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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20. 돌탑은 말하지 않는다

어느 두 명의 제대 군인들이 5.18 민주항쟁을 회상하며 적은 이야기

by 벽운

돌탑은 말하지 않는다


삼월초의 날씨는 포근하지만 한 번씩 불어오는 찬바람은 아직도 봄이 다 오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고향의 산천도 남도의 훈풍을 맞으며 생명의 숨을 쉬려고 하고 있었다. 간간이 내렸던 봄비는 제일 일찍 꽃을 피우는 산수유와 함께 진달래도 키워나갔다. 어찌 봄이 오면 산수유와 진달래가 제일 먼저 필까. 기다림에 지친 봄처녀는 꽃바구니 속에 먼저 담을 것을 무엇으로 정했는지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 산은 무엇을 안고 숨을 쉬고 있을까. 꿈을 안고 추억을 안고 기억을 안고 숨을 쉬고 있겠지. 좋은 계절에다 호시절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경전선 열차를 타고 평촌역에 내린 것은 한낮 무렵이었다. 넓게 펼쳐진 들길을 따라 낙남정맥이 여항산에 이르기 전에 잠깐 솟아 오른 오봉산 자락에 있는 성전암을 올랐다.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른 성전암에서 저 멀리 펼쳐진 고성 방향은 평야와 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시 방향을 틀어서 여항산 쪽으로 나아갔다. 초행길이고 지도도 없이 그냥 저 멀리 보이는 여항산을 향해 무모하게 걸어갔다. 오르락내리락 옛날 나무꾼들이 오르내리던 길의 흔적을 따라서 나아가니 어느덧 해는 중천을 벗어나고 있었다. 낙엽에 미끄러지기도 자빠진 고사목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며 겨우 여항산 자락에 올랐다.

다시 여항산 미산재의 갈림길에서 항상 다니던 미산저주지가 아닌 여양리 방향으로 틀었다. 이미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물어 가기에 서둘러야 했다.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너덜겅이 있는 지역에 조그만 전원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먼 길을 걸어왔고 목도 축일 겸 그 집으로 들어섰다. 집옆의 여러 군데에 돌탑이 눈에 들어왔고 덩치가 큰 주인인 듯한 사람이 돌멩이를 고르고 있었다.


“아이구, 어디서 오시는 길이신지 많이 지쳐 보이시네요.”

“평촌 성전암을 거쳐 이곳까지 왔습니다.”

“뭐시라구요, 엄청나게 걸어오셨네요. 왜 그곳 성전암에는 가셨던가요. 거기가 인조가 피해있던 암자인데요. 나중에 반정으로 정권을 잡았었지요.”

“그런 사연이 있군요. 선생님께서 그곳 지리를 잘 아시네요.”

“내가 그 옆에 있는 군북 명관 출신이지요.”

“그런데 고향 근방에 집을 안 짓고 외딴 이곳에 사시는지요.”

“사람 사는 곳이 어디 정해져 있던가요. 참 선생님은 하필 음산한 이곳으로 내려오셨던가요.”

“여양리가 좀 그런 것 같네요. 옛날 우리 동네 아주머니가 비슬댁이라고 이곳 출신이라고 합디다.”

“여기 바로 아래 마을이 예전에 비슬이라고 했지요. 좀 애처로운 마을입니다.”


그 집주인은 나와 나이가 비슷하게 보였고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모양이었다. 얼굴은 수염을 길렀지만 피부는 그런대로 탄력이 있었다. 손을 보니 거칠었고 주먹은 돌덩이 처럼 매우 컸다. 그의 표정은 밝은 듯하면서도 어둡게도 보였다. 혼자 살기에 사람이 그리웠던지 대화가 고팠던지 반가워하며 막걸리를 한 주전자 들고 나오는 게 아닌가.


“그곳 이수정 마을은 우리 고모님이 시집가서 사셨던 동네이지요. 명관댁이라고 말입니다.”

