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bc울산방송 편성제작국 작가 최아현
- '그냥’은 왜 붙였어?
- 그냥이요. 많이 내려놓으려고 해요. 욕심 없이, 무탈하게.
- 왜? 욕심부려도 되는 나인데, 아등바등해도 되고.
- 근데 왜 눈물이 나려고 하죠...
이미 눈시울이 붉어 있었다. 우리 막내작가도 나이가 들어가고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같은 동네에 사는 회사 기술국 감독님이 작은 문구 세트를 건넸을 때 집에 우환이 있는 것처럼 줄줄 새어 나오는 눈물을 참느라 식겁을 했고, 20대 헬스강사의 ‘잘하고 있다 ‘라는 말에 40대 중년의 내 마음이 몽글거리는 것처럼.
'욕심부려도 돼’, 문구 세트, ‘잘하고 있어요’는 포장만 다를 뿐 하나다. 삶의 응원. 칭찬이 필요한 건 아이보다어른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걷기만 해도, 밥만 잘 먹어도 칭찬을 받지만 어른은 잘해도 본전이다.
같은 포지션. 그래서 짠하다. 대학 시절, 꿈을 위해 부산에서 방송 아카데미를 다닐 때 당시 KBS역사스페셜메인 작가님(성이 ‘추’였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이 특강을 하러 오셨다.
- 방송작가는 ‘작가’가 아니라 ‘잡가’라고 생각해요.
실제 일을 하면서 이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다. 피디, 진행자와 호흡을 맞추고, 출연자들을 섭외하고, 촬영장소를 알아보고, 구성안과 대본을 쓰고, 자막을 뽑고, 물을 챙기고, 프린트를 하고, 욕도 처먹고, ‘쿠사리’도 얻어먹고, 울기도 하는 잡가. 나는 라디오만 전념하면서 일이 수월해졌고, 늘 심정적으로 막내인 그도 두툼한 경력으로 ‘짬‘ 이 생겼지만 같은 업을 하고 있는 사람끼리의 동질감과 유대감은 애틋함으로 이어진다.
꽤 오래전, 점심에 라디오팀 회식이 있었다. 열 명쯤 모였던 것 같은데 그는 앉자마자 티슈를 깔고, 수저를 세팅하고, 컵에 물을 부었다. 다들 돕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마침 내 앞에 앉은 기상캐스터는 손가락이 골절됐는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막내작가와 정기적으로만나 알콩달콩 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마치 내 동생만 죽어라고 일하는 것 같은 묘한 적개심이 일었다. 독립운동가 깜냥은 못돼도 맨 앞줄에 서서 태극기는 흔드는 기질이어서 같이 좀 하자고 한마디 내질렀는데, 옆에 있던 주책없는 피디가 이상하고 희한한 말로 희석시키고 말았다.
- 얼마 전에 교통사고 당했잖아.
‘아 그래요? 그러면 병원 가서 링거 달고 누워 있어야지 여긴 어떻게 왔대요. 나도 앞으로 교통사고 당했다고 해야겠다. 손가락 까딱 안 하게.‘라고 했어야 했지만태극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상캐스터에게 같이 좀하자고 했던 건, 막내작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쩌면그의 모습에서 내가 투영됐으리라.
무시. 처음 회사에 들어와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같은 작가였던 M선배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라고 했고, (믿기 어렵겠지만 진짜다) 술자리에서 당시 팀장이 T피디에게 구성안 시험까지 치르고 같이 들어온 동료작가와 건배를 하라고 했더니, 그 피디는 ‘제가 얘랑 왜 합니까? “라고 했다. 지금이야 ‘역시 세상에는 또라이가 많구나 ‘라고 넘기겠지만 그때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고 헉헉 됐다. 그러나 인생무상이고 권불십년. M은 어느 순간 회사를 나갔고, T는 놀랄 정도로 순한 사람이 돼 곧 안식년을 간다.
그리고 그와 나는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