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버지의 기구한 인생과 실패와 성공에 관한 이야기
마지막 귀성열차
이제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내일이면 설날이고 차례를 모셔야 하니 흩어진 가족들은 모이게 돼있다. 이웃집들은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하나둘 돌아오니 부침개 굽는 냄새처럼 구수하고 향기롭다. 명절이면 아이들은 즐겁고 덩달아 강아지들도 신이 난다. 떼떼옷 한 벌에다가 신발 하나씩 입고 신게 되니 그것만큼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사람들도 있었다. 객지에 나간 자식들이 오지 않고 돈 벌러 나간 서방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그렇다.
낙골댁은 매년 맞이하는 설날이지만 올해는 무언가 허전하고 또 걱정스럽기도 하다. 객지에 나간 아이들은 돌아왔지만 남편은 지난 추억에 이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장이 보이지 않으니 집안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고 모두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편지 한 장도 없이 근 일 년 동안 고향에는 얼굴조차 안 내보이니 말이었다. 본래 자존심이 강하고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대어 실패한 경험이 많았는지라 고향에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문전옥답은 다 팔았고 나머지 농지는 차압이 붙어 가지고는 있지마는 이미 자기 재산이 아니었다. 낙골댁은 다 그게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한 결과이니 원망할 수도 없었지만 줄줄이 커가는 자식들을 생각하니 앞길이 캄캄하였다.
낙골댁은 그런대로 천성이 낙천적이고 여장부의 기질을 가졌던지라 시골에 남겨진 아이들을 능란한 수완으로 먹여가며 키워나갔다. 아이들은 추수철에 논밭에서 보리이삭이나 벼이삭을 주워서 끼니를 이어 나갔고, 한 번씩 중매를 보아주고 목돈을 얻기도 하여 제사나 명절차례상을 장만하기도 하였다. 간간이 객지에서 낙골양반이 부쳐오는 전신환을 보태어 새로운 빚은 지지 않고 살아갔다. 그저께 저녁에는 읍내 떡방앗간에 가서 몇 되의 쌀로 겨우 떡가래 한소쿠리를 준비하였고 나머지 건어물은 이웃집 생선장사인 신촌댁으로부터 외상으로 가져왔다. 어린 아이들 설치레도 가동댁으로부터 신발을 외상으로 가져왔다. 나머지 중요한 설치레 옷은 낙골양반으로 그간 부쳐온 돈을 떼어내어 사놓았다.
그의 아버지인 낙골양반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형제도 없고 친부모와 일찍 헤어졌고, 큰집으로 양자를 가서 큰어머니의 지극정성으로 공부하고 성장하였었다. 낙골양반의 친아버지는 신학문을 배워서 그런지 민족의식이 강해 독립운동을 한다고 전국을 돌아다녔고, 자주 감방에 갇히기도 하여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해방을 보기 전에 폐결핵이라는 불치의 병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갔다. 거기에다가 친어머니 마저 어린 여동생을 업고 새 출발을 하려고 나가버렸으니 고아와 다름이 없었다. 낙골양반을 키우고 공부시킨 큰어머니인 유동댁은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온갖 정을 다 쏟아부었다. 그런데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피난 갔다 온 후에 돌아가셨다. 이제는 스스로 자기의 앞길을 개척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혔다.
“이보게 낙골양반. 그런대로 아이들이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하니 잘 키워보게. 자식농사가 최고의 농사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렴, 쎄빠지게 농사 지어봤자 입에 풀칠하기도 힘드니 아들 머리만 좋으면 공부를 시키게. 우리 아이들은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공부와는 담을 쌓아버렸다네.”
“얘들 공부 잘하는 게 얼마나 복 받은 것이 감. 자식넘들이 공부하기가 죽기보다 싫다고 하니 농사나 짓는 처지에 비하면 자네는 희망이 있지를 않은 감.”하고 동네 어른들과 친구들이 한 마디씩 거들며 격려를 해주곤 하였었다.
