 중매로 하셨는가 보아지네요. 성품이 강직하셔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허허, 내가 연애도 못하는 숙맥으로 보이시오. 이래 봬도 대학시절에 연애를 하여 결혼까지 한 걸 모르시나 본데 많이 섭섭합니다.”

“어떻게 연애를 하셨길래 대학시절에 짝을 찾으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좀 의외입니다.”

“내가 ROTC 출신인데 나의 철학은 무조건 앞으로 전진이고 고지에 먼저 태극기를 꽂는 것이지요.”

“그러면 밀어붙여서 깃발을 꽂으신 거군요.”

“이제야 알아보시네요. 여자는 남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는 망아지와 같습지요.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먼저 손을 본 것이지요. 남자가 군대 가면 여자가 신발을 거꾸로 신는다고 하지 않던가요.”하고 백발의 강씨가 무용담처럼 당당히 말했다.


말을 들어보니 강씨는 성격 따라 ROTC 훈련을 받았고 군대를 가기 전인지 갔다 와서 인지 모르지만 연인을 자기 품에 안은 모양이었다. 그의 말속에 태극기를 꽂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였다. 승리를 하였다는 단순한 뜻인지 흔히 말하는 깃발이 좀 야한 뜻인지 아리송하였지만 말은 재미가 있었다. 다시 사회자인 포장마차 주인은 안씨에게 말을 건넨다.


“안선생님께서는 성격이 조용하고 너그러우신데 어떻게 연애담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연애결혼이 맞으시지요.”

“하하, 연애결혼인지 강제결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아이구, 그러면 불장난을 하셨단 말이신가요. 그렇게 안보이시는데 말입니다.”

“직장생활 중에 산에서 일이 벌어져 버린 셈이지요. 오랜 시간 밀착하였기에 저절로 붙어버린 셈이지요.”하고 이야기가 오갔다.


안씨가 말한 내용이 정말 의아스러웠다. 직장에서 만나서 사내결혼을 한 모양인데 산에서 일이 벌어져 버렸다니 어떤 일이었을까. 산에 가면 사람은 자연을 닮아 순수해지기도 서로가 아름답게도 비친다는데 단서가 있을 것인가. 안씨의 성품은 얌전하고 불장난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데 호박씨를 까는 음흉한 그 무엇이 있더란 말이던가. 사회자는 이번에는 김씨에게 질문을 한다.


“김선생님도 한 말씀해주시지요. 보기에는 반중매로 보이는데 맞는지요.”

“아따. 그건 물어서 뭐할라고 그래요. 나는 감옥에서 만났어요.”

“뭐시라고요. 감옥이라니요. 혹시 그러면 교도소를 다녀오셨단 말씀이신가요.”

“그 참, 내가 그 이야기를 하려니 참말로 말문이 안 열리네요. 운명적인 만남이라고만 아십시요.”하고 김씨가 앞에 놓인 소주잔을 한참에 비우면서 말한다.


김씨의 말 그 자체로는 충격적이었고, 감옥이라고 하니 무슨 전과가 있어서 수감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왠지 술이 만취하여 들어왔고 대화에도 적극 참여하지 않은걸 보니 마음속에 어둠이 깔려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아마 자신의 과거가 기구하여 감옥에 갔고 어떤 종교단체의 여자신도를 만나서 결혼을 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신도는 김씨에게 연민을 가지고 그를 구원해 주려고 하였는지 그 또한 알쏭달쏭하다. 그때 백발의 강씨가 불쑥 말을 끄집어낸다.


“하하, 여기 계신 두 분의 얘기를 들으니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입니다. 우리에게도 청춘이 있었군요. 자 한잔씩 듭시다. 여기 있는 닭똥집 안주도 드시고요.”

“허허, 여기에 있는 가리비도 드시고요. 같이 건배나 하입시다.”

“아이구, 나는 드릴 안주가 없네요. 우동국물을 드릴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주인장, 여기 고갈비 한 접시 구워주소.”

“김선생님께서 큰 선심을 쓰시네요. 그 귀한 고급갈비를 주문하시고요.”

“허허, 부끄럽습니다. 그냥 고등어 갈비라서. 그런데 이곳에서는 고갈비가 최고지요.”하고 오랜만에 김씨가 제법 위트 있게 말을 한다.


이렇게 하여 세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고 대화도 재미있게 진행된다. 무뚝뚝하게 보이던 김씨의 말은 무슨 철학자나 문학가처럼 말의 내용을 교묘하게 포장하여 말하는 듯하였다. 포장마차에 갇혀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포장하여 말하듯이 좀 형이상학적이었다. 그런데 강씨가 깃발을 꽂았다던가, 안씨가 산에서 불을 질렀다느니 하는 것은 대충 짐작이 가지만 김씨의 감옥에서 만남은 두꺼운 포장지를 입혀놓았는 것처럼 보였다.