“그 명관댁은 잘 알지요. 딸만 여섯이었고 그 막내가 저하고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이름은 말숙이고요.”

“그러면 저보다도 몇 년 연배이시겠네요. 그 막내가 내보다도 두 살 위 인데요.”

“하하, 오랜만에 한번 웃어 보네요. 내야 여기서 사람 볼일이 없다 보니 벙어리가 다되어 간답니다. 자, 막걸리 한잔 하시지요.”

“목도 출출하던 참에 잘됐네요. 그런데 돌탑을 쌓고 계시네요. 선생님은 도인 같기도 합니다.”

“허허, 지은 죄가 많아 참회를 할 겸 잡념도 없앨 겸 쌓고 있지요.”

“무슨 죄가 있다길래 그러신가요. 인상을 보니 선하게 보이시는데요.”

“예. 사람은 겉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속도 들여다보아야지요.”


그 집주인은 생각보다는 마음속에 담아 놓은 사연이 많았던 것 같았다. 혼자 살면서 수염을 기르고 돌탑을 쌓고 지은 죄가 많다고 하니 그 사연이 궁금하였다. 또 친구도 없다고 하였다.

그 집주인이 성전암에 기거하던 인조가 반정으로 집권하였다는 말이 떠올랐다. 조선에서는 몇 번의 반정이 있었고 그 반정의 주역들은 군사를 동원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으니 현대판 쿠데타가 맞았다.


그 집주인이 오월이 오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부인은 지금 사는 곳이 무섭다고 부산의 딸 집에 있고 아들은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산다고 하였다. 왜 그의 부인이 그 집에 사는 게 무섭다고 하였을까? 그곳 여항산은 6.25 전쟁 때 인민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계곡과 능선에는 수많은 군인들의 유해가 묻혀있다. 소문에 의하면 날이 흐린 날 밤에는 귀신불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무슨 곡성같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였다. 여양리 사람들은 살기가 무섭다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거의 다 가버렸다. 또 하나 그곳에 있는 비슬광산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보도연맹원들을 끌고 와서 집단학살한 장소였다. 그런데도 돌탑집주인은 혼자서 겁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몇 년이나 흘렀다. 어느 해 오월 달을 틈타 군북역에 내려 의상대 절을 참배하기 위해 여항산을 찾아갔다. 사촌마을 저수지를 거쳐 가파른 길을 걸어 의상대에 도착하였고 순례객들의 틈에 섞여 참배를 마쳤다. 다시 여항산의 다른 봉우리인 전투산을 거쳐 미산재에 다다라 몇 년 전 걸었던 여양리 방향으로 틀었다. 그 길을 잡은 것은 돌탑주인집을 들러고 싶었서였다. 한참을 내려와 돌탑집에 도착하였는데 문이 잠겨있어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아쉬움을 달래며 마지막 버스를 타고 대정마을에 내렸다.


나는 여양리를 거쳐 내려오면 들르던 음식점에 들어갔다. 안쪽 탁자에 자리를 잡아 마산 가는 버스시간까지 천천히 술을 마시기로 하였다. 몇 년 전 그 돌탑집을 거쳐서 비슬광산을 다녀왔을 때도 그곳에서 소주를 마셨다. 주인아주머니는 기억이 안 나는지 아는 체를 안 하였고 표정이 없이 식탁을 닦고 주문을 받았다. 소주를 근 반 병 가까이 마시고 있으니, 그때 문을 열고 수염을 기른 남자 한 명이 들어서는 게 아닌가. 그는 반대쪽 구석에 있는 탁자에 앉아 술과 안주를 주문하는 모양이었다.


“보이소, 아지매. 여기 차돌배기에다 소주 한 병 주이소. 피 묻은 고기는 빼고요.”

“김사장님이 오랜만에 오셨네요. 오늘은 어디 갔다가 오시는 길인기요. 절에 갔다 오셨능기요.”

“아따, 그건 물어서 뭐 할라카요. 산에 있다 보니 그 넘의 고기냄새가 그리워 왔소.”