낙골양반은 이런저런 농사도 지어보았지만 무두다 실패를 하였다. 담배농사를 짓기 위해 건조장도 지어보았고, 고소득 약용작물도 재배해 보았지만 영농에 소질이 없었기에 결과는 뻔하였다. 본래 농사와는 거리가 멀고 요령도 없었기에 자식농사가 제격이라는 주변의 말을 듣고 도시로 진출하기로 하였다. 큰집으로부터 물려받은 논 대부분을 팔아서 그 돈을 부산의 무슨 서민금고에 전무라는 직함을 받고 투자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치명적인 함정이었고 재산을 다 날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 보증까지 섰기에 그가 떠안은 부채는 감당하기에 불가능하여 시골에 남았던 밭 떼기와 심지어는 곡식들까지 차압당했다. 하늘이 노래지고 앞길이 캄캄하고 조상들에게 큰 죄를 지은 자책감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새로운 결단을 내렸고 그것은 이미 부산에 올라간 형에다가 그 역시 부산으로 불러올렸다. 마지막 농사를 부산에서 펼치기로 한 것이었고 그것의 성공여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의 형제는 부산에서도 유명한 달동네에 터를 잡았고 그의 아버지는 탈탈 털은 돈으로 대나무 장사를 시작하였다. 하동에서 대를 사고 배로 싣고 와서 부산에서 파는 것이었지만 장사 수완이 없는 데다 보이지 않은 손실로 야금야금 종잣돈 마저 잠식해 나갔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고향에는 나타나기가 꺼려졌고 무모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허허, 조선생님께서 체질에 안 맞은 일을 하시군요. 선비가 어찌 장사를 한다는 말씀이시오. 본래의 길을 가시는 게 빠른 길입니다.”
“장사라는 것은 속이고 속히는 업이니까 어찌 당해내시겠소. 학문과 관련된 일을 하시기 권해드리오.”
“이왕 장사를 하신다면 책장사를 하시던가요. 그래도 선비 하고는 어울리지 않던가요. 배운 주역으로 운명철학도 곁들여하시면 그럭저럭 자식들 공부는 안 시키겠는가요.”
“부산에서는 보수동 헌책방이 잘된다고 하니 고물상에 나온 전과나 참고서를 모아 그곳에다 넘기면 돈을 좀 만질 수 있을 겁니다.”하고 어느 선비 같은 어른이 충고한 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로소 희망의 빛을 찾은 모양이었다. 조상볼 면목도 없이 빈털터리가 된 그는 이리저리에서 융통한 몇 푼 안 되는 종잣돈으로 고물상에 나온 헌책들을 수집하여 보수동 헌책방에 파니 조금씩 수입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리어카를 한대 사서 좌판을 만들어 직접 헌책을 팔기 시작하였더니 수익이 훨씬 나아졌다. 또 학생들이 좋아하는 만화책도 팔고 또 빌려주고 간간이 나오는 휘귀한 고서적은 별도로 집에 보관하였다. 대청동 미공보원 골목에다 좌판을 벌이니 한 번씩 단속 나온 구청공무원이나 경찰들이 리어카를 끌고 가기도 하였었다. 한 번도 법을 어겨본 적이 없는 선비가 졸지에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는 경범죄를 받기도 하였다. 그 명당 아닌 명당자리를 지켜야 하니 반복적으로 법을 위반하게 되어 결국에는 리어카까지 압수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경찰을 겁내고 관공서를 두려워하는 트라우마에서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했다.
일제 때 그의 아버지는 징병으로 끌려갔다. 진해에서 해군병으로 입대하여 대동아전쟁터로 참전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의 큰어머니이기도 양모이기도 한 유동댁은 집안의 대가 끊길 위기가 닥쳐오자 나섰다. 이미 친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갔기에 진정서를 넣어 참전 만은 막아냈다. 또 일본군부에서는 신원조회를 해보니 극렬한 독립투사의 아들인 것을 알고 불령선인으로 낙인찍어 귀향조치를 하여 무사히 돌아왔던 역사가 있었다.
또 한 번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왔고 그것은 피하기가 힘든 눈앞에 닥친 상황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가의 아들인 그의 아버지는 보도연맹원으로 분류 돼버렸었다.
“아, 큰일이 났네. 우리 아랫동네부터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집집마다 수색을 하고 있다고 하네. 벌써 몇 명이 오랏줄에 묶여 트럭에 실렸고 윗마을에도 들이닥쳤다고 하네.”하고 아랫동네에 있는 안촌할매가 뛰어와서 큰 할매에게 털어놓는다. 불길한 예감이 스쳐오기에 그냥 놔둘 수는 없어서 윗집 논실할매집으로 아들을 도망가서 숨으라고 한다. 그런데 집을 수색하고 그의 아버지가 안보이자 윗동네로 막 올라가는 참이었다. 그때 허겁지겁 아버지는 논실할매집으로 들어가서 숨을 곳을 찾는다.
