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지긋지긋할 때

# 여러 곳의 나

by 무재

일상이 비슷비슷하게 이어질 때, 머나먼 장소에 있었던 내가 떠오른다. 지난달 내내 나는 너무 바빴고 지쳤다. 압박감에 숨이 찼고 겉으론 잔잔해 보여도 수면 밑으론 가라앉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발길질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하기 싫은 숙제 같은 업무를 가득 쌓아두고 책상 앞에서 잠시 토델파 트레킹을 마치고 웰컴 센터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때를 떠올렸다. 저 높이 떠 있는 햇살 속에 빛나던 평원과 바람과 그때의 잡생각들이 현재와 중첩되었다. 그때도 지쳤지만, 지금의 지침과는 다른 결이었지, 그때도 왠지 마음이 소란했는데 그 소란과 이 소란은 얼마나 다른 무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찾는 점심의 카페에는 바 뒤에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는데,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그림에 눈이 닿을 때마다 어느 미술관의 내가 떠오르기도 한다. 호퍼의 도시인을 닮은 사람들이 가득한 고요한 밤의 휘트니 미술관이나 테이트 모던에서 잠시 다리를 쉬며 앉아 귤을 나눠 먹던 일행의 손이라든지, 앙리 마티스-춤 앞에서 어깨를 기대고 한참을 앉아 있던 중년 커플의 뒷모습 같은 것이 불시에 스치고 지나간다. 만원의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는 내가 목격한 가장 큰 평원을, 차갑고 아득한 호수를 떠올린다.


그런 날들은 이미 지나갔고 나는 손에 잡히는 오늘만을 살아갈 뿐이지만, 가끔은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중첩된 현재에 있는 것도 같다. 그러니까 시간은 그냥 무심히 지나쳐 버린 것이 아니고, 언제든 지금에 놓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과거의 머나먼 장소에서도 나는 얼마나 과거 일상의 나를 끌어들였는지. 후회든 그리움이든 잡생각이든 반추하는 것이든 꼭 둘, 셋의 나를 끼고 있는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지금은 이국의 풍경 속의 나를, 낯선 나를, 흥분되고 벅찬 순간들을 현재에 데려다 놓는다. 굳이 끌어다 놓지 않아도 먹구름이 드리우면 세상이 잿빛으로 물들듯 자연스럽게 장면 하나가, 감각 한 조각이 옆에 기대선다. 지금 보는 거리와 유사한 풍경이 겹치기도 하고 가장 반대의 화면이, 대척의 대화가 펼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게 신물 나고 지긋지긋해지는 요즘 같은 때에는 그 수많은 나들이 건네는 무언의 위로가 좀 도움이 된다. 결국 다 지나갈 것이고 별것 아닌 에피소드가 될 뿐이라고, 누구도 무엇도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먼 훗날 또 다른 환경과 사람들 속에 복작거리며 오늘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늘 그랬듯 지금을 선택할 수도 벗어날 수도 있다고. 지나갔다고 생각했던 장소와 시간에서 내가 말해준다. 언젠가 현재의 나도 말해줄 수 있겠지. 살아감에 버릴 것은 없고, 버릴 수도 없고, 뭐든 괜찮겠지, 무게가 좀 덜어내 진다. 오늘도 나는 어느 때의 나를 보고 걔한테 짐을 좀 덜어주고 무심히 적당히 주어진 시간을 채워본다. 중첩된 장면들을 기꺼이 추억하며.


*커버사진 출처 : PIXABAY 무료이미지 사용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때는 세상의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