“그라면 나는 보고 싶지 않더란 말인기요. 각시도 자주 오지 않는다 카더만요. 조용히 슬쩍 오면 될 낀데요.”

“이 나이에 보고 싶은 기 있기나 하것소. 고기냄새도 맡고 싶어서 왔다 안카디요. 말귀를 영 못 알아듣네.”하고 과부인 듯한 주인아주머니와 야릇한 농이 섞인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씩 얼굴을 돌리는 모습을 보니 어디서 한번 보았던 인상이었고, 유심히 관찰해 보니 돌탑집주인이 맞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농담은 잘 안 하는 성격 같았는데 좀 의아스러웠다. 어디서 전주가 있었던 건지 얼굴이 불그스름하였고 혀가 꼬인듯 약간 취기가 있었다. 그는 일어서서 그 돌탑집주인 쪽으로 갔다.


“여양리 돌탑집주인이 맞으시지요. 몇 년 전 성전암을 거쳐 내려오던 길에 들렀던 사람입니다.”

“그때 그 조선생님이 맞네요. 오늘 어디서 오시는 길이던가요.”

“사촌을 거쳐 의상대를 순례하고 여양리로 해서 내려왔지요. 선생님 댁에 문이 잠겼더마는 바로 이 집에서 만나게 되었네요.”

“하하, 인연이 되면 만난다더니 인연이 있긴 있는 모양인 갑다. 자, 합석하입시다.”

“여양리로 내려온 건 선생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서입니다. 어디로 출타하고 오시는 길이신지요.”

“마산에서 장도 좀 보고 시장통에서 소주도 한잔 하고, 그냥 갈까 하다가 오랜만에 여기로 왔지요.”

"산에서는 일체 육고기를 먹지 않는답니다. 그 핏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보기 보다 낭만파입니다요. 처음에는 엄숙한 도인처럼 보이던데 말입니다.”

“하하, 내가 산에 살면 도인이지만 세상으로 나오면 일개 촌부와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 집주인은 그날은 기분이 좋은 듯 이면으로는 외로운 듯 보였다. 그는 도인이기도 평범한 촌부이기도 하듯이 기분도 양면성이 있었다. 겉으로 웃는데 속도 그랬을까. 마산 시장통에서 혼자서 술을 한잔하였다는 게 그와 통하는 바가 있었다. 여러모로 그 집주인에 끌렸고 그의 처지가 어떤지 궁금했다. 그의 목소리는 때로는 떨리기도 애절하기도 분노하기도 하였다. 다시 술 한 병을 축내고 나니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어찌 여양리로 들어 오셨나요.”

“군대에서 잊기 힘든 사건으로 사람이 겁납디다.”

“훈련소는 어디 나오셨는가요.”

“창원훈련소를 나와 전라도 31사단에서 근무하였고요.”

“뭐시라고요. 저는 광주 상무대에서 근무하였답니다.”

참으로 보기 드문 현실이었다. 여항산을 동서를 경계로 함께 자랐고, 같은 훈련소며 전라도 지역에서 근무며 이런저런 게 그랬다. 김씨는 아마 군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상무대 어느 부대인가요. 전교사라고도 불렀지요.”

“공병단 123대대에서 좀 고생을 하였지요.”

“123대대는 그해 오월에 우리 31사단에 일시 배속되었었지요.”

“그럴 수가 있나요. 완전히 관할이 다른데요. 그해 오월이면 혹시 80년 .....”

“잘 찾아내셨네요. 5.18항쟁이 있던 그때이지요.”

“계엄군으로 투입되었단 말이시네요. 향토사단도 작전을 하였단 말입니까.”

“예. 특전단은 진압에 투입되고 31사단은 지원부대인 셈이지요.”

“그래서 오월이 오면 마음이 아프다고 하셨군요.”