세 사람은 다시 한번 ‘회춘을 위하여’하면서 건배를 한다. 그 세 사람은 무슨 남모르는 애환이 있는지 포장마차에 왔던가. 그곳은 혼자서 조용히 마시고 싶을 때는 들러는 주점이 아니던가. 그들의 오늘 일정에 대하여 주인이 질문을 한다.

“강선생님은 오늘 어디를 다녀오셨는지요. 전주가 조금 있으신 것 같아서요.”

“허허, 저는 말씀드리가 그렇지만 뺑뺑이 한번 돌고 왔지요. 오늘은 영 낚시가 잘 안 되네요.”

“그러면 부전역 근방의 카바레나 콜라텍에 다녀오셨는 모양입니다.”

“아이구, 주인장께서 잘 알아맞추시네요. 바로 콜라텍입니다. 술은 맥주 몇 캔 정도 마셨지요. 내가 짝지의 구두를 밟는 바람에 퇴자를 맞고 울적해서 여기로 왔지요.”하고 강씨가 다소 겸연쩍은 듯이 말한다.


강씨는 콜라텍에서 부르스를 추다가 숙녀의 하이힐을 밟아서 망신을 당한 모양이었다. 얼굴과 체격은 나름대로 준수하였는데 춤 솜씨가 영 시원치 못한 모양이었다. 여자들은 남자의 얼굴을 안 보고 춤 솜씨와 매너를 보는 모양이던가. 어두운 조명등 아래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겠는가. 오직 다정다감한 손길과 황홀하게 이끄는 춤 솜씨가 제일이지 안 그런가. 카바레나 콜라텍에서는 남자가 살짝 곰보라도 춤만 잘 추면 최고로 치지 않던가. 강씨는 태극기를 들고 고지에 깃발을 꽂는 기백으로는 상대의 마음을 잡지를 못한 모양이었다. 그때 얌전하고 겸손하게 보이는 안씨가 좀 비꼬는 말을 한다.


“아이구, 저런. 큰 실례를 하셨네요. 혹시 일부러 밟은 것은 아니겠지요. 선생님은 부루스보다는 고고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허허, 좀 듣기가 그렇네요. 선생님은 춤을 좀 추십니까. 등산복을 입고 나온 것 보니 혼자서 체육공원을 돌다 온 모습인데요.”

“허참, 염려를 내리 놓으시지요. 이래 봬도 부전카바레에서는 좀 알아준답니다. 춤 실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파트너를 다정하게 또 눈을 맞추면서 추는 매너를 갖고 있지요.”하고 강 씨와 안씨는 좀 더 가까워진 듯이 서슴없이 말을 하는데 주인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다시 질문은 김씨에게 돌아간다.


“김선생님은 오늘 어디 갔다가 오시는 길인가요. 옷차림이 정장이라 춤추는 곳에 갔다 오신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예, 나는 춤 같은 것은 못 추고 옛날 나이트클럽에서 막 흔드는 막춤은 좀 추었답니다. 오늘은 직장동료들 모임에 갔다가 과음하였네요.”

“실례지만 직장이 어떤 곳이던가요. 손을 보니 볼펜을 많이 잡으신 것 같으신데요.”

“아이구, 잘 알아맞추시네요. 저는 은행에 오래 다녔습니다. 거기에는 돈과 수표를 넣어두는 큰 금고가 있지요.”하고 김씨가 좀 의기양양하게 말을 한다.


김씨가 은행에 다녔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의아해하였다. 정장을 입은 모습은 그런대로 인정이 되는데 만취한 자세와 감옥에서 결혼했다는 언사는 이해가 잘 안 갔다. 서로는 김씨가 은행 돈을 횡령하여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 보았다. 감옥에서 어떻게 부인을 알게 되었는지가 궁금하였지만 스스로 대답을 않는 한 예의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얼굴에는 범죄인의 특징인 흉폭함과 교활함과 부도덕함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기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씨와 안씨는 그런대로 추측이 가능한데 김씨는 해결의 단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사회자인 포장마차 주인이 돌아가면서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강선생님은 지금 부인과 잘 지내시는지요. 아마 카리스마가 있으셔서 아직도 장악하고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허허,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이지요. 방도 따로 쓰고 서로 간섭도 안 하고 묵언수행을 하고 있답니다.”

“아마 선제공격으로 승기를 잡았는데 이제 밀렸나 보네요. 그러니 부부는 평등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내가 콜라텍으로 방랑을 하고 포장마차에 술을 마시는 게 아닌가요. 여편네도 내 모르게 카바레에 다니는 모양인데 뭐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요.”

