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끝에서 버섯을 마주치면

# 세계 끝의 버섯 - 애나 로웬하웁트 칭

by 무재

비가 오면 각기 다른 목소리로 떨던 양철 또는 석면 슬레이트 지붕. 여름이면 마루 한 귀퉁이에서 고요히 춤추는 매콤한 모기향. 날 선 돌무더기와 재빠른 갯강구와 갈색 바닷물. 낮은 둔덕을 편편하게 밟고 풀을 눕혀 만든 덤불 속 은신처. 고사리를 꺾는 초록 손과 산딸기를 따는 빨간 손.

어린 시절이 그토록 강렬하고 친숙한 것은 그 모든 비인간적인 것들 사이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단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겁 없이 탐색하고 어른들은 문 열린 이웃과 거친 기후와 작은 해안 마을 특유의 문화들에 의지했다.


우주먼지론, 양자역학이 제시하는 다중의 세계관만큼이나 포스트 휴머니즘의 영향 아래 있다는 최신의 문화인류학 방향이 시야를 넓힌다. 사물을 포함한 비인간 너머로 맥락을 확장하고 오랜 생물종 분류에 대한 환상을 뒤흔든다. 점점 극심해지는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자주 불안한 노동자 1인 내가 그간 어떠한 문화적, 생태적 얽힘에 관여해 왔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극심한 비관을(물론 희망 또한) 재고하게 되고, 세상엔 균일하고 고정적인 장소도, 균질적인 것들만의 집합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의도적으로든 우연히든 우리는 서로서로 마주치고 오염시킬 것이다. 그 우연성 속에서 뜻하지 않게 협력할 수도 죽일 수도 무심히 스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염과 교란은 예측할 수 없는 다양성을 낳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손으로 부엽토 쌓인 흙 위를 더듬어 나갈 때만 목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그 존재 방식의 패치들이 자본주의와 주변자본주의 모두를 가로지른다는 점, 그러니까 망해버린 폐허에서 버섯이 자라나고 인간은 자유와 돈을 좇고, 땅 속과 공기 중과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몸속에 수많은 비인간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일구어 나간다는 것, 그 모두가 같은 역사를 써 나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나 혼자만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숲의 나무들이 그 아래 펼쳐놓은 광대한 네트워크만큼이나 얽혀 있는 존재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만약 불안정성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조건이라면 어떨까? 아니, 달리 말해서 우리 시대가 불안정성을 인지할 단계에 이른 것이라면 어떨까? 불안정성과 불확정성, 또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무언가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체계성의 중심을 이루는 것들이라면?


어떻게 모임은 그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사건’이 되는가? 한 가지 답은 오염이다. 우리는 마주침을 통해 오염된다.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게 길을 열어줌에 따라 마주침이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차이의 세계에서 서로 대립하는 정치는 연대를 위해 설계된 유토피아적 계획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각각의 생계 패치는 그 자체의 역사와 역동성을 가진다. 그리고 다양한 패치에서 창발 하는 관점을 가로지르면서 축적과 권력을 향한 분노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자 하는 욕구는 자동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어떤 패치도 ‘대표적‘이지 않으므로 홀로 진행되는 각 집단의 투쟁은 어떤 것도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정치의 끝은 아니다. 배치는 우리에게 내가 나중에 ‘잠복해 있는 공유지latent commons’라고 부르는 것, 즉 공동의 목적에 동원될 수 있는 얽힘을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항상 협업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는 협업의 가능성을 통해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하고 이동하는 연합체의 힘을 가진 정치가 필요할 것이고, 이것은 단지 인간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역사’는 인간의 스토리텔링 실천이자 우리가 과거로부터 남겨진 일련의 것을 이야기로 전환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관례적으로 문서나 일기 등과 같이 인간이 남긴 것만 살펴보지만, 우리가 공유하는 풍경에 공헌해 온 비인간의 자취와 흔적으로 관심을 넓히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자취와 흔적은 ‘역사적’ 시간을 구성하는 요소인, 일련의 중요한 사건이 탄생시킨 국면과 우발적인 사건에 의한 우연성의 시기에 생물종의 경계를 넘어서 이루어지는 얽힘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얽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역사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다른 유기체가 ‘이야기를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들은 우리가 역사로 인식하는, 서로 겹치는 자취와 흔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인간과 비인간에 의한 세계 만들기의 수많은 궤적의 기록이다.


진보 이야기를 빼면 세상은 무서운 곳이 된다. 폐허는 버려졌다는 공포를 담아 우리를 노려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지구를 파괴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 다행히 여전히 인간과 비인간의 일행이 함께 있다. 파괴된 우리 풍경들의 제멋대로 자란 변두리를 -자본주의적 규율, 확장성, 그리고 자원을 생산하는 방치된 플랜테이션 대농장의 가장자리를- 여전히 탐험할 수 있다. 우리는 잠복해 있는 공유지의 냄새를 -그리고 찾기 힘든 가을 향기를- 여전히 붙잡을 수 있다.


- 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 중에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