“그 살상 뒤 수습할 때 처참한 모습이 아직도..... 그 아주머니의 모습이.....”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가 계엄군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니...... 그 순수한 농군 같은 졸병들이 그 충격의 현장에 있었고 인생이력에 지울 수 없는 빨간 줄이 그어졌으니 말이다. 찢어지고 뚫어지고 깨어지고 피가 흐르던 시신들을 기억하게 되니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아지매, 여기 소주 한 병하고 안주 좀 더 주이소. 맨 정신에 듣기가 좀...... ”

“선생님은 5.18 이전에 제대했지만 졸병들이 계엄군이 되어버렸네요.”

“내가 제대할 적에 졸병들 보고 아무 탈 없이 집에 잘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공수단은 눈에 독기가 서렸고 술이나 약에 취했던 것처럼 그냥 마구 살을 헤치는 것은 꼭 백정이나 망나니 같더라구요. 쓰러지며 부르는 이름은 어머니이기도 아내이기도 애인이기도 한 듯하더군요.”

“왜넘들이 3.1 운동 때 우리 국민들을 살상한 것처럼..... 그 우두머리는 아직도 활보하고 있고요..”

“그러니 후일에 또 어느 미친넘이 계엄령을 겁 없이 발령할지 모르지요.”

“그 넘들은 분단 전문 공산당이에요. 왜넘들 때문에 분단되었고, 똥별 그 넘들이 좌우로 또 동서로 분단시켰지요.”


김씨는 5.18 당시에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김상병은 계엄군이 되어 총에 맞고 대검에 찔려서 죽은 시신들을 2인 1조가 되어 트럭에 실어서 통합병원이나 상무대 강당으로 날랐다. 더 이상 수용할 공간이 없었던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시가지에 진달래꽃잎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신들을 수거하여 면장갑을 낀 손으로 트럭에 실었다. 트럭 바닥에는 가마니가 깔렸고 차곡차곡 엇갈리게 장작더미처럼 쌓았다. 어디서 냄새를 맡고 날아왔는지 수많은 쇠파리 떼가 웅웅 거리면서 무슨 장송곡처럼 합창을 하였다. 그 쇠파리들은 쫓아도 쫓아도 귓전을 맴돌며 피냄새가 배어 있는 그에게서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먹이를 찾는 듯 저주를 하는 듯 악착같았다.


다시 호루를 덮고 뒷짝 문을 탕그렁 잠그니 만재한 짐차가 되었다. 카고트럭 몇 대가 쌍라이트를 켜고 출발하였다. 뒷 문짝 틈새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물과 진물이 서로 엉켜서 새어 나와 아스팔트와 자갈길에 빨간 두 줄을 끊임없이 그어 나갔다. 다시 비포장도로로 접어드니 그 끈적끈적한 액체의 줄기는 양쪽에서 평행선을 그으며 흙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그 짐짝 같은 시신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지만 엔진소리에 가려 들리지는 않았다. 한 번씩 요철이 있는 지점에서는 공중으로 붕하며 통째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퉁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허억허억 막힌 듯한 숨소리가 들렸지만 다시 조용해졌다.


