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경주

# 여행 30

by 무재

퇴근 후에 오랜만에 저녁 기차를 탔다. 깜깜한 밤에 익숙한 내 방이 아닌 곳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일이 묘하게 긴장됐다. 위험할 것도 없고 사실 그리 낯선 장소도 아니건만 밤 기차가 오랜만이라서였을까.

서울을 벗어나자, 차창에는 피곤한 사람들의 희뿌연 형체만이 유령처럼 들러붙어 있다. 점점이 흩어진 반사된 조명의 꼬리와 창백한 얼굴들을 스치며 10시쯤 역에 내리니 이미 밤이 적요하다.


차가운 손이 뺨을 감싸는 아침 문을 밀고 나가니 희끄무레한 빛 속에 파르스름하니 깎인 봉분이 보인다. 무덤에서 아침을 시작하는 일이 이곳에선 자연스럽다. 가을 경주에 왔다. 늘 꽃잎 휘날리는 봄에 찾아왔었는데, 문득 깊어져 버린 동네의 느티나무들을 보다 즉흥적으로 와버린 여행이다. 대릉원에서부터 박물관, 계림, 경주 오릉까지 반경 2-3km 내외의 거리라 하루 둘러보기에 충분하다. 흐린 아침이 무색하게 금세 따스한 햇살이 번졌고, 번지는 빛의 범위만큼 여행자와 경주의 풍경도 다채로워졌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기로 했다. 입동의 직전이라 아직 공기는 온화하고 떠도는 낙엽의 쌉싸래함도 감미롭다. 쭉 뻗은 대릉원 돌담길을 내처 달리다 월정교로 휘어지고 남천을 건너 오릉까지 간다. 평일 오전의 오릉에는 멀리 잔디 깎는 이를 제외하곤 나뿐이다.

긴 시간을 건너온 다섯 개의 분묘 주위를 홀로 조용히 걷는데, 긴 시간을 건너 갑자기 떨어진 이는 이곳 주인들 입장에선 나겠구나 싶어 진다. 신라 초기 왕들이 누운 부드러운 곡선 위로 얇은 햇살이 커튼처럼 펄럭이고 그 커튼의 흔적을 제약 없이 밟는 건 새들뿐이다. 반가운 무엇을 향해 한껏 몸을 수그렸거나 서로에게 기대고 뻗은 소나무들은 정원을 숭고하게 한다. 풍성한 솔숲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긴 하지만 이팝나무, 배롱나무, 회화나무, 산책로를 둘러싼 아름드리 활엽수들 위로도 가을이 담뿍 담겼다. 이런 계절의 산책은 혼자여도 쓸쓸하지 않고 여럿이어도 소란하지 않다. 내딛는 걸음마다 머리 위로 붉고 노란 전등이 밝혀지며 울적했던 상념들을 쫓아내 버린다.


내 자전거는 다시 곡선을 그리며 천을 따라 반월성까지 달린다.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밭을 지나치고, 저 멀리 첨성대 앞에 거품처럼 바글대는 사람들을 본다. 원숙한 가을의 한낮에 경주 시내를 누비다 보니 사무실, 지하철 속에서 계절을 느낄 새도 없다가 모처럼 이 하루에 가을을 몸에 쏟아붓는 느낌이다. 서늘한 공기와 가을볕이 혼합된 감각이, 마른풀과 잎의 냄새가 비처럼 쏟아진다.

점점 사람이 늘고 낮의 활력이 사위어 갈 때쯤 되니 종일 신나게 페달을 밟은 다리가 뻐근해져 온다. 남은 기차 시간까지는 테두리에 갈색 설탕을 잔뜩 묻힌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

카페에선 고개 빼꼼 내민 대릉원의 봉분이 보였다. 어디를 봐도 저 혼자 삐죽 솟은 무엇이 없어 눈이 편안하다. 지금 내 마음이 나지막한 직선을 그리고 나아간다면 저 발굴 작업 터를 지나고, 낮은 담을 휘돌고 노란 들판도 가로질러 가늠 안 될 시간의 흔적들을 상처 하나 없이 통과해 지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괴물을 사랑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