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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옥 Jan 31. 2022

파란 눈 시아버지, 우리 집 아이 (88)

아이가 죽으면 미래가 죽는다 / 기적이 일어나다

6월 9일 (2004)

# 아이가 죽으면 미래가 죽는다


시아버지가 걷지 못하고 침대생활을 한 지 3년 반이 됐다. 

이젠 우리 이름은 전혀 부르지 않고 바지 속에 손을 넣어 기저귀를 찢는 일도 더는 하지 않고 우리도 병간호에 익숙해져 아버지를 돌보는 일에 부담을 느끼지 않아 지낼 만한데 아버지가 말이 없고 너무 조용해 글을 쓸 일이 많지 않아 투정을 부려본다. 

나: "옛날처럼 재밌는 얘기 좀 해 보세요, 심심해요"
시아버지: "나 못해, 나 못 해"

말하는 것을 맡은 뇌세포가 해이해져 아버지의 혀에 지시를 보내지 않나 보다. 그래서 우리말을 이해는 해도 말을 더는 안 하려 든다. 우리가 얼마나 더 아버지를 모셔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가졌던 사고방식 즉 초심으로 그날그날 최선을 다하며 살기로 하겠다. 

독일말로도 '아이가 죽으면 미래도 죽는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부모가 죽으면 과거가 죽는 것 인가? 우리가 아이 때 어땠는지, 자녀들의 과거에 대해 더는 말해 줄 사람이 없어젔으니까 말이다. 




7월 16일

# 기적이 일어나다


기적이 일어났다. 요즈음 시아버지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활짝 웃는다.

전처럼 우리를 위해서 억지로 웃어주는 그런 웃음이 아니라 행복감을 속에서 느껴서 웃는 그런 웃음, 두 살짜리의 웃음을 닮은 그런 순진한 웃음 말이다. 눈으로도 웃고 입을 크게 벌리며 웃는다. 언제나 그렇게 명랑했던 사람처럼 말이다.

요즈음 시아버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시아버지 표정이 어쩜 그렇게 밝아졌냐며 이해할 수 없다며 덩달아 기뻐한다. 지금 시아버지를 보는 사람들은 시아버지가 처음에 우리를 힘들게 했던 거칠던 때를 상상할 수 없어할 거고 처음에 시아버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시아버지의 지금의 모습을 기대하지 못했을 거다. 우리도 기대하거나 가능하다고 생각해 보지 못 한건 마찬가지다. 한 치의 앞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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