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시간
부쩍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엊그제 같은 내 기억 속 얼굴과 달라진 주변인의 얼굴과 중년이라는, 아직은 낯선 그 단어로 향하는 느낌과 시간의 무심한 무참함이 몸으로 기억으로 실감 날 때 그렇다. 비슷한 나이대의 삶이 정형화되어 가고 비슷한 나이들이 더 이상 무모하거나 신선하지 않게 취급되고 이 나이대라면 해선 안 될 말, 행동, 관계가 주르륵 펼쳐진다. 누군가의 일탈이나 기행에 여지없이 나이 운운하는 댓글이 달릴 때 가끔은 내 나이가 공격받는 느낌마저 든다.
한 세대 전, 두 세대 전에 비하면 나이에 대해 놀랍도록 자유롭고 아무도 내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왜 모두가 모두를 압박하는 기분이 들까. 왜 너무도 쉽게 실패하게끔 할까. 실은 실패가 아닌 일에 대해서도. 하나둘 보이는 주름과 새치와 느림은 자연스럽기는커녕 왜 예고 없는 재앙의 전조처럼만 여겨질까. 어느 아침 문득 달라진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며 통속극의 클라이맥스처럼 가슴이 철렁거릴까.
나는 나이 들어간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와 물리적으로 나이 드는 나의 간극을 자각하는 나는 나이 듦이 무섭다. 조림처럼 줄어들고 선택지가 적어지고 책임만이 커지는 나이 듦이 두렵다. 뻥튀기처럼 커진 저 책임들 속엔 속 빈 미래의 내가 까맣게 졸아들고 쪼글쪼글해진 채 서 있을 것 같다. 돌봄, 병, 일, 공허로 뻥 뚫린 입을 벌린 미래의 시간이 익숙하게 예상된다. 나이 드는 신체, 나이 드는 생각을 밀리미터로 쪼개고 조롱하는 말들이 두렵다. 우리 모두가 이런 두려움을 느끼는 데 전혀 공감 못 하고 오직 젊은 한때만을 얘기하는 게 이상하다. 오직 자신의 동굴 한편에서 무디디 무딘 칼을 휘두르며 쿨한 척,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불쌍한 척, 어른인 척하는 게 웃기다.
지금, 아직 건강하고 가능성 충만한 시기에 늙음에 겁먹고 늙음을 혐오하는 일에 동참하고 질병의 통증을 상상하고 마지막에 겪게 될 고독들을 떠올린다. 상실을 예측한다. 이 비생산적인 일이 불길한 기척처럼 한 번씩 하루를 덮는다.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조망하고 싶은데, 일력 한 장 한 장에 매력과 가치가 같이 뜯기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을 일이란 점점점 더 없어지겠구나 싶은 비관이 든다. 한 사람의 일생이 경제적인 문제로 쉽게 토막 내지는 사회에선 더더욱. 늙고 추하고 가난한 일에 우리는 자비 없이 서로를 욕하고 압박하고 무례하다.
목적 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낸시의 어머니와 함께 만을 헤엄치던 남자는 자신이 가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꾼 적이 없는 곳에 이르렀다. 이제 망각을 걱정할 때였다. 지금이 그 먼 미래였다.
* 필립 로스 <에브리맨>
이 사회는 젊음에 정서적 특권을 부여하고, 이것이 모두에게 나이 듦에 대한 불안을 일으킨다. 현대의 모든 도시화된 사회가 성숙함의 가치를 낮잡아 보고 젊은 시절의 기쁨에만 한껏 영광을 돌린다. 이처럼 생애 주기의 가치가 청년에게 유리하게 재평가되는 현상은 끝없이 증가하는 산업 생산성과 무한한 환경 파괴를 숭배하는 세속 사회를 훌륭하게 뒷받침한다. 이런 사회는 더 많이 사고 더 빨리 소비하고 내다 버리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새로운 감각의 생활 리듬을 고안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상업화된 행복과 개인적 안녕의 이미지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기쁨을 주는지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게 놔둔다. 그리고 더 열렬한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고안된 이 이미지 속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행복의 은유는 ‘젊음’이다. 이렇게 행복을 젊음과 동일시하면 모두가 자신과 타인의 정확한 나이를 집요하게 의식하게 된다… 산업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숫자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은 나이 듦의 점수표를 작성하는 데 거의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이며, 저점을 넘어서는 점수는 무조건 나쁘다고 확신한다. 수명이 갈수록 길어지는 시대에, 이제 모두의 삶에서 후반 3분의 2에 해당하는 시기는 끊임없는 상실에 대한 격렬한 근심으로 얼룩진다.
* 수전 손택 <여자에 관하여>
*커버사진 출처 : PIXABAY 무료이미지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