“아이구, 야야, 무슨 이런 일이 있노. 집안에 숨으면 틀림없이 발각될 것이니 변소에 가서 앉아 있다가 나오이라. 여기 수건을 줄 테니 머리에 동여매고 여자인척 하고 기침도 안 하고 쥐죽었는 듯 있거라.”하고 논실할매가 여자들이 일할 때 쓰는 수건을 그의 아버지 머리에 동여매어 준다. 그때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이 집에 바로 밑에 사는 할매의 아들이 들어왔지요. 어디에 숨겨 두었는지 말을 하소. 거짓말하면 큰 죄가 되니 그리 알고 바른대로 말하소.”
“지금 무슨 소리를 한단 말이요. 그런 사람 숨기지도 않았고 숨을 만한 곳도 없으니 그리 아소. 나는 지금껏 거짓말한 적도 없고, 절에도 다니는 데 어찌 그런 거짓말을 하겠소.”하고 논실할매가 아주 위엄 있게 나무라듯이 당당하게 말한다. 군인들은 이곳저곳 수색해도 안 보이니 가만히 변소 쪽으로 눈길이 가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그 몇 명이 변소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을 보고 논실할매는 큰 소리로 나무란다.
“지금 젊은 군인들이 무엇하는 소행이요. 거기에는 우리 며느리가 용변을 보고 있는 데 옷을 벗고 궁둥이를 까내리고 있는 모습을 뒤비보고 싶다는 말이요. 젊은이들은 어머니도 누이도 없는 사람들이요. 만약에 문을 여는 행패를 부리면 가만히 안 있을 거요. 어디 몹쓸 짓을 하기만 해 봐라 가만히 안 있을 끼고, 나중에 어느 집 아들인가 꼭 파내어서 망신을 시킬 테니까.”하고 논실할매가 큰 소리로 엄하게 꾸짖는다. 그러자 군인 한 명이 변소 문을 열지는 않고 문틈으로 살며시 보니 여인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대장님, 저 할매 말씀처럼 며느리가 용변을 보고 있네 예. 다른 데로 달아난 모양인데 빨리 서둘러 찾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습니다.”
“그래, 저 할매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 것 같고 절에 다닌다고 하니 믿어야지. 부처님께서 거짓말이 큰 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 자 빨리 윗동네로 수색을 가자.”하고 대장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끝나고 그의 아버지는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졌다. 전쟁이 끝나고 보도연맹사건은 함께 종결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치유하기 힘든 트라우마로 다가왔다. 그 이후 그의 아버지는 병석에 눕게 되었고 신경쇠약으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다. 그 후 아버지는 몇 년간을 끊임없이 방황하였다. 그의 생모는 행방불명이며 양자로 간 큰집 어머니도 피난 갔다 온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으니 의지할 데가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신경쇠약을 치유하기 위하여 몇 번씩이나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고, 그도 그때를 아련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헌책을 리어카에다 팔다가 적발되면 선비의 체면을 내려놓고 사정을 하기도 하였지만 상습적이었기에 파출소로 연행되어 가기도 하였다. 내버려 두곤 간 헌책좌판 리어카는 홀로 골목을 지키고 오가는 길손들이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에 그것을 해결해 줄 친인척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체면이 허락하지 않았고 시골에 소문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도청의 내무국장이 사촌처남이요 도경의 경무과장이 고종사촌이 아니었던가. 그들에게 전화 한 통 하면 해결될 수가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소문이 퍼져나가는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오직 스스로 해결하거나 정상참작을 바라는 은혜를 입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버지, 고모부에게나 고모할매 아들에게 부탁하면 안 될까 예. 지금은 상습적인 위반이라 해서 리어카도 압수당하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예.”하고 그의 형이 건의를 하였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소소한 적발은 파출소에 가서 그의 형이 사정하여 해결하였지만 이번만큼은 역부족이었기에 한말이었다.
“허허, 쓸데없는 소리. 지들도 어려운 사정을 알면 선처해 주겠지. 내가 이 나이에 남한테 부탁 한번 한 적도 없는데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하고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한다.