얼마 후 무등산 자락 저수지 곁의 평탄한 지점에 트럭들은 정차하였고 운전석에서 병사들이 내렸다. 이미 123 공병대가 파놓은 구덩이가 누구를 삼키려는 듯 큰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다시 2인 1조가 되어 그 짐들을 하역하였고, 나중에는 힘이 부쳐 어쩔 수 없이 막바로 구덩이에 그네 태우 듯 예의 없이 던져 넣었다. 구덩이에 포개지는 순간 ‘허억허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숨 쉬는 소리이기도 가슴에 담겨진 공기가 한숨처럼 빠져나오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그 축축한 짐들은 오월의 뜨거운 폭양아래서 땀을 흘리면서 가련하게 젖어있었다. 그 짐들은 남녀유별도 없이 노소구분도 없이 예의 없게 서로 손을 걸치고 발을 올리며 엉켜져 한 몸처럼 보였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물어 갈때에사 짐들을 구덩이에 다 풀었다. 선임하사의 지시로 가져온 석유통을 열어 그 짐들 위에 고요히 뿌렸다. 그 순간 쿰쿰한 냄새가 찌릿한 냄새로 바뀌었고 그 중화된 냄새는 지금껏 맡아본 적이 없는 괴이한 것이었다. 다시 상관의 지시에 의해 라이터 불에 붙은 불쏘시개를 구덩이 위로 휘익 던졌다. 순간적으로 불길은 크게 치솟아 올랐고 주변은 열기로 뜨거웠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저물었고 주변은 어두워져 불빛은 찬란하였다. 정월대보름 달집을 태우듯이 그 짐들은 서서히 타들어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탁탁, 따닥, 퍽퍽, 피식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다가 그 소리도 힘이 다했는지 해가 완전히 저무는 시점에 맞추어 진정되었다. 인간의 존엄도 인격도 역사도 함께 사라져 버렸고 한 더미의 무심한 짐이 되어 연소해 버렸다.


“술을 좋아하시고 꽤 쎄시네요. 저는 공병대에서 술이 많이 늘었었지요. 기합을 많이 받고 난 뒤에는 술이 막 땡기게 하데요.”

“저도 그 사건 이후에 술이 많이 늘었답니다. 제대 후에는 하루도 술을 안 마시면 견디기가 힘들었으니까요. 또 한 번씩 울기도 하였고요.”

“참, 그리고 돌탑을 쌓는 이유가 특별히 있으신가요. 혹시 빨간 줄과 연관이 있나요.”

“아이구, 그 이야기는 하지 마입시다. 괜히 내 마음도 아프고 선생님도 그럴 것 같아서요. 빨간 줄은 내가 그은 것 하나와 국가가 그은 것이 하나이지요.”

“과거를 잊는 데는 술이 약이니까 한잔 더 받으시지요. 아니면 기억상실증도 좋지만 그건 좀 그렇고......”

“내가 좀처럼 과거 이야기를 잘 안 하는데 선생님께는 많이 풀어놓았답니다.”하고 돌탑집주인은 또 수염의 수풀사이로 한잔을 털어 넣으며 말한다.


김씨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5.18 학살 현장의 또 다른 무엇이 있는지 말을 대뜸 하지를 못했다. 그 어떠한 장면이 뇌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던지, 술김에 한 번씩 고개를 쳐들고 천천히 내리고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고성을 지르기도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였다. 감정이 많이 불안정하게 보였고 때로는 분노와 때로는 두 손바닥을 모으기도 하였다. 감정적 기복이 그렇게 심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의 회로가 수시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말한 두 개의 빨간 줄은 트럭 뒷문에서 줄줄이 쌍으로 새어 나와 하염없이 땅에서 그은 또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일까.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고 다시 헛기침을 하면서 그가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가 6.25 참전용사인데 그것을 부끄러워하더라구요.”

“왜 그럴까요. 대부분은 자랑스럽게 전우회 모자도 쓰고 다니던데요.”

“이곳에서 인민군을 쏴 죽인 것도 있지만, 보도연맹원 학살에 동원되었으니까요.”

“아이구 저런. 보도연맹원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인데...... 강제로 가입하여 죽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죽고.....”

“우리 군북지역에서도 많이 끌려가 죽었고, 아버지가 아는 사람도 몇이 있었나 봅디다. 이곳 비슬광산에 몰아넣어 총을 쏘고 또 불을 질러버렸으니까요.”

“허허, 아는 사람도 있었다니..... 우리 동네에서도 죽은 사람들이 수태기 됩니다. 글도 모르는 사람한테 무슨 종이에다가 이름을 적어다가 도장을 찍었는데 그게 황천길로 가는 차표이었고요.”

“그게 아마 반공청년단들이 사주를 받아서 한 게 맞을 겁니다. 무슨 소 끌고 논가는 농부가 무슨 보도연맹원으로 둔갑한다는 말입니까.”


