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경분식 사장 이금순
손글씨의 힘. 찬찬히 보고 있으면 정말 건강하고 정말 행복하고 싶다.
- 사장님. 손글씨 부탁 드려도 될까요?
- 뭐라꼬예?
- 제가요. 라디오 작가로 일하고 있는데요. 사람들 손글씨를 모으거든요.
- 나는 그런 거 못해요.
그렇게 세 번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한 모금의 미소를 보고는 졸라댔고 결국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늦은 시간을 찾았다. 그날 하루 전쟁을 치른뒤에 나온 음식물쓰레기가 가게 중간에 놓인 빨간 양동이 위에 놓여있었고, 그는 내일 김밥에 넣을 연근 무더기를 버무리고 있었다.
- 뭘 쓰지요?
- 뭐든지 좋아요. 늘 생각하시는 것도 좋고요. 지금 막 떠오르는 것도 좋고요.
- 종이 여러 장 줘야 된다.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부산스러웠던 가게 공기가 차분한 리듬으로 돌아섰다.빠른 템포로 연근 무더기를 치대던 그의 손은 매직을 손에 쥐더니 한 자 한 자 곧고 바르게 써 내려갔다.
- ‘사’ 밑에 동그라미 맞지요?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
- 네. 동그라미 맞아요.
예전 텔레비전 매거진 프로그램을 할 때 새벽에 메일을 보낼 때가 있었다. 내일이 바로 촬영인데 촬영 구성안을 미루고 미루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활활 타오를 때쯤 ‘감독님만 믿을게요 구성안’을 써서 새벽에 담당피디나 브이제이에게 넘기곤 했는데 메일을 보내고 나선 수신확인을 했다. 막 메일을 보냈으니 보통은 ‘읽지 않음’으로 나오는데 아주 간혹 바로 ‘읽음’이 될 때가 있었다. 한 밤의 위로. 까맣고 적적한 새벽에 나만홀로 깨어있는 게 아니구나.
‘새벽 메일 읽음’은 ‘분식집’으로 이어지고 있다. N잡러 시대. 오전 작가, 오후 작은 학원 운영을 한 지 3년째 됐고 남들 저녁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나올 때쯤 퇴근할 때가 있다. 30년이 넘은 구축 아파트여서 그 시간에 아파트 주차장은 이미 중고 자동차 매매 상사가 돼 있다. 때문에 늦은 퇴근길에는 집 주변 영업을 끝낸 가게 앞에 주차를 하고 걸어오곤 하는데 그때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상가를 지나쳐야 한다. 이미 상가 안에 오밀조밀 들어선 수십 개의 가게들은 눈꺼풀을 덮은 시간, 상가 1층 분식집만이 초롱초롱 눈을 뜨고 있다.
담백하게 아파트 이름을 딴 분식집은 여자 사장님 혼자 하고 계신데 점심시간이면 그야말로 미어터진다. 일찍 메뉴가 소진이 되는 바람에 낮 한 시에 가도 김밥 한 줄 포장이 안 될 때가 있는 동네 맛집은 퇴근길에 늘불이 켜져 있다. 어린 손주 안부를 묻는 딸과의 통화를 몇 번 들었던 터라 60대 중반쯤 되지 않았을까 싶은 그는 내일을 위해 달걀을 부치고, 파를 다듬고, 멸치 똥을떼어야 할 것이다. 분식집에서 환하게 비치는 불빛. 오염되지 않은 위로. 먼저 퇴근했다는 치사한 안도감과 함께 진심을 담은 위로가 된다.
니도 욕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