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립이 아무것도 모른다가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중립, 중도 같은 단어는 참 그럴듯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도를 지키는 일. 단어 뜻 그대로 바르고 정답인 듯 느껴진다. 좋은 말이다. 쉽사리 타인이나 사건을 재단하지 않고 신중하다는 의미로 읽히고, 누군가의 감정을 배려하는 예의로도 보인다. 그리고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는 이들은 차고 넘친다. 나도 그랬고 내 친구, 동료, 스치는 관계, 건너 건너의 누군가도.
그것은 대부분 진심으로 느껴졌지만 한편 의아하기도 했다.
인터넷 공간에서 그렇게 첨예하게 부딪치고 벼랑이든 막다른 벽이든 상관없이 돌진하겠단 각오로 한 방향으로 생각을 개진하는 사람들은 다 어디 있나 싶기도 했다. 성별, 지역 간, 세대 간, 소득 간, 정치 성향 별, 더 좁게는 사는 동네에서 아파트의 종류까지 뭐든 나누지 못해 안달하는 우리들은 다 어디 가고 이렇게 정중한 사람들만 현실에 있나 싶었는데, 확증편향을 숟가락으로 떠 먹여주는 미디어 환경과 나만 소중하고 나만 눈물겹게 슬픈 마음들, 나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줄어드는 밖으로 향하는 마음이 그 정중한 현실을 뚫고 점점 눈에 보이는 요즘이다.
특정 계층이나 성향, 생각의 집단에 서 있는 게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그 생각이 과거에 천시받던 것이든 여전히 속으로는 묘하게 경멸하는 시선을 띄게 되든 그들은 상관없이 떳떳하다. 그들에게 경멸의 시선은 시샘의 시선, 이 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발악이라 믿는다.
우물쭈물 생각을 한없이 유보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 아수라의 인과관계를 도무지 파악 못 하겠거나 어느 한쪽 손을 들었다가 자신을 향한 시선과 비난이 두려워서 일 수도 있다. 자신의 공명정대함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숨어서 팝콘을 들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다 좋은 게 좋은 거고 누구 하나 상처받지 않길 원하고 그냥 나는 불구경이나 하고 싶고, 그런 마음.
우린 대체로 그렇게 배워왔던 것 같다. 가운데 선을 잘 지키라고. 아슬아슬하게 평형대를 건너가야 점수를 얻는 방식,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 외는 그냥 잘 듣기나 하라고 배웠던 것 같다.
물론 어떤 극단적인 말과 행동엔 거부감이 든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재단하여 극단으로 싸잡아 편 가르는 극단에도 화가 난다. 그렇다고 아무 의견도, 생각도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무책임하게 보인다. 늘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좋은 극단이 있고 나쁜 극단이 있을까, 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지만 정의로운 가치와 비뚤리고 왜곡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옳은 쪽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려면 때로 극단적임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세상은 정말로 너무 답답하게도 변하지 않기도 하니까. 이렇게 빠른 변화의 시대에, 생활 방식이나 정보, 유행 같은 건 눈 깜짝할 새 변해도 오래 지켜야 할 어떤 가치들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꿈쩍 안 하니까. 우리는 쉽게 잊고 무심하고 천박하기도 하고 얕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한 노조원이 분신한 자리를 사람들이 바쁘게 스칠 때, 고흐의 그림에 수프를 던지고 자신의 입을 꿰매는 환경운동을 뉴스에서 볼 때, 그렇긴 한데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잖아, 로 모든 게 퉁쳐질 때, 쓸쓸하고 마음이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는다.
잘 모르겠고, 나는 관심 없고, 먹고살기 바쁠 뿐인 사람들이 대부분 옳은 것을 신뢰하는 사람들임을 의심하진 않는다. 49대 51로 상식이 뒤바뀌고 요지경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 51이 더 나은 가치를 선택해 줄 것을 믿는다. 그래서 늘 중간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한 발쯤 떼기를 바란다. 실은 알고 있는 것에 귀 기울이길 바란다. 중립은 유효하지만 나에게 작은 불편함, 피해 하나라도 있다면 외면하고 마는 그 마음들이 언젠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켜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