그의 아버지는 선비로서 자존심을 엄중하게 여겼다. 처음은 대나무 장사로 실패를 하였었고 다시 헌책이지만 책을 파는 장사를 하게 되어 선비로서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져 버렸다. 그런 모습이 고향이나 친척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또 점포가 있는 헌책방도 아니고 노점에 펼쳐 놓은 행상이니 아는 시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갓 대신 모자를 눌러쓰고 사람들의 눈길을 피했다. 옷차림도 남루한 행색이다 보니 힘 있는 친척이 있다한들 오히려 그들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을 아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만약에 경찰서나 구청에 불려 간 모습을 직접 보았다면 높은 지위의 사촌처남과 고종동생이 몰락한 선비의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할 것으로 여겨 더욱 그랬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영광과 환희의 시절도 있었다. 그 당시에 중학교를 졸업하였다면 고학력에 들어갔으니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다. 60년대 초 지방자치시대가 처음으로 열리게 되어, 군 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읍내의 재력이 있는 유지와 맞붙었는데 넉넉한 표차로 이긴 것이다. 그 배경에는 독립운동을 한 친할아버지의 후광이 작용했고, 지역 향교의 장을 맡고 있던 둘째 할아버지의 힘이 매우 컸다. 불우하게 자란 조카가 성공하기를 바랐던 진심 어린 후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광과 환희의 시간도 잠깐, 일 년이 못되어 5.16 정변이 일어나 지방자치제도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남달리 특이한 성격이었다. 겉으로는 감정표현을 잘하지 못하고 웃음도 울음도 좀처럼 표출하지 않았다. 좀처럼 웃지를 않았고 좋은 일에는 고개만 끄덕이었고 슬픈일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한 번도 웃어보지 못한 세월과 숱한 슬픔에 만성이 되었는지 냉정하게 보였다. 내면으로는 표출하지 못한 울음을 삼키고 일과성의 웃음이 아닌 지속적인 것을 바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정하게 보이면서도 속정은 깊었으나 울지를 못하는 것은 환경이 만든 장애라고 할 수 있다.
내일이면 설날인데 낙골양반은 아직 소식이 없었고 철없는 어린 동생들은 떡국거리 써는 것에 관심이 갔고 아버지의 귀환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외상으로 사다준 운동화를 만지작 거리며 내일 설날에 신고 나갈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도 명절이면 꼭 찾아오는 아버지인지라 어머니는 저물어 가는 밤을 눈대중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가늠하였다. 누구보다도 효성이 지극한 낙골양반이 아니던가. 비록 자신을 일찍 남겨두고 간 친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큰집 양부모와 그 윗대의 조상들까지 장손으로 해야 할 의무를 다해왔지 않았던가. 항상 “조상을 잘 섬겨야 하느니라”하고 입에 닳도록 말하지를 않았던가. 옆집인 국산댁에는 아들들이 내려와서 북작지껄하고 윗집인 정동댁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 집안은 자식들이 공부에는 재주도 없고 관심도 없기도 일찍이 스스로 도시로 나갔었다. 그래도 부모가 그리운지 명절이면 멋지게 옷을 빼입고 어깨를 흔들며 자기 집으로 찾아오지 않은가. 그런 모습들을 보니 낙골댁의 마음은 조금은 서러워진다. 이제 밤은 어두워지고 아직도 기별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리어카에다 헌책을 펼쳐놓고 팔았으며, 사주. 작명이라는 입간판도 세워놓고 운세를 보아주었다. 한문은 물론 주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주변에 차츰 뜻을 알아주는 친구 아닌 친구가 생겼다. 양복을 입은 신사와 군용잠바와 방한바지를 입은 노점상과의 교류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어둠이 주위에 깔려오고 더 이상 장사를 하기 힘든 시간대가 오면 포장을 덮고 인근의 보관소까지 밀고 갔다. 그는 그런 아버지의 노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자만 그쪽 방향으로 가는 것을 가급적 피했다. 아버지도 그런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기도 꺼려했고 그도 얄팍한 체면 때문에 외면하는 불효를 저질렀다.
