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주연과 조연

#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라시드 할리디

by 무재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대대적으로 공습한 영상들이 보도되던 게 기억난다. 불과 몇 년 전에도, 최근에도. 간헐적인 국제 뉴스만으로 저 지역의 분쟁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참담하지만 남의 일처럼 관망되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언론이 늘 충실히 참고하는 미국의 입장-곧 이스라엘의 입장-에 치우친 분석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중동에 새끼처럼 까 놓은 무장 테러 단체들의 잔학함과 자살테러의 악마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60% 정도에 이르는 가자지구의 회색빛 폐허에는 너무 큰 비극이 깃들어 있어서, 무력한 민간인들과 도망갈 곳 없는 거대한 장벽의 대비는 마음을 흔들 수밖에 없으므로, 이즈음의 보도들로 오랜 전쟁의 피해자를 팔레스타인 쪽으로 전환하는 사람이 많았다. 적어도 피해의 규모 면에서는. 감정적으로는.


문화의 힘이 참 강력하다고 느낀다. 압도적인 부와 군사력을 쥐고 야만적인 유색인을 밀어내고 정의롭고 진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백인 히어로의 이미지가 21세기의 사반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굳건하니 말이다. 우리는 이 지구를 구할 용사와 적들을 너무도 쉽게 마음속에 그릴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한 듯 줄을 설 그룹과 아닌 범주는 실리를 떠나 이미 확고하다. 당장 돈으로 살 수 없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이 브랜드 가치, 당연히 이겨야 할 주인공 이미지는 참으로 공고하고 때로 파괴적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바로 그 주인공은 이스라엘과 미국이었고 주인공답게 화려한 외양에 곡절 많은 서사, 가장 영향력 큰 종교 성지를 둘러싼 신비로움까지 부여받았다.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에 수많은 조역, 단역들이 참여하여 얽히고설키며 극을 촘촘하게 구성하지만, 그들은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기껏해야 둘에서 넷 정도의 주연들이 모든 환호와 서사를 독점했었다. 다행인 일이라면 지금은 단순한 선악 구도가 후지게 취급되고 한 명 한 명의 복잡한 다면성이 부각되고 빵 반죽처럼 층층이 쌓이고 얽혀 하나의 맛을 내는 이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번쩍번쩍한 외형에 양심마저 갖춘 백인 영웅이 종종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창백한 흰 피부의 공주님에 대한 끈덕진 심상에도 불구하고 그런 캐스팅이 비난받기도 한다. 실제 세계에서 문명의 기수를 자처한 국가들이 얼마나 깡패 같았는지,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진압하는 세력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독재자나 왕정 아래 숨어 보이지 않는 국민이 한마음 한뜻이 아니라 실은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알고 싶다. 저마다 다른 얼굴의 서사와 기원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미국의 입장, 미국의 조치, 미국의 태도, 미국의 분석, 미국의 요구뿐만 아니라 그 반대편에 대해서도. 전쟁이 유물같이 여겨지는 사람들 한 편에는 그제도 어제도 폭격이 떨어진 도시에서 귀가 멀어 버린 사람들이 있고, 뜨거운 한여름 페스티벌에서 차가운 물줄기가 공기를 떠다닐 때 뉴스에선 비처럼 쏟아지는 노란 포탄과 구불구불 춤추는 방어 미사일의 경로가 송출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비극으로 기억될 장면의 피해자들이 그 피해자성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하여 그 이상의 죽음을 뿌리는 아이러니가 현실이니 말이다. 이 이해하기 힘든 세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치우치지 않는 일이란 게 우스운데 그조차 게으르다. 아는 것, 치우치지 않는 것, 절대적 정의란 없다는 것, 편 가르기에 갇히는 건 무익할 뿐 아니라 무능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 우리는 모두의 역할과 관계를 들여다봐야 할 의무를 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기획을 지속하면서 누려 온 이점은 대다수 미국인과 많은 유럽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대결이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들 눈에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민족국가로 보인다. 비타협적이고 종종 반유대적인 무슬림의 비이성적인 적대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이런 이미지가 확산된 것이야말로 시온주의가 거둔 위대한 업적이며 시온주의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시온주의가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는 <관념과 재현, 언어와 이미지가 문제가 되는 국제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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