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사랑일까?

# 다수의 첫사랑

by 무재

내게 첫사랑은 딱 한 사람으로 수렴되지 않는 존재다. 어린 시절 내 방에서 만큼이나 자주 뒹굴며 놀았던 침대의 주인,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아 형제자매처럼도 여겨지던 애, 은밀한 친밀감을 공유하고 왠지 친해지고 싶었던 위 학년의 선배, 난생처음 다른 단짝의 존재로 마치 실연의 상처 같은 날카로움을 안기던 첫 짝꿍, 단순하고 지루한 청소년 시절의 낄낄 메이트들. 걔를 다른 친구에게 뺏길까 전전긍긍하던 마음과 내가 처음이 아닐 때의 실망감. 그 모든 게 한 사람이 아니고 대단한 우정도 변변찮은 사랑도 아니었다. 사랑의 경험은 그래서 콤플렉스로도 남았다.


늘 내 세상이 무너지고 흔들려 재배치되는 강렬함을 꿈꿨지만, 현실의 사랑은 단조롭고 때로 귀찮고 뭐 하나 파괴할 힘도 없는 것이었다. 너른 호수에 던지는 물수제비 정도의 파문. 의미 없는 감탄사만 남발되는 메시지 같은. 돌연 대화를 절단내고 나가도 누구 하나 상처 입지 않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어느 시간을 상대에게 할애해야만, 어떤 종류의 마음이어야만, 얼마나 높게 요동치는 감정의 파동이어야만 그게 우정이 아닌

사랑이 되는 걸까. 한 발짝만 더 떼면 우리가 되는 관계에서 그 한 발짝을 되돌려 타인이 되는 일은 얼마나 간단한지에 관해서.


죽고 싶거나 살고 싶은 강렬한 충동만이 사랑이라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내가 순식간에 바뀔 수도 있는 게 사랑이라면, 다른 모든 것이 이 하나의 집중으로 무너져 내리는 게 사랑이라면, 나는 한 번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도, 나보다 더라는 것도, 하나의 소실점으로 미친 듯 몰입하는 광분도 내겐 불가능해 보였다. 그건 치기거나 자의식 과잉이거나 몰이해로 보였다. 내게 사랑은 몸 전체를 뒤채는 겨울 바다가 아닌 부슬비 내리는 어두운 호수였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미로였으며 각각의 팔로 감각하고 판단하는 문어처럼 그저 호기심, 파악하려는 시도 같은 것이었다. 갖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고야 마는 결핍이었다.


한 시절의 메모에 나는 사랑하지도, 받지도 못할 것이라는 비관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향해 두 팔 벌렸던 마음들을 아무것도 아닌 양 구겨 던져두는 일이 마땅할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이가 깨지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나? 누구도,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이가 두 눈을 빛낼 수 있을까? 타인을 이해하려 시도나 할 수 있을까. 뭐가 더 무게 나가고 비싸게 쳐주는 관계인지를 비교하려는 건 아니다. 오랜 친구에게 받는 무심한 위로와 데면데면한 이의 세심한 배려가, 관능의 욕구와 너저분한 애증이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음을 이제는 수긍한다. 우정과 연민과 애착과 사랑이 양서류와 포유류만큼이나 다르게 보였어도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작동돼 왔음을 알아간다.


과거의 서툰 실수와 착각, 인정받으려 끙끙대고 지레 포기해 버린 마음도 내게 조금쯤은 사랑이었다. 나만 듣던 은밀한 고백과 동경과 질투를 오가던 혼탁함, 사실 더 친해지고 싶었는데 수줍어 벽을 둔 손짓과 기대에 못 미칠까 두려워 도망치던 그 모든 기억이 그렇다. 점점이 박힌 다수의 기억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눈앞의 호수에 깊이깊이 잠겨보지 못하고 물가만 서성이고 탁하게 소용돌이치는 얕은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나왔을 뿐이어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분류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언제나 거기 있고 싶다. 내가 저 안에 머리끝까지 잠길 수 있을지 여전히 알 수 없더라도, 저 물속에 뭐가 있을지 상상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 결국 실망하고 상처 입고 허탈해지더라도. 늘 사랑을 희망한다. 희망은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에 없던 새로운 것, 한 번도 거기 있었던 적 없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고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만 인식하고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커버사진 출처 : PIXABAY 무료이미지 사용

* 한병철 <불안사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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