“여편네는 아마 집하고 먼 동네에 있는 구포방향에 있는 춤집으로 다닌다는 소문이 있습디다. 차라리 잘 되었지요. 바가지 안 긁고 행복해하니까요.”하고 강씨가 씁스름한 표정을 지우면서 소주를 한잔 털어 넣는다.


강씨는 아마 이제 가정의 주도권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나이가 들면 여자들의 기질이 남자를 능가하고 무섭게 변한다더니 맞는 말인 것 같다. 아마 서로는 사생활에 대해 간섭을 안 하기로 휴전을 한 모양이었다. 태극기를 들고 고지를 향하여 내달리던 그 패기는 어디로 가고 콜라텍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나가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여자의 고지에 먼저 깃발을 꽂은 것 그 영광은 지금은 빛을 바래었나 보다. 다음 순번으로 사회자는 안씨에게 질문을 한다.


“안선생님은 어찌하여 산에서 불을 지르고 결혼을 하셨나요. 혹시 두 분이 등산을 가셔서 일을 저지르신 건가요.”

“하하, 반쯤은 맞고 반은 틀리는데요. 지리산으로 직장산악회 등산을 갔다가 하산하는 길에 그녀가 발목을 접질렸기에 꼼짝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요. 양말을 벗겨 마사지를 하셨단 말인가요.”

“그게 아니고 산밑으로 내려가는데 내한테 업히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일행은 유부남들이고 내가 총각이었으니까요.”

“단지 안전하게 하산시켜야 되겠다는 마음에 그녀를 등에 업고 엉덩이를 손으로 받치고 하니 그녀는 나의 목덜미를 껴안으니 뭉클한 젖가슴이 내등에 밀착하는 게 아니던가요.”

“오우, 정말로 환상적입니다. 그것이 부인께서 구애를 한 셈이네요.”

“지나고 보니 그녀가 연기를 좀 한 것 같더라구요. 집에 갈 때 보니 안 절룩거리고 잘 가는 게 이상하고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여 골인하였었지요.”하고 안씨가 솔직하게 그 상황을 잘 전달하였다.


안씨는 직장 안에서 그를 사랑하던 여성이 있었고 등산대회에서 그녀의 탁월한 연기로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기 있는 남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격언은 있지만 연기 잘하는 여인이 멋진 남자를 얻는다는 속담이 다시 생길만하다. 안씨는 그날 부인이 집에서만 있지 말고 좀 놀다가 오라고 해서 등산복을 입고 포장마차로 온 모양이었다. 그의 부인이 카바레에 다니는 것을 눈감아 주는 것은 그 가파른 산에서 자신을 업고서 내려온데 대한 보답일 것이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백발의 강씨가 한마디 한다.


“아이구, 안선생님께서 멋진 결혼을 하셨네요. 나는 강제로 빼앗았는데 호박이 통째로 저절로 굴러온 거군요. 참 사랑은 다가가는 것인가, 아니면 다가오는 것인가. 허허.”

“어찌 보면 나도 강제로 빼앗긴 셈이지요. 어찌 처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젖가슴을 등에 밀착시키고 하였는데 결혼을 안 하고는 용납이 되겠습니까.”

“그래도 그 여인이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안선생님한테 작정하고 달겨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점에서 내가 많이 부럽습니다. 허허.”

“맞습니다. 안선생님이야 말로 진정한 기사도 정신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니 부인께서 바깥에 나가 춤도 추고 잘 놀다 오라고 하신 게 아닌가요.”하고 오랜만에 은행원 출신인 김씨가 한마디 거든다.


이렇게 하여 강씨와 안씨의 고백담은 털어놓아 들었는데 은행원 출신인 김씨는 감옥에서의 사랑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감옥이라고 하니 재촉하는 게 예의는 아닌 것 같아 그냥 놓아두었다. 포장마차 주인도 강씨도 안씨도 교도소에 선교나 포교나 법회를 나온 처녀하고 만나서 결혼한 것쯤으로 여기고 말았다. 그때 포장을 헤치고 들어서는 청춘남녀가 두리번거리면서 앉을까 말까 망설인다. 그때 엄하기로 이름난 백발의 강씨가 어찌 된 일인지 반색을 하면서 한마디 한다.


“아이구, 젊은이들이 오셨군요. 편안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어도 됩니다.”

“어찌 그렇게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다니시는 가요. 세상이 다 자기 것처럼 보이지요.”

“예, 어르신들 계신데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조용히 손만 잡고 이야기하는 것을 눈감아 주십시요. 그냥 아들딸이라고 여기시고 말씀입니다.”하고 청년이 선수를 치고 나온다.