“아까 말씀하신 빨간 줄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혹시 폭력을.....”

“내보고 빨갱이 새끼라고 하기에 그 넘을 죽도록 패서 유치장 생활을 좀 하였지요. 하나는 나의 양심이 선고한 죄이기도 하고요.”

“허허, 군대도 갔다 왔겠다 부친도 참전용사인데 빨갱이란 말은 모욕적이겠네요.”

“우리 아버지가 빨갱이고 내가 새끼가 되어버리니 앞뒤 안 보고 주먹을 날렸지요. 그러니 친구가 없을 수밖에요.”

“어찌 보면 빨갱이란 말은 틀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광주현장에서 시신을 들어 올리다 몸에 피가 빨갛게 묻었고 양심에도 빨간 줄이 그어졌으니까요.”하고 둘이서 이제 더 깊은 비밀의 층으로 내려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라도 사람들이 부드러우면서도 용감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평야가 많아서 그런지 마음에 여유도 있고요.”

“내가 전라도 고참들에게 세게 얻어맞아 고막도 터지고 했지만 그냥 갱상도의 업보다 하고 원망을 안 합니다. 지금은 말귀를 잘못 알아듣고 술이 만취하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장애를 안고 있지요.”

“5.18은 동학농민전쟁과 닮았지요. 국가의 폭압에 맞서서 싸운 거니까요.”

“그 녹두장군과 농민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니 기질이 있는 고장입니다. 똥폼만 잡는 똥별들과는 다르지요.”

“전라도를 홀대하고 계엄군도 공수단을 보내고 무슨 개 패듯이 하니 그냥 있으면 되겠습니까. 만약에 갱상도에서 그랬다면 난리가 났겠지요.”

“아마 고의로 광주를 택하여 폭동이라 하면서 정권을 확실히 잡으려고 작전을 한 거라 봅니다. 사람 죽이는 작전이라.....”하고 서로는 열을 올리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둘은 경상도 사람으로서 보기 드물게 전라도를 옹호하였으니 그것은 아마 3년간 살았던 주소지였기 때문이었을까. 김씨는 가해에 의한 트라우마로, 나 또한 피해에 의한 폭음과 폭력성이라는 정신적인 장애를 안고 있기에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 후천적 장애를 안고 있지만 가해자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 군대라는 무서운 체제가 가져다준 숙명이었다.


이제 하나하나 김씨에 대한 비밀의 창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술김이 아니면 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풀어놓기가 어려운 이야기들이었다. 김씨는 그 마음속에 담아놓았던 응어리를 풀어놓으니 마음이 후련한지 또 표정이 변하였다. 밝은 표정이라기보다는 옥죄던 기억의 잔재들을 털어 내어 버린 듯이 일시적으로 편안해 보였다. 또 지긋지긋한 지역차별 발언에 대해서 탁자를 탁 치며 분노하였고, 빨갱이라고 몰아부치는 광기에 이를 으드득 거리며 치를 떨었다. 김씨는 그에게 처음으로 그의 심정을 옥수수 알갱이를 털듯이 탈탈 털어놓았다고 말하는 듯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당신이 쏴 죽인 시신들의 뼛조각을 하나하나 수습하여 편안한 곳에 안장시키고 싶어서입니다.”

“아무리 선친의 뜻이라고 해도 나름대로 자기의 인생이 있는데 효자이십니다.”

“효자는 아니고 억울하게 죽은 그분들에게 대신하여 사죄하고 참회하기 위해서라고 할까요. 나에게도 그런 역사가 있으니까요.”

“참, 아들이 미국에 가있다면서요. 외동아들인데 멀리 보내서 마음이 그렇겠습니다.”

“아이구, 그건 내가 원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3대가 군대에 가서 그런 끔찍한 기억을 갖지 않도록 아들놈을 미국으로 아예 이민을 보냈었지요.”

