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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WATNEUNGA Jul 26. 2022

목마와 숙녀

#제주도 서귀포 #작가의 산책길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이 시를 외운 것은 열두 살 때였다.

공테이프를 카세트 녹음기에 넣고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한 곡씩 정성스레 녹음해서

나만의 음악테이프를 만들던 시절.

녹음을 하기 위해서는

녹음 버튼과 재생 버튼을 동시에 눌러야

녹음이 되었기에

라디오를 켜놓은 후

양쪽 검지 손가락을 두 버튼 위에 올려놓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까지!

그 때 가장 센스 있던 라디오 DJ의 조건은

노래가 나오는 중간에

멘트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혹여 광고나 라디오 DJ의 멘트가 녹음되면

다시 하염없이 기다렸다가

녹음하는 일을 반복했더랬다.

전주가 좋아서 무심코 녹음 버튼을 눌렀다.

바로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어여쁜 목소리로 낭송되는 이 시는

나의 애창가요 테이프 중간에 녹음되었고,

이 노래 테이프를 들을 때마다

이 시를 함께 들었다.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중년이 된 지금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 긴 시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게 되었다.


열두 살 소녀는

시의 첫 소절 '한 잔의 술을 마시고'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어른이 돼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이 시의 의미를 알게 될 거야!"

어른이 된 지금,

열두 살 때의 바람과는 달리

아직도 '목마와 숙녀'의 의미를

속속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박인환 시인이 6.25이후 느꼈을

절망감과 상실감을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인 내가

아무리 중년의 어른이 되었더라도

그 숨은 뜻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젠

'한 잔의 술을 마시고'는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술잔에 쏟아지는 불빛을 바라보게 된다.


그 불빛을 볼 때면

라디오 앞에 귀를 기울이고

가슴 설레며 앉아있던

열두 살 소녀와 마주한다.


오늘도 나는

소녀와 함께 시를 읊조리며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해본다.

우리에게 아름답기만 한 이 길이

예전 여인들에게는 날마다 물동이를 지고 오르내려야 하는 고난의 길이었으리라.

이중섭이 제주도에 내려와 살았던 시절에 매일같이 산책하며 사색했던

'작가의 산책길'은

서귀포 이중섭 생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샛기정, 천지연폭포, 자구리 해안, 정방폭포

로 이어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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