그의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달동네에 있는 셋방으로 돌아올 때마다 종이봉투에 호떡이나 찐빵을 사갔고 왔다. 항상 배고픔에 시달리던 형과 그는 아버지의 인기척이 들리기를 고대하였다. 아버지의 무사귀환보다는 호떡과 찐빵이 눈에 아른 거렸으니 배고픔은 견디기 힘든 욕망이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노점에서 호떡을 주로 샀고 호떡장수가 안 보이는 날은 찐빵을 사 왔다. 그 누런 종이봉투에서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떡과 찐빵을 빼앗다시피 받아 들고 우적우적 먹는 모습을 아버지는 흐뭇해하였다. 아버지가 문입구에 당도하였다는 신호는 ‘에헴’하는 긴 헛기침이었고 그 소리는 자다가도 펄떡 일어나게 하는 구원의 소리였다. 아버지는 즐겁거나 의미 있는 일에는 꼭 헛기침을 하였다. 아마 다행이고 즐겁다는 의사표시이었을 것이다.
이제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도 아버지의 귀성소식은 돌리지 않았고 어머니는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그간 편지 한 통도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낙천적인 어머니도 불안해지는 모양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명절 차례와 제삿날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지난 한 해에는 그렇지 못했으니 걱정이 들만도 하였다. 스스로 마음을 달래기에는 한계에 다 달았는지 어머니는 형과 그에게 한마디를 한다.
“야들아, 너그 아부지가 아직 소식이 없네. 객지에서 무신 일이 있는 건지 섣달그믐인데도 오시지 않으니 불안타. 너그들이 한번 가야역까지 한번 나가봐라.”
“아마, 집에 돌아오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는지, 낮에는 고향에 얼굴을 드러 내놓기가 어려운 긴지 알 수가 없구나. 워낙 자존심이 쎈 양반이라서 말이다.”
“아마 온다고 하더라도 사람 눈을 피해서 마을 입구를 피해서 뒷길로 올 것 같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사람들 눈이 겁나는가 보제.”
“지금 바로 너그 둘이서 가야역까지 가보고 기차를 내렸다면 부축하여 오거라. 워낙 조상을 잘 모시기로 소문이 나서 아마 오시기는 오실 것이라고 보인다.”하고 그의 어머니가 그와 형에게 한말이었다.
그 형제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자갈길 신작로를 따라 가야역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고향을 찾아오는 귀성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손에는 술병이나 선물이 들려있었다. 한 번씩 보기 힘든 코로나 택시가 흙탕물을 튕기고 지나가고 한 번씩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부지런히 걸으면 한 시간 안에 가야역에 닿을 것이다. 과연 오실지 안 오실지 궁금하였지만 마중을 가는 게 도리고 그것은 희망이기도 하였다. 오시더라도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하였고, 패잔병의 모습이더라도 나타나기만을 기도하였다. 이윽고 가야역 대합실에 도착하였고 기차시간표에는 이제 막차만이 남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서 실패한 이후에는 절망감에 사로 잡혀 밤잠을 못 자고 끙끙 앓았다. 그 조상들의 유산이기도 후손들의 생명줄이기도 한 논을 다 팔아서 사기꾼에게 갖다 바쳤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아버지는 선산의 산소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불효를 고하고 나아갈 길을 물었다. 증조에서 조부모와 부모까지의 묘소를 돌며 술잔을 치고 간절히 물었다. 재산을 못 지킨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땅을 치며 물었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찬바람이 귓전을 세게 때리며 지나갔고 소쩍새가 구슬프게 대신 울어주었다. 아버지는 일어섰고 새로운 결심을 하고 산소를 내려왔다. 그 결심은 자식농사를 잘 지어 다시 가문을 회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헌책 노점은 그런대로 장사가 되어 두 명의 아들을 공부는 겨우 시킬 수가 있었다. 또 취사나 빨래는 둘째이자 그의 누나가 올라와 야간여상에 다니면서 종고모댁에 기거하며 해결해 주었다. 문제는 시골에 남겨둔 어린 아들과 딸이 걱정되었지만 앞선 애들을 먼저 공부시키면서 상황을 보아가면서 하기로 하였다. 자식들이 어쩐 일인지 공부를 잘하니 한편으로 고맙지만 책임감으로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이제는 부부가 역할분담으로 자식들을 나누어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작은 애들은 불평도 없이 이삭을 줍고 나무도 해오고 하여 그런대로 성장해 갔다. 문제는 월사금이었고 그것을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타고난 화술과 사교성으로 해결해 나갔다. 교장선생을 찾아가서 등록금 면제 협상을 성사시켜 큰 걱정은 덜었다. 간간이 부잣집 간의 중매를 하여 복채를 크게 불러 챙겨서 생활비를 해결해 나갔다.