어찌하여 불과 얼마 전에 청춘남녀를 꾸짖던 그가 돌변하였단 말이던가. 혹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다시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오갔고 새로 들어온 청춘남녀는 간간이 서로의 손을 잡곤 하였지만 난잡하지는 않았다. 술도 제일 도수가 낮은 소주를 시켰고 안주도 조개구이에다 오뎅을 주문하였다. 누가 조개구이를 시켰고 누가 오뎅을 시켰는지는 알 수는 없었다. 다시 사회자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그러고 보니 김선생님만 정답을 밝히지 않으셨군요. 좀 난해한 청춘사업이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다 감옥에서 나와 결혼까지 하였다던가요.”

“허허, 내가 돈을 횡령하여서 감옥 이야기가 나온 건 아닙니다. 인생은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이니까요.”

“아따, 김선생님도 참 어지간하십니다. 탁 깨 놓고 이야기하면 될 것을 빙빙 돌리시네요. 은행원들에게 무슨 놈의 철학이 필요합니까.”하고 강씨가 빈정거리면서 이야기한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청춘남녀가 은행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들고 경청하는 게 아니던가.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에 자꾸 은행 이야기가 나오니 청춘남녀는 좀 긴장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김씨가 소주잔을 기울이더니 한마디를 더한다.


“내가 말하는 것이 좀 난해하지요. 은행원이지만 지점장까지 올랐지요. 표창장도 받고 말입니다.”

“어찌하여 감옥에 갔다 온 분이 지점장까지 하셨단 말인가요. 죄를 지은 사람에게 표창장이라니 법무부장관의 상이던가요.”

“나는 청렴결백하기로 이름이 났고 일체의 비리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 감옥 같은 금고에 갇힌 게 운명을 결정지었지요.”

“뭐시라고요. 금고에 갇히다니요. 돈이 들어가야 하는데 사람이 들어앉았다는 말이군요. 가만있자. 그러면 두 분이서 그 안에서 데이트를 하셨단 말인가요.”


“하하, 정답에 점점 가까워지는군요. 우리 은행에는 대형 금고 안에 돈이나 수표를 넣는 금고가 또 들어있지요. 우리는 대형금고 안에 갇혔었지요. 문을 닫는 직원이 안에 사람이 있는가를 확인을 안 한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금고 안에 갇혀서 다음날 출근 때까지 남녀가 함께 있었다는 말이 되네요. 어디 의도적이었습니까.”

“아이구, 누가 그 어두운 금고에 갇히려고 하겠어요. 금고당번의 실수이지요. 아마 그 당번이 약속시간이 다가와 마음이 급했던 모양입니다.”하고 김씨는 겸연쩍은 듯이 말을 한다. 그때 옆에 있던 청춘남녀가 눈을 토끼눈처럼 크게 뜨면 놀라워하였다.


은행원 김씨는 지점에 있는 대형금고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를 못했던 모양이었다. 또 한 명의 여행원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 같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확률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 벌어져 버린 것이었다. 금고에 갇히는 것 자체도 그렇고 미혼의 남녀 은행원이 갇힌 것은 짜고 하거나 신이 이끌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두 남녀 은행원은 다음 날 아침까지 빛도 없는 암흑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견뎌내었다. 불안하다 보니 서로 껴안고 다독였을 것이다. 배도 고프고 물도 없고 용변도 못 보고 정말 난감하였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금고를 열자 금고당번은 놀래 자빠졌다고 하였다. 대형금고문을 여니 남자와 여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자 혼비백산을 하였었다. 그때 사회자인 포장마차 주인이 한마디를 한다.


“아, 드디어 김선생님의 비밀의 문이 열렸군요. 그래서 산에서 불을 지른 안선생님처럼 사내결혼을 운명적으로 하셨던 거군요.”

“맞습니다. 다행히 신문에는 안 나오고 양가집 부모에게는 알려져서 부랴부랴 결혼식을 올렸지요. 주례는 우리 지점장님께서 하셨고요.”하고 김씨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을 한다. 그때 옆에서 유심히 듣고 있던 청춘남녀 중 남자가 한마디를 한다.


“우리 은행에 내려오는 전설하고 너무 닮았네요. 그 두선배들은 밤새워 금고를 지킨 공로로 은행장 표창을 받았다고 하던데 아마 전설이겠지요.”

“이보게 젊은이들은 은행원 출신인가 본데 어느 은행이요. 이건 전설이 아니라 실화인데 내 경우하고 딱 들어 맞구만.”

“저희들은 B은행에서 함께 근무하는 행원들입니다. 선생님은 어느 은행 출신이신가요.”

“아아, 참말로 꿈같은 일이네. 나도 B은행 출신이네. 아마 내보다 한참 후배가 되는구만. 두 사람은 금고에 갇히지 말고 연애를 잘하게나.”하고 김씨가 반색을 하면서 말한다.

같이 있는 노인들 세 사람과 포장마차 주인과 청춘남녀는 함께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하니 모두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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