“허허, 3대라...... 자제분은 어떻게 지내는가요.”

“그 넘이 아마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이민 간 것으로 보이기가 싫은지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주한미군에서 3년을 채우고 제대를 하였지요.”

“훌륭한 아들입니다. 이제 3대에 까지 갈 뻔한 기구한 운명은 끝났네요. 선생님도 이제 내려놓으시지요.”

“그런데 아직 하나는 내려놓기가 어렵네요. 그 장면이 꿈속에서 떠나지가 않으니 말입니다.”하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시간은 많이 흘러갔고 마산 가는 버스시간이 임박해 왔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다.


“오늘 부산으로 가셔야 하지요. 마산 가는 막차가 몇 시인지, 아지매 막차가 몇 신기요?”

“예, 9시 반이네요. 이제 한 30분 남았습니다.”

“아이구,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보네. 시간을 많이 빼앗았네요. 나야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니까 빼앗긴 것도 없지만서도요.”


김씨가 아직까지도 털어놓고 있지 않은 이야기가 궁금하였지만 재촉할 수가 없었고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보도연맹원의 유해를 찾아내어 편안한 곳에 안장하기로 하였다는데, 그 돌탑을 쌓을 때 큰 돌을 밑에다 깔고 조금씩 작은 돌로 차근차근 쌓아가지를 않았던가. 맨 밑에 받치는 돌은 유골의 엉덩이와 다리 부분을, 좀 작은 돌은 팔이고, 더 작은 돌은 손가락을, 더 작은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김씨의 집 주변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탑들이 쌓여 있지를 않았던가. 큰 것은 누구이며 작은 것은 또 누구이던가. 앞으로 몇 개를 더 쌓아야 끝이 날련가. 그리고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광주는 언제 찾아가 보셨던가요. 나는 5.18을 겪은 이후로는 못 갔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근무했던 군부대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 이후에는 상무대가 아파트촌으로 바뀌어버려 그 옆의 극락강변에 좀 앉았다 왔지요.”

“그래도 광주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죄를 지었으니 갈 수가 없었지요.”

“나는 그곳에서 많이 두들겨 맞기도 하였지만 내가 3년간을 집처럼 살았던 주소지가 아니던가요. 철조망 너머 아리랑집 나주댁이 많이 생각이 나더군요.”

“아이구, 조선생님이 군대생활서 로맨스가 있었군요. 저도 시내로 외박을 나오면 금남로 거리를 걷고 하였는데.....”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김씨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게 아니던가.


아마 김씨는 광주에 대한 추억이 비극적 장면을 보고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무자비한 진압에 맞선 항쟁의 절규는 환청으로 재생되었고, 총칼에 찔려 죽은 그 피 흐르는 시신들을 트럭에 실어 어디론가 몰고 갔던 그 기억은 살아있었다, 그는 지금 죽기와 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자신이라고 양심은 알려주었다. 양심이란 남한테가 아니고 자신에게 들이미는 잔인한 칼이었다. 차라리 양심을 가지지나 말지 그랬을까.


김상병이 무등산 자락에 시신들을 불태워서 묻어 두고 온 다음 날 광주에는 비가 내렸다. 하염없이 내리다가 잠깐 그치기를 반복하며 숨을 고르듯 내렸다. 간간이 울음소리처럼, 아우성처럼 작게도 크게도 들렸다.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처럼, 어머니가 찾는 소리처럼 애절하게 들렸다. 그러나 대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오로지 부르는 소리만 들렸다. 가까이 있어도 서로 보지를 못하는지 허공에다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부르고 있었다. 아스팔트에 굳어 버린 선혈이 용해되어 흘러내려, 거리는 분홍색 진달래꽃을 펼쳐 놓은 듯 애잔했다. 김상병은 그 비를 흠뻑 맞으며 두 손을 모았다. 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빗물과 섞여 피 묻은 야전잠바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난 후 자신의 심장 부위에서 짜릿하게 가슴을 찌르며 사라졌다.