산소에 가서 조상들에게 빌고 내려온 그의 아버지는 다시 부산으로 진출하였고, 그 어려운 사정을 아는 그의 종고모이자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이 모아놓은 금반지와 패물을 팔아서 종잣돈을 몰래 쥐어주었다.
“오빠, 이 돈은 이서방 몰래 드리는 거니 모른 척하고 받아 주이소. 갚을 필요도 없으니 편하게 종잣돈으로 쓰세요. 종손인 오빠가 잘 되어야 우리 문중이 잘 안되겠능기요.”
“허허, 내가 이렇게 손을 벌리다니, 동생 고맙다. 후일에 잘되면 꼭 갚을께. 남들한테 소문이 안 퍼져 나가야 할 텐데. 꼭 불출 짓을 하는 같기도 하고 민망타.”
“오빠, 내가 출가외인이지만 가문의 덕을 많이 받고 애들이 머리가 좋아 공부도 잘해서 직장도 좋은데 잡고, 이서방도 관운이 있어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 아닌교.”
“하하, 그러고 보니 동생도 조상들의 덕을 좀 본 것 같기도 하네. 자네 아이들이 머리가 좋은 게 외탁을 한 것이라고 보이기는 하네. 이돈 잘 쓸게.”하고 아버지와 그의 종고모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아버지는 종고모가 마련해 준 종잣돈으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어디 선비가 장사꾼들의 틈에서 성공하기가 쉽겠는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사농공상의 벽을 깨고 대나무 장사에 뛰어들었다. 분명 수지는 맞는 장사인데 남는 게 없고 줄 것은 다 주고 받을 것은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발생하였다. 시간의 문제지만 곧 실패를 안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때가 그의 형은 대학입시 준비를 그는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산에서 일류중학교 시험을 보는 날에 아버지는 나타나셨다. 그 전날 국제시장에 가서 목깃에 털이 보송보송 달린 방한 잠바를 사주셨다. 입학시험을 치는 고사장에 직접 나와서 점심때에는 합격하라고 끈적끈적한 팥죽을 사주셨다. 그리고는 합격 발표를 보지 못하고 대나무를 사러 하동으로 떠나갔다.
이제 형과 그는 가야역에서 다음 마지막 기차가 올 때까지 초조하게 아버지를 기다렸다. 대합실에 걸린 시계는 9시가 넘었고 바깥에서는 아직도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부산방향에서 오는 기차가 한편이 남았고 진주방향에서도 역시 한편이 남았다. 그 양방향에서 오는 기차에 타지 않았다면 못 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금 기다리니 부산에서 오는 증기기관차가 정차하였고 설명절을 보내려는 귀성객들이 줄지어 내렸다. 그의 형제는 유심히 손님들 틈에서 아버지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그 기차의 마지막 손님이 나올 때까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제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진주방향에서 오는 기차를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그의 아버지의 대나무 장사도 실패로 돌아갔다. 설대목에 집에 돈을 보내려고 하나 수금이 되지도 않았고 어디서 융통도 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난감한 지경이었고 고향에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 사촌여동생이 마련해 준 그 귀한 종잣돈도 다 날렸으니 앞날이 캄캄하였다. 무슨 면목으로 아내나 자식들의 얼굴을 볼 것인지 궁리를 하였지만 난감하였다. 수중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어떻게 설을 쇠며, 부산에 있는 큰아이와 둘째 아이의 학비는 어떻게 댈 것이던가.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빚은 어떻게 할 것이며 빚쟁이로부터 받는 수모를 어떻게 견뎌낼 것이던가.
현실적인 상황으로는 고향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안 가면 지금껏 잘 모시던 조상에 대한 막심한 불효를 짓는 것이었다. 울고 싶기도 자신이 밉기도 하늘이 무심하기도,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그 절망이라는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의 인생에 한 번이라도 양지가 없었고 항상 암울한 음지만이 있지 않았던가. 어찌 처절한 운명이 그토록 끊임없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단 말이던가. 지금의 현실이 꿈이기를 바랐지만 하늘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갈까 말까 심하게 망설였다.
