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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옥 Feb 21. 2022

파란 눈 시아버지, 우리 집 아이 (마지막 이야기)

돌아가시다

9월 30일  


점심을 여느 때처럼 우리가 먹던 대로 야채 넣고 끓인 닭고기와 밥을 드렸다.

기침을 많이 해서 옆으로 눕히고 남편과 나는 이태리 친구 이사벨라를 만나러 차를 타고 십오 분쯤 걸리는 '췰피시' 라는 도시로 갔다. 우리가 거의 24시간 집에 있지만 우리도 기분전환이 필요해 잠깐 외출을 하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차에서 내내 나는 한국 간호원 아줌마가 한 질식이란 단어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태리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파는 이사벨라 집에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나는 언제나 그러듯이 제일 먼저 시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카레처럼 노란 시아버지의 얼굴색이 보통 때와는 달리 죽음을 의미하는 것을 직감하고 소리를 질렀다. 입에는 얼굴색과 똑같은 노란 가래가 잔뜩 고여 있었고 내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질식한 것이다. 다른 사람한테 잠잘 때 눈감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던 이가 자신은 눈을 크게 뜬 채 잠이 들었다. 다시는 깨지 않을 그런 몹쓸 깊은 잠에... 숨이 멎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생각하자 마음이 몹시 아팠고 그 어려운 마지막 순간을 같이 있어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들었다.

기침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집을 잠깐 비운 것에 대해 후회하며 나는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남편 앤디와 우리 집 5살짜리 멀티스 강아지 로미도 쫓아 올라왔다. 앤디는 놀라 숨을 헉헉거리며 자기 아버지를 살펴보고 있었고 로미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꼬리를 치며 내게 달려와 나를 위로하려는 듯했다. 

대개 가족들이 그러듯이 나는 순간 시아버지의 죽음을 나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약을 골라 주듯이 아버지가 시간을 맞추어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선택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24시간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자 앤디는 우리 책임이 아니라며 당신이나 나나 최선을 다했다며 그 순간 내게는 도움이 안 되는 위로를 하려고 애썼다.

나는 더는 시아버지 방에 있을 수 없어서 내려왔고 앤디는 아버지의 열린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색의 다마 같은 눈을 감게 했고 가래를 종이 수건으로 꺼냈고 입을 다물게 했다.

살아 있을 때는 내가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했는데 그 순간에는 피하고 싶은 일 들을 앤디가 맡아해 줘 고마웠다.  남편이 형한테 전화하자 삼십 분 만에 찾아와 내게 쑥스럽다는 듯이 손을 내밀면서 간단하게 , 매우, 나 , 많이, 란 형용사가 안 달린 , 땅케,라고 말하며 고맙다고 인사했고 곧 자기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으로 가서 이십 분 정도 머물렀다. 남편 앤디가 보니까 형이 눈물을 흘리며 울더란다. 자기가 그동안 찾아오지 않은 아버지지가 돌아가셨으니 옛날 일을 회상하며 인생의 허무함을 확인했겠지. 그리고 남편은 우리랑 친하게 지내는 두 가족에게 전화를 했고 그러고 나서 주치의한테 전화하고 장의사에게 전화를 했다. 네덜란드 국적을 가지고 있고 손 대접을 잘하며 항상 시원시원하고 공의 감이 남다른 루찌와 나의 남편과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언제나 부지런하여 휴일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집안에 무엇이라도 수리하곤 하는 그의 남편 칼 하인스가 즉시 쫓아왔다. 그 부부랑은 여행도 자주 갔었고 그래서 그 둘의 자녀인 지금은 다 커 어른이 된 사브리나와 베냐민과도 남다른 관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자동차로 오분 정도 걸리는 가깝게 사는 수잔과 그의 남편 프랑크가 와줘서 우리는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들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설명했다. 막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듯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 우리들을 위로하며 우리가 그동안 잘 해왔다며 칭찬해주는 그런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의사는 아홉 시쯤 와서 사망진단서를 끊어주며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원망이나 후회 같은 것 하지 말라며 본인한테도 잘 된 일이라며 위로해주고 갔다. 한 시간 후에는 장의사가 자기 아들인지 사위인지 덩치가 좋은 젊은 사람이랑 같이 와서 시아버지의 시신을 튼튼하고 까만 비닐로 싸서 층계를 내려와 밖으로 갔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발견하고 시아버지가 밖으로 들려 나가는 것을 본 것이 전부다. 여기는 한국과 달리 누가 죽으면 대개는 그날로 장의사가 와서 시체를 싣고 가 냉장실에 장례식이 있는 날까지 보관해 둔다. 계속 사람들이 있어서 정신을 흩트리지 않게 되어 좋았지만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정말 제대로 울지도  못해본 채 그렇게 쉽게 보냈다. 

우리가 육 년 칠 개월 동안 보살피던 우리 아버지, 우리 집 아이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표현도 한번 못 해보고 이별도 제대로 못 한채 그렇게 보냈다. 장의사가 와서 모시고 갈 때까지 나는 아래층에서 우리를 위로하려 쏜살같이 달려와 준 친구들과 같이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크게 후회할 일은 없다. 일이 년 부모를 보살핀 사람에 비하면 길은 기간이었고 십 년을 돌본 사람에 비하면 짧았다고 할 수 있겠다. 되돌아보면 실수도 숱하게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도 못 다 배우는 법이니까,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끝없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 모든 일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준비할 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 그 상황이 다시 온다 해도 나는 다시 그렇게 결정했을 것이다. 시아버지를 돌보겠다고...  시간의 제약, 몸과 마음의 고단함이 있어도 시아버지의 눈을 보고 당신을 위해서 내가 있지 않냐고 말하고 싶어서 그렇게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아버지 손을 꼭 잡으며 나는 최선을 다 했노라고 말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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