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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옥 Jan 10. 2022

파란 눈 시아버지, 우리 집 아이 (63)

이성을 잃은 듯

2월 15일

# 이성을 잃은 듯


우리가 외출할 때는 말없이 나간다.

아버지가 우리가 나가 있는 동안 언젠가 우리가 없다는 것을 눈치챌 수도 있고 우리가 집에 없는 것을 모를 때도 있는데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이럴 때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우리가 없는 동안 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도 그때부터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고 처음부터 그러니까 우리가 떠날 때부터, 우리가 지금 외출하니 이제부터 당신이 혼자예요,라고 알려 주고 우리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우리가 어디에 갈 때는 살짝 사라져 버린다. 시아버지를 돌봐 주러 오는 독일 아줌마들 한테도 귀띔을 해 집에 갈 때는 소리 없이 가라고 일러 주었다. 이 나라식으로 정식으로 예의 바르게 악수하고 집에 간다고 하고 집에 가지 말라고 말이다. 

아버지 닮아 장난기가 많은 아들이 아버지가 하루에도 몇천 번씩 잡았다 놓았다 하는 아버지의 최고의 장난감인 철로 된 삼각형을 잡고 놓아주지 않자 아버지는 이성을 잃고 자기 아들을 잡아먹기라도 하려는 듯이 얼굴이 익은 토마토처럼 빨개지면서 진노하였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 진노가 전해져 피부에 소름이 돋아 날 지경이었다.

나: "쯧쯧.. 어쩌면 자제라는 것은 전혀 할 줄 몰라요"
시아버지: "(어색해하며) 고마워! 나도 느끼고 있었어"
나: "앤디가 당신을 약을 올렸어요?"
시아버지: "응, 나도 그 애를 약을 올리고"

화를 내고 나서는 겸연쩍어 어쩔 줄 몰라하지만 화가 날 때에는 그 감정을 전혀 조절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스로의 감정이 전혀 통제되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건강했을 때도 참을성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어른이었는데 지금은 감정을 조절하는 면에서도 세 살짜리 어린아이를 닮아있다. 병으로 인해 뇌의 유연성이 없어져서 그런가 보다. 

말은 잘하고 고마워하는 성인다운 데가 있는가 하면 사탕 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참을성이 없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와 좌충우돌한다.

그러고 나서 내가 주의를 환기시키면 아차! 한다. 



3월 16일

# 전부 개똥 같아


최근 들어 시아버지의 말수가 많이 줄어들었고 발음도 많이 나빠져 주의 깊이 들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병으로 인해 망가져가고 있음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는 요즈음이다.

오늘은 아버지가 유난히 짜증을 부린다. 

시아버지: "나 이제 더는 살기 싫어, 끝장을 낼 거야!"
나: "그런 말을 하면 나 슬퍼요"
시아버지: "유감이지만 할 수 없어, 전부 개똥 같아!"
나: "용기를 잃으면 안 돼요"
시아버지: "모두 다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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