이제 가야역 대합실에 걸린 시곗바늘은 9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0시 차가 막차이니 예정된 시간이라면 잠시 후에 기차가 도착하여야만 한다. 시간이 10시 20분이 되어도 기차는 도착하지 않았고 대합실에도 기다리는 손님도 없었고 오직 그의 형제들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가 연착을 하는 것인지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늦게라도 기차는 오게 되어있다고 하였다. 기차는 온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타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바깥에는 아직도 진눈깨비가 하염없이 찬바람에 날리며 내리고 대합실 창문은 뿌엿게 흐려져 있었다. 즐거운 설날이어야 하는데 어찌 쓸쓸하게 눈 섞인 비가 내리는가.
이윽고 시곗바늘은 10시 30분에 도착해 있었다. 그때 서쪽 방향에서 묵직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그 형제의 가슴은 두근거렸고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승객들이 보타리를 들고 하나씩 플랫폼에서 대합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형제는 고개를 쑥 빼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줄줄이 들어오는 손님들 중에서 남자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보았지만 낯익은 얼굴은 보이 지를 않았다. 이제 띄엄띄엄 한두 명씩 대합실로 들어섰고 증기기관차는 누구를 부르듯 기적을 목 터지게 울리고 바퀴사이에 증기를 내뿜으며 출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역두에 선 가로등의 불빛만이 외롭게 비추고 있었다. 그 형제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한 마디씩 한다.
“아마, 못 오시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옛날부터 아버지는 걸음이 느렸고 항상 뒤에 서는 습관이 있었으니까.”
그때 플랫폼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웬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 나오는 게 아니던가. 양손에는 무슨 대나무 광주리와 보자기가 들려있었다. 점점 대합실 쪽으로 다가오니 얼굴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바로 그의 아버지였고 마지막 기차로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던가. 그의 형제는 반가워서 쫓아가서 마중을 하니 그의 아버지는 놀라면서 반겼다. 그 부자들은 섣달 그믐날 늦은 밤에 극적인 해후를 하였다.
“야들아, 추운데 뭐할라고 마중을 다 나왔노. 그래 집에는 큰일은 없나.”하면서 몇 마디를 던지고 난 뒤에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질퍽해진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기차는 기적을 다시 한번 크게 울리면서 마산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세 부자들은 말없이 걸었는데 좀처럼 아버지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옷차림은 바랜 양복에 외투도 없어 추워 보였다. 예전에 호떡이나 찐빵을 사 올 때 하던 헛기침도 없었다. 긴 침묵이 암시하듯 심란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축 처진 어깨는 삶은 의욕이 소진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의 형제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지 한 번씩 얼굴을 쳐다보곤 하였다.
“아버지, 동생이 부산의 일류중학교에 합격하였심더.”하고 그의 형이 짤막하게 이야기하였다.
그 순간은 그의 아버지는 갑자기 ‘에헴’하면서 헛기침을 하는 게 아니던가. 갑자기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걸음걸이도 힘이 났다. 그 한마디가 무슨 큰 영향을 미쳤던지 웅크렸던 어깨는 펴지고 보이지 않는 의욕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 한마디는 듣고 싶었던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이었던가. 아버지는 점점 말이 많아지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하니 어느 듯 집 입구에 도착하였다. ‘에헴’ ‘에헴’하고 아버지는 두 번 연거푸 헛기침을 하니 어머니가 달려 나오고 동생들도 뛰쳐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어두운 객지생활에서 벗어나 무사히 고향에 귀성하였다.
설날 차례를 다 모시고 나서 동네의 어른들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주안상을 앞에 두고 주고받은 이야기이다.
“축하하네, 자네 아들이 그 어려운 부산의 일류중학교에 합격하였다면서...... 우리 면에서는 그 일류중학교에 합격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하데.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오늘 설날이지만 한턱 크게 내시게. 애들이 머리가 천재야 천재! 그동안 객지에서 고생한 보람이 있네.”
“논이 많고 돈이 많으면 뭐 하나. 자식농사를 잘 지어야 진짜 성공한 거지. 안 그런가.”
“자네가 조상을 잘 모시더니만 음덕을 입은 거라고 봐야제. 올해 설날은 정말로 집안에 경사가 난 셈이네.”하고 동네 친지와 친구들이 축하를 해주니 그간에 그늘졌던 아버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그때를 계기로 다시 새 출발을 하였고 자식농사를 잘 짓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맹세하였다. 그 마지막 도전은 헌책을 싸게 사서 파는 일이었다. 이제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에헴’하는 헛기침 소리는 지금도 귓전을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