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끝내 온전히 알 수 없지만

#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by 무재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역사의 가해자성 앞에서 그 후손들은 괴로워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가?

모두가 죄의식을 느끼면 그 공동체의 전진에는 방해가 아닐까? 내 조상이 우리 역사의 주역은커녕 저 변두리 어딘가에서 순식간에 잊힌 수백만 중 하나라면, 그래도 내 책임이 있을까?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에픽테토스."

그렇다고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 그건 공동체에 더 큰 재앙이 아닐까. 지배자의 후손이라면 착취와 약탈로 쌓은 풍요 위에 -이제 그 풍요가 아무리 불공평하고 풍화된 것이라 해도- 서 있는 것이고, 피지배자라면 우리가 빼앗겼던 것을, 대물림되어 온 상실과 고통의 흔적을 잊을 수는 없다. 그러니 양쪽 모두 기억은 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가능한 다수는 조상들의 과오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어차피 역사에서 공동체 전체가 어떤 비극에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은 좀체 없다. 과거를 온전히 인정하고 이해하는 일마저 드물다.


오랜 그리스, 로마의 방식이 기독교에 패하지 않고 공존했다는 가정을 한다면, 지난 1500년의 유럽사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기독교가 중세 유럽을 지배하지 않았어도 그리스-헬레니즘 문화가 계승되었으리라 생각되진 않는다. 뿌리 없는 문명, 방랑자, 혁명가, 가난한 민중은 자신을 설명하고 뒷받침해 줄 강력한 무엇을 소망한다. 아무리 해도 세상을 이해할 수 없고 고통의 굴레가 벗어지지 않는다면, 달콤한 거짓말을 마취제 삼고 싶어 한다. 절대적인 권위와 복종을 필요로 한다. 오늘의 짐과 무의미를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들고, 피안의 세계를 약속하는. 인간의 이성과 감정은 때로 원시인과 다를 바 없이 폭력적이고 나약하므로, 그것이 터무니없는 순종과 희생을 강요해도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예속과 굴종의 어느 만큼이 인간의 본성에 포함될까? 우리 역사에서, 또 현재도 종종 사람들은 누군가 자기를 지배해 주기를, 삶의 향방을 가리켜 주기를 바란다. 그게 같은 사람이라면 분노하고 권위가 상상한 무엇이라면 무릎 꿇는다. 그 어느 때보다 자유가 남용되지만 자유롭지 않은 듯 군다.

종교는 인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가치, 안식을 제공했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설득했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여전히 필요 이상으로 우리를 삶으로부터 떨어지게 하고 천착하게 한다. 이 끌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지막 생각이 필요하다.

한 사람에게서 그의 일관성을 찾는 일은, 베틀로 실을 잣 듯 매끄러운 서사를 구축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진짜 '그'를 말하는지와는 별개로 불완전한 일이다. 누구나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말하는 나의 간극에 혼란스러워 본 경험이 있다. 그 분화된 자신들에 누군가는 놀라고 불만족스럽지만, 누군가는 안도하고 대상을 구분 지어 보여주고 싶은 면만을 쪼개어 보여준다.

역사 속 누군가를 읽을 때, 신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렇게 수없이 파편화된 기록을 본다. 아마 그 기록의 다수는 특정 세력, 특정 문화의 승리자가 손수 정리한 것이다. 그걸 고려하면 역사를 아는 것은 지난한 과정과 품이 드는 일이다. 누락된 조각을 뒤적이고 훼손된 것을 복원하고, 복원의 진위까지 가려야 한다. 그렇게 얻어낸 하나의 결과, 하나의 판정 또한 반드시 진실한 것은 아니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분석하고 범주화하고 싶지만 완벽한 이해란 언제나 실패한다. 세상에서 가장 알 수 없는 게 결국 한 사람의 타인이다. 공감할 수 있고 이해를 시도할 수 있으나 끝끝내 체화할 수 없는 나와 다른 존재들. 그럼 이제 이 존재를 그럼에도 새롭게 알아가고 사랑해 볼 것인가, 그 일부만으로 만족하고 기억에서 잘라낼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 줄리언 반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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