나는 부산 가는 버스 간에서 김씨와의 이야기를 되새겨보았다. 김씨는 인생의 청춘기에 기구한 사건과 맞닥뜨려졌고 인생은 파괴되었다. 육체적 상처 대신 정신적 상흔으로 불치의 병을 안았다. 기억의 회로를 망가뜨리는 치료가 필요했지만 어디에서도 치료해주지 못했다. 또 그는 빨간색을 보면 놀라고 분홍색을 보면 눈시울을 적시고 피 묻은 고기를 보면 토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차를 몰다가 한 번씩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눈앞이 캄캄해져서 이제는 운전대를 잡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지 않은 또 말할 수가 없었던 그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김씨는 5.18 때 지원부대로 나가서 시민들의 시신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갔다. 작전을 나갔던 동료 군인들 중 몇 명이 제대 후에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 또 모임에서 광주민주항쟁이라고 하였다가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고 폭력을 행사하여 경찰서에 갇히고 집행유예를 받았다. 낮에는 하늘에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밤에만 살짝 하늘을 보고 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역시 김상병과 같은 듯 다른 병을 앓고 있으니 충격이 인성에 미치는 영향은 무서웠다. 김씨는 나에게 인연이 닿는 것 같다고 말하였고 서로는 동병상련이었다. 2.4종 창고에서 곡괭이 자루에 맞서 반항하다가 왼쪽 귀를 맞아 귀를 잃었고 또 나의 길을 잃었다. 그 후 또 하극상이라는 죄명으로 빨간 줄 하나가 그어졌다. 그것은 반항적 기질에 대한 인과응보이었으니 후회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 고귀한 반항(?)이 가져다준 아름다운 훈장이라고 5월은 불러주었다.


나는 김씨를 만나보고 온 후에 도서관에 가서 5.18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여러 가지 자료 중에서 계엄군 차출현황을 보니 김씨가 말한 대로 내가 근무했던 123대대가 31사단에 배속되어 계엄군의 충정작전에 투입된 기록이 나왔다. 어찌 작전의 이름을 충정이라고 하였을까? 그 넘들이 국민을 바보로 알고 지은 이름이었고 그넘들은 낄낄거리면서 바보처럼 웃었다.


다시 자료를 넘겨보니 시신을 비인도적인 방법으로 유기하였다는 기록이 나왔다. 그것은 통합병원으로 싣고 가서 화장하여 어디엔가 파묻었다는, 또 무등산 자락의 어느 계곡에 땅을 파고 한꺼번에 구덩이에 넣어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는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다. 김상병이 싣고 갔던 시신들은 왜 통합병원이나 상무대 강당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것일까? 시신은 염을 하여 장례를 치루어야 하는데 부스러기만 남았으니 아예 흔적마저 지워버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아기가 나란히 죽은 그 구덩이처럼.....나치의 홀로코스트, 빌리 브란트는 찬비 내리는 기념탑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었다.


김씨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것만은 차마 말할 수 없다는 것일까. 사라져 버린 인간의 존엄을...... 또 그 무엇을...... 그가 쌓아가고 있는 돌탑에 비밀이 있을는지, 그렇지만 돌탑은 말하지 않는다.


그 후에 다시 한번 돌탑을 쌓고 있는 장소를 다녀왔다. 그곳에 쌓아가고 있는 돌탑들은 모두 다 흰색의 돌들로 만들어졌었다. 또 마지막 탑머리에는 둥그렇게 큰 돌이 올려져 있었고, 어두운 밤이 되면 별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무슨 천문대의 돔처럼 우주로 신호를 보내기도 받기도 하는 듯하였다. 예전에 없었던 두 개의 돌탑이 더 세워져 있었다. 만삭의 임산부처럼 생긴 돌탑 옆에 아주 작은 아기탑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듯한 특이한 모양이었다. 그 꼬마탑은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듯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는 두 개의 작은 별이 손을 잡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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