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번째 : 우렁각시 후배

ubc울산방송 편성제작국 아나운서 이승재

by 김밀

# A4지


- 선배, 승재 왔다 갔나?

- 어. 잠깐 왔던데.


출근하자마자 창가에 놓여있는 A4지 한 박스가 눈에 띄었다. 옆에는 A4지 박스 ‘뚜껑’을 뒤집어서 늘 삐죽삐죽 흩어져있는 A4지도 정리해두었다. 5층에 있는 A4지나 종이컵, 커피믹스 등을 8층으로 가져오는 것은 내 몫. 그 중 A4지 한 박스는 버거워서 한 묶음, 두 묶음씩으로 옮겨다두는데 그걸 그가 본 모양이다. 꽤 오래전부터 A4지를 한 박스씩 가져다놓고 있다. 다행이다. 밉상 선배는 아니구나.


# 둥글레차

3개월에 한번씩 라디오 캠페인 녹음을 한다. 예를 들면 경찰이 말하는 보이스피싱 예방법, 초등학교 영양사가 전달하는 아이들 혼밥 대신 가족 한 끼의 중요성,회사원이 말하는 ‘퇴근 이후 업무 카톡은 하지 맙시다’ 등을 녹음하는데, 외부 사람들이 회사를 방문한다. 밖에서 손님들이 올때면 애를 쓴다. 처음 가는 곳에 가면 누구나 뻘쭘하니까.


TV와 라디오를 보고 듣고 모니터 하는 일을 잠깐 한 적이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지정해주는 방송을 보고 매주 한번 프로그램의 장단점을 적어 제출하는 일이였다. 출퇴근 없이 그저 메일로 보내면 되는 일이였는데, 무슨 일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한 날은 사무실을 찾았다.여자 직원 한 명, 그보다 높아보이는 남자 직원 한 명, 그리고 이들보다 높아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 직원 한 명까지 모두 세 명이 일을 하고 있는 곳. 문을 열고 들어섰고,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여자직원이 하는 말이 “저기 차 있습니다.” 였다. ‘드시고 싶으면 드세요’ 라는 말도 덧붙인 것 같은데,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 찝찝한 기분은 서운함이었다. 차 한 잔 주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작은 사무실에 사람들이 한 부대가 오고 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돈을 받고 있는 입장이라서 서러움까지 올라왔다.


이 일이 있은 이후로, 더 차를 챙긴다. 회사를 찾는 외부 사람들에게 늘 차 한 잔을 준비한다. 둥글레차나 녹차 티백 우리고, 기왕이면 작은 종이컵이 아닌 아이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의 종이컵으로. 그리곤 위에 티슈를 올려둔다. 단골 죽집에 전화로 죽 하나를 주문하고,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했더니 그릇 위에 얇은 접시가올려져 있었는데, 대접받는 느낌이 좋았다. 이런 마음을 알아주는 동료, A4지를 나르는 후배다.


- 이렇게 차 준비해주시면 있어보여서 좋아요. 오시는 분들한테요. 뭔가 구색을 맞춰서 하는 것 같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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